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10살.]
남자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회한에 잠겼다.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술이라도 마셨었나. 10살. 모자라는 마력이 잘못된 결과를 불러일으키면 이렇게 되는 걸까. 연구의 일환으로 좋게 생각해야 할까.
[아저씨?]
아이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흠칫 놀란 남자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살집이 없는 동글한 얼굴로 눈을 땡글땡글 뜨며 그를 쳐다보았다. 창밖에서 스민 노을이 아이의 얼굴을 붉은 생기로 물들였다.
[돌아가.]
[엥? 왜! 뭐 안 해? 임무 같은 거 없어? 임무를 해야지!]
[있으면 그때 부를 테니 지금은 돌아가.]
임무 같은 건 없다고 설명해 줄 기운도 없다. 남자는 영영 다시 아이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제발 돌아가.]
[구경하고 싶은데….]
[다음에 부를게.]
다음에 해줄게. 다음에 같이 하자. 다음에 보여줄게. 시설에서 나이가 좀 찼다 싶은 아이들은 더 어린아이들을 돌봐야 했는데, 그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남자가 늘 들었던 말이고, 나중에는 늘 했던 말이었다. 그다음이란 건 없다는 걸 알지만 아이들은 늘 희망을 품었고,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편리한 말이었다.
[진짜지? 꼭 다시 불러야 돼. 약속이야?]
[그래, 약속.]
[도장에 복사까지 해!]
아이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은 안다. 그런데 도장에 복사는 또 무슨 행위인가. 남자가 영문을 몰라 하자 아이가 에잇, 하고 그의 손을 낚아챘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움찔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본래 체온이 조금 더 높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아이의 손이 아주 따뜻해 놀라고 만 것이다.
남자의 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을 건 다음에 손바닥을 치더니 손가락으로 뭔가 그리고, 하여간에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아이는 만족한 얼굴을 했다. 남자는 이제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고, 많이 기다렸다. 아이는 이제 그를 따라 창틀에 올라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엄청 예쁘다. 붉게 물드는 노을을 보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아이가 시선을 느끼고 남자를 돌아보았다.
[왜?]
[언제 돌아갈 거지?]
[어떻게 돌아가는데?]
[…….]
남자는 말문을 잃었다. 그는 절로 아득한 먼 곳으로 시선을 던지게 되었다. 역소환은 대체로 계약자들의 의지인데, 계약주가 마력을 끊어버림으로써 역소환을 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남자에게는 개미 똥이 흩어진 만큼의 마력만 존재했고,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한 번도 의식해본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마력 같은 건 다룰 줄 모른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 시도한 충동이었고, 그래서 그는 더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다.
결국 둘은 나란히 노을을 보며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개미 똥만 한 남자의 마력으로는 소환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고, 노을이 다 지기도 전에 아이는 금세 자기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남자는 잠시 세상의 불합리함을 좀 더 몸소 겪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도둑질’이라니. 그런 능력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쓸 일도 없고, 쓸 필요도 없다. 마력이 없을 뿐, 남자는 아무것도 없이 머리 하나만으로 이 탑에서 노을이 아주 예쁘게 보이는 높이까지 올라온 사람이었다.
애초에 아이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왜 그런 능력을 가진 이가 소환되었는지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그런 능력을 바란 적 없었다. 소환은 그저 충동에 지나지 않았던 행위였다. 당연히 안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안 되었어야 이치에 맞기도 했다. 그의 마력은 정말 누군가를 소환할 수 있는 마력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국 대체로 불합리한 세상이 또 저 같은 짓을 하고야 만 것이다. 남자는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도 익히 알고 있고, 알지만 늘 간과하듯이 세상일이라는 게 생각대로는 결코 되지 않는 것이다. 불합리하게도.
[사실 자네도 잘 알고 있진 않았나. 자네 똑똑하잖아. 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되지?]
중년인은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묵묵히 서서 제 발치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값비싼 로브를 바라보았다. 카펫을 입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저게 뭐란 말인가. 황제 폐하도 저렇게는 안 입겠다. 그는 시큰둥하게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너무하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세상이 원래 그렇잖아. 그런 거 알 만한 나이고. 여기까지만도 대단했지.]
[예, 압니다.]
남자는 대충 대꾸했다. 중년인은 남자에게 왜 그가 매번 책임 연구원이 되지 못했고, 번번이 그의 성과들이 다른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지에 대해 얘기해 주는 것이 대단한 인정이라도 되는 듯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일들이 별로 새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중년인은 아주 거슬렸다.
그가 가진 마력이라고는 남자와 별다를 것도 없었다. 그러나 중년인은 남자와 다르게 마력과 더불어 머리도 없었다. 지능도 없었고, 부모가 있을 따름이었다. 좀 대단한 부모. 정말 그게 다였다. 이번에 그가 낸 성과에 대해 열 살짜리 아이에게 설명해 주는 것처럼 친절하게 설명해 줘도 알아먹지 못할 인간이었다.
열 살짜리 아이. 아마 생각이 그리로 미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루케.]
소환진이 펼쳐졌다. 눈부신 푸른빛에 중년인이 놀라 벌떡 일어섰다. 이윽고 작은 아이가 모습을 나타냈을 때는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야이 시발! 거짓말쟁…이?]
나타나자마자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와락 남자에게 달려들려던 아이는 중년인을 보고는 우뚝 멈추어 섰다. 호랑이도 잡아먹을 것 같던 기세는 촛불처럼 꺼져버리고 아이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남자의 뒤로 숨어들었다.
[잘 아실 테니 설명할 필요 없겠죠.]
[계… 계약을….]
[예. 되데요, 해 보니까. 될 사람은 되나 봅니다.]
남자가 담담하게 이죽거렸다.
[거짓말! 난 이런 애새끼 계약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단어 선택 하고는. 말 섞기도 천박하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별안간 그의 뒤에 있던 아이가 와락 소리쳤다.
[누가 애새끼야, 이 돼지 새끼야!]
[…….]
[멧돼지처럼 생긴 게!]
완전히 겁에 질린 조그만 꼬맹이로 보였는데,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중년인이 눈을 부릅떴다. 아이가 지지 않고 이를 드러내더니 낼름 혀까지 내밀었다. 중년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케챱 멧돼지네!! 웩!]
[지금 어디서 감히 이딴 사기를 쳐!! 저게 계약자라고?! 누굴 바보로 아나?!]
[잘 모르시나 봅니다. 소환진까지 보면 보통 의심 안 하는데.]
[능력을 보여 봐! 어디 한 번 보여 보라고!]
흥분한 중년인이 소리쳤다. 남자가 계약자를 소환하는 일은 제가 계약자를 소환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정말 철석같이 이게 무언가 수작이라고, 그리고 그게 아주 현명한 판단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나서서 엉덩이춤까지 추고 있던 아이가 흠칫했다.
[내가 왜! 내가 그걸 왜 보여줘야 되냐, 이 돼지 새끼야?!]
아이가 덩달아 흥분하더니 외쳤다. 중년인은 그 열 살짜리 아이를 앞에 두고 대단한 허점이라도 짚은 양 하! 하고 기세등등해졌다.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이건 정말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개판이었다.
[지금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능력이 ‘도둑질’이거든요.]
[아저씨!]
아이가 놀라 돌아보았다. 왜 저렇게 놀라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아이의 소매를 잡았다. 그냥 얼른 나가고 싶었다.
[수석님께는 능력이 없어 훔칠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증명할 수가 없네요. 다음에 보여드리죠.]
그리고 중년인이 뭘 더 말하기 전에 그는 얼른 화려한 방을 나섰다. 몇 걸음 걸은 그는 잠시 멈추었다. 몸이 축축 늘어지는 게 바닥으로 꺼질 것 같다. 아주 피곤했다. 등신을 상대하니 기력이 다 빨려 나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았다. 화들짝 놀란 남자가 돌아보았다. 아이가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을 보듯 멀뚱히 남자를 보고 있던 아이가 씩 웃었다.
[아저씨, 좋다.]
[뭐?]
헤헤, 아이가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남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좋지 않은 징조 같았다.
[손잡지 마.]
[츤데레네, 츤데레. 그게 뭐냐면-]
궁금하지 않다. 남자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가 뛰듯이 따라오면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다시 또 이런 멍청이 같은 실수는 하지 않겠다. 남자는 다짐했다.
[아저씨!]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세상일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안 될 일이란 말인가. 남자는 설마 이 현자의 탑에서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 보지도 못한 유치한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얼마나 유치했냐면, 그래도 나름 지식과 탐구의 보고라는 곳에서 누군가를 괴롭히자고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누구나 코웃음을 치고 저도 부끄러워 얘기하지 못할 그런 유치함이었다. 남자는 좁디좁은 옷장에 갇히고 만 것이다.
그래도 머리가 있는 어른들이라면 뒷일은 생각하겠지.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차분하게 기다려 보았으나 만 하루가 넘어가자 그냥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게 아무래도 정말 심각한 것 같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고심하던 남자는 결국 아이를 부르고야 말았다. ‘도둑질’이라는 능력에 뭔가를 기대해서는 아니고, 개미 손이라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아저씨도 진짜 순진하다. 이건 다 얕보여서 그래,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원래 한 번 맞으면 네 대 때리라고 그랬어.]
아이는 아주 심각하게 말했다. 남자는 다리를 주무르며 그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아이가 다가오더니 조막만 한 손으로 허리를 통통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계속 열변을 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