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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8화 (118/250)

118화

[내 말 믿어보라니까? 내가 진짜 제일 잘 안다고!]

[네가 어떻게.]

[내가 또 다 당해봤지.]

멈칫한 남자가 아이를 돌아보았다. 아이는 제가 무슨 말을 한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저 남자가 관심을 보여 기쁜 듯 아이가 신나 했다.

[옷장은 진짜 별것도 아니야. 시발새끼들이 샤워하는데 옷을 홀랑 들고 도망가 버린 적도 있다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그 새끼들 옷 다 소각장에 던져버렸잖아. 싹 다 모아 가지고. 걔네 다 이러고 엉거주춤 서 가지고 막 울었어. 죽을라고 확 그냥.]

아이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가 물었다.

[어깨가 왜 그래?]

아이가 의아하게 남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품이 커 헐렁하게 늘어진 옷 때문에 드러난 어깨에 심상찮은 자국들이 죽죽 나 있었다. 붉고 푸른 것이 한눈에 봐도 맞은 상처였다. 아이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이거 혼나서.]

[혼이 나?]

[응. 등신 같은 새끼들이 또 내가 막 지들 거 훔쳤다고 지랄하길래 진짜 지갑 다 털어줬거든. 그래서 원장님한테 디지게 혼났어. 맨날 도둑, 도둑 소리 듣는다고 정말 도둑질하면 딱 그 말대로 되는 것밖에 안 된다고. 그래도 빡치는 걸 어떡해? 난 진짜 아무것도 훔친 적 없는데 거지새끼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모리온이 눈살을 찌푸렸다. 심한 상처 같았는데, 아이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익숙해 보였다.

[네 부모는 알아?]

[나 그런 거 없는데.]

[…없다고?]

[응. 원래 없었어. 어깨 주물러 줄까? 나 되게 잘해! 원장님이 만날 칭찬해 줬어.]

[됐어, 돌아가.]

[아씨 맨날 가래! 나 진짜 잘하는데 한 번만, 응? 완전 시원하게 주물러 줄 테니까 나 밥 줘.]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아이가 움찔, 하더니 눈치를 보았다.

[나 진짜 잘하는데….]

남자가 일어섰다. 뒤에서 푹,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 배고프다, 배고파! 아이가 들으란 듯이 빽빽 소리쳤다. 그러다 뭘 건드렸는지 우당탕탕 죄다 쏟아지는 소리도 들린다. 남자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끼니를 때우려 챙겨놓고도 입맛이 없어 건드리지도 않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우와!]

[다 먹으면 가.]

[먹고 구경할래!]

[가.]

[아 진짜 왜 맨날 가래! 아저씨는 할 일도 없냐?! 안 가!]

[언제까지 아저씨라고 부를 거냐?]

[엥?]

제가 다 무너뜨려 놓은 책 더미 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뜯던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형?]

[누가 형이야.]

[나 맨날 형 갖고 싶었는데. 형 하면 안 돼?]

계약주를 형, 누나, 하여간 그 비슷한 것으로 부른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다. 이 애는 정말 제가 어디 놀러 온 줄 아는 것 같았다. 계약자로서의 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모리온.]

[엑, 이름을 부르라고? 아저씨 몇 살인데…?]

[반말은 잘도 하면서 예의를 다 차리네.]

[아, 그거랑 다르지!]

[뭐가?]

[달라, 아무튼 완전 달라!]

아이가 떼를 썼다.

[싫으면 말고.]

남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아이가 화들짝 놀라더니 샌드위치까지 떨어트리고 그를 후다닥 뛰어왔다.

[아니 언제 싫대? 아저씨 안 하면 되잖아, 모리온! 모리온! 됐지?]

[네 맘대로 해.]

[어디 가?]

[안 가.]

조그만 서랍을 뒤져 찾던 것을 꺼낸 모리온이 아이에게 홱 던졌다. 제대로 받을 줄 알았더니 머리로 툭 맞는다.

[아!]

[그렇게 둔해서 살겠냐.]

[나 안 둔하거든?! 자기가 똥 같이 던져놓고서! 다시 던져!]

아니 그럴 생각은…. 무슨 던지기 놀이를 하자는 것은 절대 아니었는데 이미 아이는 제게 물건을 건네주고는 저만치 가서 비장한 얼굴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모리온은 약간 아득함을 느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가, 더 피곤해질 것 같아 그냥 손에 든 것을 던져 주었다. 어어- 허공에 붕 뜬 것을 바라보며 황급히 손을 뻗어 아이가 정말 그것을 탁, 잡았다. 조그만 얼굴이 단숨에 득의양양해졌다.

[이것 봐라! 잡았지!]

[그래, 잘했다. 이제 발라.]

[응?]

[바르라고. 어깨에.]

아이는 그제야 제 손에 든 것을 제대로 보았다. 조그만 연고통이었다. 오,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또 순순히 연고통을 열더니 어깨에 바른다. 아주 치덕치덕, 도대체 약을 어깨에 바르는 건지 옷에다 묻히는 건지 알 수 없을 수준이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하며 이제 정말 신경 끄려던 남자는 더 이상 그 어설픔을 참을 수 없었다. 그가 홱 연고통을 뺏어 들고 아이의 머리통을 잡아 돌렸다.

[안 아픈데.]

[그래.]

[진짜 하나도 안 아파. 종아리 엄청 많이 맞아서 완전 피 막 터지고 보라색 되고 막 그랬던 적도 있었는데, 이 정도야 껌이지.]

헤헤, 아이가 웃으며 자랑했다. 그건 자랑할 일이 아니다, 하려던 남자는 그냥 약을 마저 바르며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는 샌드위치를 흔적도 없이 싹싹 먹어치우고는 좀 더 주변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다 다시 제 세계로 돌아갔다. 이제 할 일을 좀 할 수 있겠다 하며 자리에 앉은 모리온은 문득 주변이 아주 조용하다고 느꼈다. 시선을 아주 조금 돌렸을 뿐인데 아이가 죄 무너뜨려 놓은 책 더미에 시선이 갔다. 아주 조금 허전한 것 같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후로 그는 종종, 때때로 아이를 불렀다. 불러야만 할 때도 있었고, 그냥 부른 때도 있었다. 탑의 사람들은 계약주가 될 가능성이라고는 한여름에 눈이 올 만큼이나 가능성 없다고 여겨졌던 남자가 정말로 계약자를 소환한 게 맞는가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남자는 몇 번은 거절하고, 몇 번은 수락했다.

아이를 확인한 반응은 다양했다. 픽, 하고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웃거나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안도를 할 때도 있었다. 그 속에서 남자가 순전히 자기 의지로 아이를 부른 때는 몇 번 없었다. 아이는 소환이 너무 드물다며 투정을 부려댔는데, 그게 귀찮아 한참을 부르지 않았더니 그 다음번에는 아주 대성통곡을 하며 그의 옷을 눈물 콧물로 범벅을 해놓았다. 아이는 남자에게 매달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반드시 소환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야 말았다.

[인소더블이라고, 알아? 진짜 존나 대단한 거거든. 우리나라에도 한 명 있어.]

그렇게 소환한 아이와 별다를 것을 하지는 않았다. 쥐똥만 한 마력으로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할 것도 없었다. 아이는 그냥 소환되어 수다나 떨며 놀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남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데 혼자서 조잘조잘 쉴 틈 없이 잘도 떠들어 댔다.

[내가 인소더블이었으면 와 씨, 그냥 세상 다 찜쪄먹었다. 근데 그 형은 그냥 평범하게 학교나 다닌대. 존나 이해 안 가지 않아? 아, 학교가 뭐냐면-]

아이는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정말로 없었다. 어떤 때에는 제 세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이렇게 학교가 뭔지도 모르는 곳처럼 생각하기도 했다. 이 세상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곳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남자는 아이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인소더블- 그게 무엇인지도 남자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형이 소환돼서 계약자 되면 우리나라는 완전 부자된다. 차도, 집도 공짜로 주고 돈도 막 그냥 줄 수 있대. 근데 왜 아무도 계약하라고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계약자가 될 수 없어.]

[엥? 왜?]

[인소더블은 소환이 불가능하니까.]

인소더블- 그들 세계에서 ‘측정할 수 없는, 무한한’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는 단어로 이름 지어진 그들은 존재가 너무 커서 이 세계 안에 짓누를 수 없었다. 무한한- 말 그대로 그런 이름을 가진 이를 다른 세계 안에 내리누르려 했다가 그 세계가 어찌 될 줄 알고.

저들의 세계에는 그런 인소더블이 소환되었다 기록된 게 있다고 언뜻 들은 것 같지만… 이곳에서 그런 이가 소환된 기록은 없었다. 아마도 있었다면, 지금까지 이곳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인소더블 때문이겠지. 남자는 이 모든 것을 길게 설명하는 대신에 짧게 말했다.

[소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세계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인소더블의 소환에 필요한 마력은 누군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또 모른다. 현 황제라면 가능할지도. 가장 번영한 제국에서, 가히 더할 나위가 없을 정도의 강력한 정통성을 타고 태어난 현 황제는 성군이기까지 한데다가 마력까지 범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너무도 완벽해 신이 사랑한다는 황제이니, 오직 그만이 가능성이라도 있었다.

소환할 이유가 없을 뿐.

그러니 그 인소더블이 계약자가 될 일도 없다. 아이의 나라가 부자가 될 일도 없고. 그런데 아이가 말했다.

[이열, 그럼 내가 낫네.]

뜻밖의 말에 남자가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는 정말 신이 난 얼굴로 그의 연구일지를 뜯어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왜?]

[말 안 해주지.]

헤헤, 웃으며 아이가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공중에 붕, 떠오른 종이비행기가 매끄럽게 허공을 미끄러져 그의 발치 아래로 툭 떨어졌다.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도둑질’은 연구하기에 제법 흥미로울 수 있는 능력이었으나, 남자의 마력은 미약했고 아이의 힘은 그보다 더 미약했다. 심지어 계약주인 남자 자신조차도 아이의 능력은 연구할 거리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

[별 기발한 상상을 다 하셨군요.]

그래서 어느 날 중년인이 은밀히 접근해 왔을 때, 남자는 이렇게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한 끗이야, 한 끗. 세상은 그 한 끗으로 변하는 법이라고. 자네가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아, 자네보다 잘난 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고작 마력 하나 타고 태어났다고 계약주가 되어 떵떵거리는 게 정말 맞는 일인가?!]

그게 바로 너다, 남자는 그런 말로 시간 낭비를 하는 대신에 바쁘다며 중년인의 말을 일축했다.

[정말 잘 생각해 보게. 자네가 그 조그만 계약자를 잃으면 어떻게 될까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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