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20화 (120/250)

120화

“그 애를 나한테 보여주려고?”

모리온은 반응이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미약하게 들썩이는 가슴만이 그에게 아직 숨이 붙어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 이도하가 답답한 숨을 토해냈다. 속이 말할 수 없는 무언가로 아주 꽉꽉 들어차 틀어 막힌 것 같다.

제가 어떤 인간일 줄 알고.

신은호의 곁에 그 애를 걱정하는 사람이, 그 애를 위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 어째서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저에게 운을 걸어보려고 했을까. 사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그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선택지였기 때문에. 도박인 걸 알면서도 걸어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건 기억을 읽는 게 아니잖아.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이런 것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 필요 없었던 것들이었다.

바라건대, 세상이 그 한 번만의 운만큼은 아이에게 허락해 주길 기원했던 그런 마음 따위는.

‘그웬달, 조셉- 그들보다도, 제가 주도한 연구입니다.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진행되지 못합니다. 전부 고하겠습니다. 저쪽에서 원했던 것도, 하려던 것도, 뭘 하고자 하는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그러니….’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창백하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얼굴, 마른 몸, 그럼에도 두 눈만은, 또렷하게 절 보고 있었더랬다.

‘감히 자비를 청합니다.’

제 자신이 아닌, 아이를 위해서였던 마음 따위도. 알지 않을 수 있었는데.

차라리 정말 선의였다면 좋았을걸. 드리시니언의 말처럼 세상을 위한다, 계약자를 잃은 계약주들을 위해서다, 그런 선의였기만 했더라면 좋았을걸.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안타깝지 않다고 코웃음이나 칠 수 있었을 텐데.

‘그래도 우리는 이해하잖아.’

남자의 바람 같은 건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잠깐의 동정, 제가 굳이 시간을 더 낼 필요까지는 없는 정성. 이도하가 베푼 건 딱 거기까지였다. 신경 썼지만, 제가 먼저 더 나서지는 않았다. 이도하는 지금 아이가- 신은호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뭘 하고 지내는지도. 시설의 원장이 언론 플레이는 해 대지만 이제 온 세상에 신은호가 계약자인 게 알려졌으니 해코지를 할 수는 없을 테고, 보호자를 자청해 아이의 마력으로 제 뱃속을 다 채운다 해도 어쨌든 신은호는 무사할 것이다. 그걸로 됐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신은호가 계약자라는 전제하의 얘기였다. 12살짜리 계약자는 세상에 없었지만, 12살짜리 특기자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 신은호에게 쏟아지는 관심도, 보호도 잠깐의 거품처럼 꺼질지 모르는 것이다. 고작 그 정도의 것들이었다.

제가 왜 이런 걸 알아야 했을까.

시오한, 왜?

이도하는 혼란스러웠다. 이제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리온은 이미 그에게 모든 것을 보여준 것으로 만족한 듯했다. 이걸로 이도하가 아이에게 몇 푼 안 되는 동정이라도 베푼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이제 모리온이 나 소환 못 해? 모리온 못 만나?’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마지막 인정 따위가 뭔데. 저더러 도대체 뭘 하라고. 신은호는 괜찮을 거라고, 잘 살 거라고 몇 마디 던지면 그게 인정인가?

계약주가 죽는다면,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게 계약자인데. 무슨 수로 괜찮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신은호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모리온이 죽었어-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상상한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화인지, 울분인지,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마지막 따위 보지 않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제 계약명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된다면.

꽉 쥔 제 손끝이 차갑게 손바닥을 찌른다. 바닥이 무저갱처럼 쑥 꺼지는 것 같다. 척수를 따라 제 모든 것이 쭉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감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도하가 모리온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눈이나마 간신히 뜨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목을 가누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몸이다. 남은 기력이라고는 없었고, 얼마 없는 마력조차도 없었다. 소환은 어불성설이었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차라리 시오한의 마력 없이 무작정 세계를 짓밟고 넘어온 지금이라면.

“불러.”

쌔액- 모리온이 가는 숨을 내쉬었다. 이도하는 문득 그가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로 절 보았다고 느꼈다. 우우우웅- 이명이 울리고, 이도하의 눈이 새파란 섬광으로 물들었다. 공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명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고막을 꿰뚫을 듯 높아진다. 모리온의 눈에 언뜻 푸른빛이 돌았다. 그가 입을 달싹였다.

[…루케.]

소환진이 펼쳐졌다. 깨지고, 조각나 부서진 것을 어설프게 맞춘 것처럼 갈라진 소환진이었다. 빛은 희미하고, 당장이라도 꺼질 것처럼 흔들린다. 그 위로 조그만 형상이 나타났다. 고장 난 전등처럼 깜빡거린다. 신은호였다.

“야! 이 시발 너-”

와락 욕부터 하고 달려들려던 신은호가 우뚝 멈추었다. 얼굴 가득 차 있던 안도가 씻겨 내려가듯 사라졌다. 신은호가 눈만 깜빡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도하를 보고는 울 것처럼 일그러진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숨을 씩씩거린다.

“…모리온?”

겁에 질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가늘게 떨려 애처롭기까지 하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거리는 제 모습과 조각난 소환진까지 본 신은호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바닥에 늘어진 모리온의 손끝이 까딱였다. 흠칫 몸을 떤 신은호가 소환진 위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소환진이 흔들리자, 질끈 입술을 깨물더니 와락 달려들고 만다.

“모리온, 모리온?”

“…….”

“모리온 맞지? 맞잖아, 맞잖아! 왜 그래? 시발, 너 뭐 했어? 뭐 했냐고!!”

신은호는 차마 모리온을 만지지도 못하고, 이도하에게 날을 세우며 덤벼들었다. 모리온의 손목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손톱을 세우고, 이도하를 떠밀었다. 이도하가 그런 신은호를 붙잡았다. 이도하를 떨쳐내려다 모리온을 건드리게 될까 봐 신은호는 몸부림치지도 못하며 눈을 치떴다.

“인사해.”

“개소리하지 마! 시발 너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마지막이야.”

“죽여 버릴 거라고!”

왈칵- 신은호가 눈물을 터트렸다.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처럼. 둑이 터진 듯 한 번 터진 눈물은 뺨을 타고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도하에게 욕설을 퍼붓지도, 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신은호는 어쩔 줄 모르고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냥 울기 시작했다. 모리온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손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이도하를 보았다가, 눈을 감았다가, 닦아냈다가, 종래에는 결국 그저 겁에 질려서. 울음소리가 감옥 안을 가득 채웠다.

“모리온, 모리온. 왜 그래, 모리온.”

“…….”

“안 돼, 모리온. 가지 마. 가지 마, 응? 나 보여? 나 여기 있어, 모리온.”

죽으면 안 돼. 제발 죽지 마. 그러지 마. 신은호는 애원하고 있었다. 엉금엉금 기어간 신은호는 모리온에게 차마 닿지 못하고 그 앞에 꼬꾸라져 엉엉 울었다. 진즉에 초점이 사라진 눈동자는 그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쌔액- 꺼져가는 숨만 미약하게 울음 사이사이로 젖어 들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응? 약속했잖아, 나랑 약속했잖아!! 모리온 살려준다고 했잖아!”

신은호가 이도하를 잡고 흔들었다. 소맷자락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제발, 제발, 인소더블이잖아, 형은 인소더블이잖아. 할 수 있잖아. 뭐든 할 수 있잖아.”

“…….”

“제발….”

절규인지 울음인지 모르겠다. 신은호는 엎드린 채로 헉헉거렸다. 아이는 이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들썩거렸다. 이도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아있을 거라고, 어쩌면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어도 잘 있다면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계약주의 죽음을 갑작스레 느끼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제가 정말 옳은 선택을 한 건지 이도하는 알 수 없었다.

“모리온, 모리온. 가지 마….”

그는 이미 죽은 것 같았다. 고개를 떨군 채,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아주 약하게 움직이는 어깨만으로 간신히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그가 팔을 움찔했다. 뼈 위에 살점만 달라붙은 것처럼 마른 팔이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팔을 들었다. 앙상한 손바닥이 신은호의 등에 내려앉았다.

“…….”

신은호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마주 보는 눈은 없었다. 신은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기다리듯 한참을 모리온만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문득 희망이 스쳤다. 신은호가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갔다. 차마 만지지 못했던 앙상한 품으로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안겼다. 힘 한 톨 없는 팔이 그렇게 그를 당겨 안은 것처럼. 모리온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작은 어깨에 제 얼굴을 기댄 그가 마침내 눈을 내리감았다. 볼을 따라 마른 눈물이 한 줄기 흘러, 신은호에게로 떨어졌다.

“…나 …나, 괜찮아. 모리온.”

어색하고 불편하게, 몸을 웅크린 채 거의 닿을 듯 말듯 모리온에게 안긴 신은호가 더듬더듬 말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으나, 신은호가 재빨리 그것을 닦아냈다.

“모리온, 나-”

이명이 사라졌다. 푸른 소환진이 산산조각으로 깨져 사라졌다. 신은호의 신형이 잠깐 푸른빛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남은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소환진도, 이명도, 신은호도, 원래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처럼 기척조차 남기지 않았다. 새까만 감옥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바깥으로 거센 비가 쏟아지는 소리만 가득하다. 쿠르릉- 하늘이 흔들릴 것처럼 울었다. 천둥이 치고 있는 것 같다.

“…….”

이도하는 더 이상 맥이 뛰지 않는 손목을 놓았다. 모리온은 아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벽에 기대앉은 채로. 아주 낡고 바란 바위 같다. 이도하는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서 있던 군나르 아스터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는 입술만 몇 번 달싹이다 말았다. 무언가를 묻고 싶은데, 뭘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리온의 시체만이 우두커니 어두운 감옥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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