121화
푹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이 닿았다. 쌀쌀한 물비린내와 서늘한 석실의 바람은 사라지고 씁쓸한 약 냄새가 흐른다. 눈이 시리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빛이 밝혀져 있으며, 따뜻한 온기가 감돈다. 아늑하고 다정하다. 사위가 그런데, 잠든 시오한은 처음부터 그 모습 그대로 조각된 것 같다. 매끄러운 뺨으로 불빛이 흔들거리는 모습을 숨죽이고 바라보던 이도하가 천천히 시오한의 손목에 손끝을 대보았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를 불러보았다. 신음하듯 꽉 잠긴 목소리였다. 하루쯤은 잠들어 있을 거라고 했고, 회복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했으면서도 이도하는 지금만은 그가 눈을 뜨길 바랐다. 자신이 너무도 좋아하는 다정한 황금색 눈동자로 저를 바라봐 주길 원했다.
“시오한.”
이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긴 앞머리가 먼저, 그리고 이마가 시오한의 가슴에 닿았다. 이도하는 눈을 감았다. 오르락내리락, 그가 숨을 쉰다. 심장이 박동한다. 이도하는 그 움직임에 맞춰 숨을 쉬어 보았다. 눈물이 시오한의 가슴 위로 한 방울 툭, 떨어졌다. 이도하는 하얀 이불 위로 눈물 자국이 스며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왜 내가 그런 광경을 봐야 했어? 왜 당신은 내게 모리온의 일을 알려주려고 했지?
계약주의 죽음. 죽음 이후 숨이 멎는 그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려 눈을 감은 얼굴조차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마지막. 그의 흔적이 남은 이 세계에는 두 번 다시 발 들일 수 없게 되는 완전한 끝. 그런 끝 따위 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계약주와 계약자, 결국 그들 사이에 기억 말고는 아무것도 온전히 남지 않는다는 사실 따위.
숨을 삼키며 이도하는 눈을 내리감고 말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몇 방울이 털어져 버리듯 후드득 떨어졌다.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 시오한.”
기력이 이미 바닥난 상태에서도 제 투정을 받아줄 힘이나마 남아 있었으니, 암살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이미 충분히 절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충분했을 것이다. 세 번이나 암살이 있었다고 했으니 그 이전에도 얼마든지 저를 소환할 수 있었을 텐데.
남들은 다 어떻게든 써먹지 못해 안달하는 힘을 두고도 당신은 왜 한 번을 이용해 먹질 않아. 정작 가장 필요한 순간에는.
‘난 그대가 정말로 간절했어.’
‘그대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저를 소환했으면서도. 어째서.
‘당신의 계약주가 바라는 게 그저 당신뿐이라면, 부럽네요, 이도하씨.’
이도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평안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도하는 제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시오한을 보았다. 심장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한다. 그가 손을 뻗었다. 중간에 망설이듯 잠시 멈추었으나, 그 손은 곧 단아한 이마에 닿고 말았다. 황금색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위로 흩어졌다. 이도하가 숨을 몰아쉬다가 이내 질끈 눈을 감았다. 푸른 섬광이 감긴 눈 안에 감춰졌다.
다시, 기억이 쏟아졌다.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모리온 때와는 달랐다. 그는 확실하게 이도하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기억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스스로 찾아야 했다. 수천, 수만 장의 필름이 아주 찰나 간에 뒤바뀌듯 엉켰고 목소리와 소리들이 엉망으로 뭉개졌다. 이대로 그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릴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멈추었다.
창밖으로 해가 쏟아지고 있다. 좋은 날이다. 매애앰- 어디선가 그렇게 매미 소리가 들릴 것 같은 환한 한 낮.
[부황께서 안 계신다고?]
태자가 돌아섰다. 벽에 걸린 반질반질한 장식에 잠시 그의 얼굴이 스쳤다. 긴 금발은 단정하게 어깨 위로 정리되어 있었으며, 윤기가 흐르는 짙은 푸른색의 정복이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무심한 황금색 눈동자가 무감하게 앳된 제 얼굴을 아주 잠깐 흘깃했다가, 곧 시선을 돌렸다.
[예, 전하. 좀 전에 급히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무어라 말씀을 전할까요.]
[되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노인은 더 말하지 않고 깊이 허리를 숙인 뒤 뒷걸음쳐 물러났다. 노인이 사라진 뒤에도 잠시 그곳에 서 있던 태자는 곧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종종걸음 치며 따라오는 기척은 있었으나 그의 앞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감히 태자의 앞에 걸어서도, 그 길을 막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제 궁으로 돌아가려던 태자는 긴 회랑을 걷다 문득 바깥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비가 내리더니 그 이후로 꽃이 아주 활짝 만개해서 꽃내음이 회랑까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해가 쨍하게 신록을 비추고 있었다.
언제 여름이 왔지? 추운 줄도 더운 줄도 모르고 있었던 태자는 가만히 녹음이 우거진 정원의 정경을 바라보다, 충동적으로 회랑을 벗어났다. 전하-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손만 내저었다. 그러자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 그는 완연히 꽃과 녹음에 둘러싸였다.
화원이었다. 사방이 커다란 덤불로 휩싸여 무더기씩 푸르고 붉은, 또는 흰 꽃들이 만개해 있다. 새파란 하늘에 쨍하게 햇볕이 닿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태자는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푸릇푸릇한 풀 냄새가 폐부까지 녹음으로 물들이는 것 같았다. 제가 기분이 가라앉았던 것도 몰랐던 그는 조금 미소 지었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니 눈이 부셔 눈동자가 욱신욱신한다.
[…좋네.]
태자가 중얼거렸다.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그런가. 매번 지나다니면서도 이렇게 지척에 꽃과 초록이 우거진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태자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냥 무슨 일인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저도 제가 뭘 바라는지 모른 채로 그저 바랐다. 이대로는 아무래도 아쉬워, 잠깐의 충동이 조금 더 이어졌으면 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비명소리가 단말마처럼 꽥, 났다.
[으악!]
[…?]
태자는 제가 무엇을 하는 줄도 몰랐다. 비명소리가 꽥 들리더니 별안간 뭐가 툭 떨어졌고, 그는 그것을 얼결에 받았다가 무게에 휩쓸려 같이 바닥을 뒹굴어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그는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늘에 해가 쨍하니 떠 있으니 눈이 부셔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와, 씨. 대박. 깜짝 놀랐네.]
휴- 한숨을 내뱉은 실루엣이 이마를 탁 털어냈다. 그리고는 해맑게 인사했다.
[야, 안녕!]
[…….]
제가 깔고 앉은 사람에게 하는 인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랑한 인사였다. 작은 움직임이 머리 꼭대기에 걸린 해를 가렸고, 태자는 그제야 제 위의 실루엣을 어렴풋이나마 제대로 보았다.
그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아이였다. 그림자가 져 머리가 까매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까마귀의 깃털처럼 머리가 새까맣고, 눈동자도 똑같이 새까맣다. 아이가 유쾌하게 씩 웃었다. 별안간 뚝 떨어졌다거나, 그래서 누군가와 부딪쳤다거나, 그러다가 그 누군가를 깔고 앉았다거나, 깔고 앉은 이가 누구인지라든가. 하여간 이 상황에 대해서 뭔가 의문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
[우와.]
아이가 말했다.
[우와, 너 되게 예쁘다.]
태자가 눈만 끔뻑거렸다. 겉으로 봐서는 표정 변화라고는 없었지만, 그는 실로 어안이 벙벙하여 생전 처음으로 넋이 나갔다고 봐도 좋을 상태였다. 예쁘다고? 지금 저더러 ‘너’라고 불렀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우와아,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여기는 다 예쁘네. 혼잣말하는 아이를 향해 마침내 태자가 물었다.
[…그대는 뭐지?]
순간적으로는 암살인가 했으나, 아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그의 또래로 보였다. 계약자라고 해도 이런 조그만 계약자는 본 적이 없고, 있어도 암살자로 쓰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에트레제에 드나들 수 있는 이만한 나이대의 아이들 중 그가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특히나 이렇게 생소한 생김새라면 절대로 잊을 리가 없으니, 저 위에서 어떠한 사고로 떨어졌을 리도 없었다. 그렇게 떨어졌다기에 아이는 너무 신나고 해맑아 보이기도 했다. 감히 섣불리 건드려서도 안 되는 황태자를 덮쳐 깔아뭉개 놓고서, 심지어 전혀 그를 알아보는 눈치도 아니다.
[나? 뭐긴 뭐야, 인간이지!]
[…….]
그래, 행여나 의심을 한 톨이라도 가졌다면 이따위 말을 농담이랍시고 할 리가 없다. 아이는 제가 누군지 모른다. 혼란스러움을 감추고 태자가 다시 물었다.
[…똑바로 말해라.]
[뜩바로 말해롸.]
아이가 고개를 흔들며 흥겹게 그의 말을 따라했다. 이 무례한 행동에 그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또 푸하하 웃음을 터트린 아이가 즐겁게 말했다.
[난 이도하야!]
[…이도하?]
이름을 물은 건 아니었는데. 게다가 밑도 끝도 없이 제 이름만 툭 던지는 자기소개를 그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아이가 물었다.
[응, 넌 이름이 뭔데?]
[…….]
[너 이름 뭐냐니까?]
그는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살이 아이의 머리로 가려졌다, 나타났다 하며 몹시 눈이 부셨고, 아이의 얼굴도 딱 그만큼 아른거렸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
[너 이름 몰라? 없어?]
한참이나 대답하지 않자 아이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도 분명 이름이 있었다. 모두가 당연히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으나 감히 불러서는 안 되기 때문에,그 누구도 부른 적도, 물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제가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었고, 그런 적도 없었다. 주어진 이름이었으나 부르라고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 잠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 이름? 그게 뭐였더라? 생소한 혼란 속을 헤매던 태자가 마침내 대답했다.
[…시오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