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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9화 (119/250)

119화

남자가 돌아섰다. 그와 눈이 마주친 중년인이 움칠하더니, 거보라는 듯 씩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진중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 계약자를 잃은 계약주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계약주를 잃은 계약자들은 또 어떻고. 이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일이야.]

[…관심 없습니다.]

계약자를 잃은 계약주?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결국 중년인도 계약주가 되고 싶을 뿐이다. 돈벌이가 하고 싶은 것뿐이고. 남자는 조소했다.

계약을 타인에게 양도한다. 어쨌든 저 중년인의 두뇌로는 할 수 없는 발상임은 분명했다. 누군가 머리와 지능을 빼고 모든 걸 가진 중년인의 뒤를 부추긴 게 틀림없다. 여하간 전 관심 없다.

[모리온, 이것 봐라! 나 수학 시험 백 점 받았어!!]

그날은 아이와 꼭 소환을 하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소환진에서 펄쩍 뛰어나온 아이가 대뜸 회색 종이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그것을 받다가 손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남자의 손에서 떠나간 꽤 큰 사이즈의 종이는 팔랑, 소환진의 여파로 인 바람을 타더니 얄궂게도 꽤 멀리 날아가고 말았다.

[어어.]

아이가 황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우뚝 멈춰 섰다. 남자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귀를 막았다.

[으아아아아악!! 내 시험지!! 악!]

그러게 왜 네 세상의 것을 여기까지 갖고 오냐, 까딱하면 사라지는 걸 모르냐, 벌써 잃어버린 게 다 몇 개냐, 남자는 순식간에 떠오르는 이 수많은 잔소리를 겸허하게 포용했다. 그냥 다 잊자. 다퉈 무엇하리. 아이는 아주 억울해하며 소란을 피웠고, 그래서 남자는 그날 일을 있었던 일은 정말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차피 부모도 없고 마력도 없고 하여간 아무것도 없이 태어난 팔자다. 이게 다 제 운이다, 하며.

그래도 이건 아닌데.

아, 정말 운도 더럽게 없지.

흥건하게 토해낸 피를 보며 모리온은 생각했다. 요새 정말 몸이 심상찮다 느꼈더랬다. 얼마 못 살 것이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몸에 있는 피를 거의 절반은 쏟아낸 것 같은 몰골을 보니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진짜 얼마 못 살겠구나. 그는 감흥 없이 생각했다.

부모도 없어, 마력도 없어, 가진 거라고는 머리뿐인데 생명줄마저 짧다니. 참 대단한 인생이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여태 아득바득 살았는지 모르겠다. 참 허망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 꼬맹이는 이제 어떡하지.

왜 그 애의 얼굴이 그렇게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랬다. 모리온은 그런 제가 어이가 없어 픽 웃었다.

너는 어떻게 하지.

부모도 없고, 친구도 없고, 제가 학대받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시설의 원장을 존경한다는 너는. 고작 저 같은 인간마저 좋은 사람이라며 매달리는 너는. 제가 애정에 굶주린 줄도 모르고 있는 너는 이제 어쩌지.

늘 묻지도 않은 것을 조잘대며 떠드는 바람에 이제 그는 안다. 아이가 좋은 사람이라 말하던 그 원장에게 아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지나지 않았다. 제가 죽어 아이가 더 이상 계약자가 아니게 된다면 그는….

저를 비롯해 그 애의 옆에는 좋은 어른도, 좋은 친구도, 좋은 사람도 없었다. 그 애는 정말로 혼자였다.

‘세상에 계약자를 잃은 계약주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계약주를 잃은 계약자들은 또 어떻고.’

하필 그 순간 그 중년인의 말이 떠올랐던 건 우연이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남자가 걸렸다는 병은 본 적도 없는 부모가 물려준 유전병이었다. 다른 뒷공작이 있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저 세상이 그렇게 불합리한 것이다.

도둑질.

그것조차도 우연인 것처럼. 아이의 능력이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얄궂다, 얄궂어. 남자는 조소했다.

[안녕, 아가.]

[……]

아이는 다정하게 인사하는 노인을 피해 대꾸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좋은 사람이야.]

저를 쳐다보는 아이에게 남자는 말했다. 저도 아니고, 아이가 말하는 그 시설의 원장도 아니고, 이 사람이야말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좋은 사람이다. 아이는 아까운 시간을 왜 여기서 낭비해야 하는지 퍽 불만인 눈치였다. 시큰둥하게 그렇구나, 하더니 곧 노인이 있건 말건 제 할 말이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어땠고, 오늘 시설에서는 어땠으며, 오늘 제 세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굳이 말릴 것도 없었다. 남자의 마력은 여전히 개미 똥만 했고 몸까지 안 좋았으므로 소환은 오래가지도 못했다. 아이는 늘 남자가 절 돌려보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엾은 아이구나.]

노인이 말했다. 사실 노인이라기에 그는 올해 고작 예순에 불과했다. 풍파에 휩쓸려 훨씬 더 늙어버린 것뿐이다. 젊었을 적의 노인은 굉장했다. 그는 지금도 이름만 대면 누구든 알아차릴 대단한 용병이었다.

[정말 가능하겠어?]

[확신 같은 게 어디 있습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는 겁니다.]

노인은 고개만 주억거렸다.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한때는 당신이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는데.]

노인이 픽 웃었다. 거보란 듯이.

[사람이 다 그렇지. 겪어보지 않고서는 이해하지 못해.]

[아직도 보고 싶습니까?]

[…늘 생각이 나.]

남자는 한때 대단한 용병이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는 용병 계약주였다. 남자는 제가 평생 계약주로 남을 줄로 믿었다고 했다. 어느 날 그의 계약자가 계약 파기를 요청하기 전까지는.

그의 계약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결혼을 했다. 아이가 생겼다고 했다.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여겼지만, 노인은 평생 볼 수 없을 아이였다. 그의 계약자는 사랑하는 여자와 아이를 위해 더 안전한 삶을 선택했다. 누구보다 계약자로서의 삶을 즐겼으나,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마치 담배를 끊는 것처럼 그의 계약자는 완전한 단절을 원했고, 해서 노인은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제 계약자를 위한 행복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에.

[나로 인해 누군가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그 특별한 감각을, 그 유대를 어디서 메꾸겠는가. 그는 가능했던 모양이지만.]

노인이 씁쓸하게 말했다.

[당신의 계약자와는 많이 다릅니다. 입도 험하고, 고집도 세요. 와중에 머리는 좋은지 잔머리는 기가 막힙니다.]

[하하.]

[그래도 당신과는 잘 맞을 겁니다. 당신만큼이나 외로움을 타니, 길 잃은 고양이처럼 서로 핥아주면서 지내보십시오.]

[착한 아이야.]

[그건 아니고요.]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고, 남자도 슬며시 웃었다.

[수석님.]

중년인은 예고 없이 찾아온 남자의 모습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지난번에 얘기하셨던 그 연구, 한번 해 보죠.]

중년인이 씩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속내가 훤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능이라고는 별 볼 일도 없는 수준인 저 중년인의 뒤에 누가 그를 부추기고 있든, 뭘 노리고 있든, 남자는 다 상관없었다. 계약자를 위한 계약주, 계약주를 잃은 계약자를 위해. 허울 좋은 이 연구가 혹시나, 정말 행여나 성공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 이용되게 될지도 그는 알았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제 주제에 세상을 걱정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얼마 남지도 않은 목숨, 죽어 사라져 봤자 아무렇지 않을 텐데.

[모리온!]

하지만 너만은 그러지 못할 테니. 떼쟁이에다 사납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대지만 사실은 겁이 많아서 그렇다는 걸 안다. 너는 분명 많이 울 것이다. 세상에는 큰일이 나지 않겠지만, 네 세상에는 큰일일 것을 안다.

그러니 저를 위해 한 방울이라도 흐르는 눈물이 있다면, 단지 그 하나만을 위해 세상 따윈 좀 외면한다고 해서 뭐 어쩔 텐가 말이다. 단 한 번도 제게 의미 있었던 적이 없는 세상 대신에, 그 조그만 아이 하나를 걱정하는 게.

[루케.]

“!!!”

이도하는 번쩍 눈을 떴다. 낡은 필름 같던 뿌연 풍경, 따스한 색감이 어려 있던 기억은 사라지고 새까만 감옥의 차가운 바람이 그를 완전히 깨웠다. 이도하가 거의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입을 꾹 다문 채 쌕, 쌕, 숨을 몰아쉬던 그가 일어섰다. 감옥 안에 조그만 빛이 한 점 생긴다 싶더니, 순식간에 커지며 사위를 밝혔다. 이도하의 앞에 여전히 그가 앉아 있었다.

모리온.

원래부터도 마른 편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길게 늘어진 시간 속에서 종종 마주했던 젊은 얼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죽음의 기운만 완연하게 남은 그가. 매끈했던 뺨은 푹 꺼졌고, 늘 덤덤하면서도 빛이 돌던 눈동자는 퀭하게 꺼져 흐릿하다. 목을 가눌 힘조차 없어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 군나르 아스터의 말이 맞았다. 그가 내뱉은 숨 한 가닥 한 가닥이 위태로웠다. 어느 것이 마지막이 될지 알 수 없었다.

“…….”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선의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 나는 너무 많이 봤어. 그건 진짜 엄청 안타깝고, 슬픈 일이야.’

그래서 드리시니언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모리온이 신은호를 데리고 계약 양도 실험에 가담했던 이유를. 아마 기억을 읽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시오한은 처음부터 모리온이 모든 것을 다 솔직하게 자백했다고 했으니.

결국 그리하여, 모리온은 ‘도둑질’이라는 신은호의 특기를 재료 삼아 계약을 훔쳐내는 일에 기어이 성공하고야 만 것이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계약까지는 가지 못했더라도, 그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모리온 역시 익히 알고 있었듯 비록 이후에 그게 정말 ‘양도’라는 이름이 되었을지, ‘거래’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정말로 작은 아이 하나를 염려하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날 소환했어?”

아득, 이를 문 이도하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천 년 전의 유적으로 이도하가 소환되었었던 날, 아마도 모리온에게는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을 그 날, 결코 제가 무사할 수 없을 걸 다 알면서 다시 이도하를 소환해낸 이유.

“그 애를 나한테 보여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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