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16화 (116/250)

116화

쾅-!

이도하가 비틀거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싹둑 끊어지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아주 찰나 같았으나 또 길게 늘어진 백만 년 같기도 했다. 시야는 다시 까맣게 가라앉았고 소리도 사라졌지만, 귀가 아직도 멍멍하고 눈앞이 아찔해 이도하는 숨을 헐떡거리며 무릎을 짚어야만 했다.

“주… 죽겠다.”

이건 이도하가 한 말이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드리시니언이 바닥에 납작 꼬꾸라져 있었다. 끄응- 그가 길게 신음했다. 견디다 못한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결국 그를 바닥에 처박아 버린 모양새였다. 이도하와 눈이 마주친 첼스니티 칼로스가 자기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묘하게 통쾌해 보였다.

이도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생전 멀미 따윈 해본 적이 없는데 속이 다 뒤집혀서 울렁거리는 게 토할 것 같다.

“미친….”

결국 헛구역질이나마 하고 만 이도하가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기분이 좀 더러워? 좀? 험상궂게 일그러진 이도하를 본 드리시니언이 어색하게 으하하, 웃었다.

“그게 원래 진짜 그 정도는 아닌데,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아주, 진짜 아주 간혹 있거든. 진짜야… 진짜 드물어. 게다가 내가 방금 전까지 죽은 사람 뒤지다가 소환되는 바람에 실수를 좀… 하하.”

“…….”

“진짜 미안합니다.”

드리시니언이 냅다 사과했다.

“원래 산 사람은 어떻게 하는데요.”

이도하가 물었다.

“그야 당연히 그것보다 살살, 겉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사랑하는 여자 쓰다듬듯이 짚어봐야지…. 시체가 아니면 본인 협조도 있으니까 비교적 수월하기도 하고.”

“석 달이라며?”

“그게 원래 뭐가 막 가라앉아 있는 물에서 뭘 꺼내려고 하면 밑에 있는 것까지 다 떠오르는 것 같은 그런 원리야. 난 진짜 1초밖에 안 봤어. 1초 만에 이렇게 된 거라니까. 아무것도 못 봤어!”

이도하는 그냥 물어본 것이었는데, 드리시니언이 정말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는 듯 이도하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여전히 구석에 죽은 것처럼 고개를 꺼꾸러트린 채였다. 나… 가? 뒤에서 드리시니언이 첼스니티 칼로스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고, 가, 하고 첼스니티 칼로스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도대체 왜 온 거야 나… 드리시니언이 구시렁거렸다. 순간 이도하가 얼른 돌아섰다.

“잠깐.”

“엉?”

“SCU 맞죠?”

이도하가 드리시니언의 허리춤에 달린 FBI 배지를 가리켰다. 덩달아 제 배지를 내려다본 드리시니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양도 사건, 알고 있는 겁니까?”

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잠시 뒤에 드리시니언이 대답했다.

“알지. 암군과 형군이 전원 계약주들인 건 알고 있지? 계약자들 중 SCU 소속이 꽤 있거든. 초기에는 우연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하는 일이 비슷하다 보니까 겹치는 게 많아서.”

“그 사형수의 시체에서 기억을 읽었다는 게 당신이죠?”

“나지?”

이도하가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 연기가 퍼지듯 환영이 나타났다. 이도하가 기억하는 최준원의 모습이었다.

“그 사형수가 죽기 전날 봤다는 계약자가 이 사람이에요?”

“…음.”

한껏 미간을 좁힌 채 환영을 꼼꼼히 바라본 드시리니언이 모호하게 반응하며 턱을 긁적였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기억이라는 게 우리가 기억하는 꿈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눈으로 본 그대로가 아니라, 기억하는 대로 읽히는 거니까. 그 계약자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고, 사형수가 강렬하게 기억한 건 순간 마주쳤던 새까만 눈동자뿐이었어. 무슨 이유인지 그것만 아주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는 이야기지. 그런데 우리 친구도 까만 눈이잖아?”

그가 이도하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결국 잘 모르겠다는 말이다. 허공에 일렁거리던 환영이 흩어졌다. 이도하는 차라리 제가 드리시니언의 기억을 읽어볼까도 생각했으나, 기억이라는 게 꿈처럼 남는 것이라면 그 사이에 한 다리를 더 걸쳐봤자 도움될 게 없을 것 같다.

“수사는요.”

이도하가 물었다. 드리시니언은 잠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걸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했는데, 그 얼굴이 몹시 애매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도하는 대답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하기야 SCU는 물론이요 FBI도 결국 한 국가의 경찰에 불과할 뿐, 온 세상 불의를 다 책임지는 정의의 사도는 아니다. 이도하는 되레 그런 걸 물은 제가 다 바보같이 느껴졌다.

“쉽사리-”

돌아서는 이도하를 그가 붙잡았다. 그 얼굴에는 어떤 초조함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문제여서 그래. 잘못했다가는 우리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우리? 이도하는 별것 아닌 그 단어에 기이한 거부감을 느꼈다.

“정말이야.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그리고….”

“…….”

흘끔, 감방 안에 시선을 준 드리시니언이 말했다. 이도하는 이해할 수가 없어 얼굴을 찌푸렸다. 드리시니언이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첼스니티 칼로스의 눈치를 보더니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서는 말했다.

“선의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 일은 얼마든지 있어. 나는 너무 많이 봤어. 그건 진짜 엄청 안타깝고, 슬픈 일이야. 황제는 냉혹해서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 암군들은 황제가 하는 말이라면 그게 진리인 양 굴어서-”

“드리시니언, 그만.”

첼스니티 칼로스가 그의 말을 끊었다. 이도하에게 빙그레 웃던 사람 좋은 얼굴과는 달리 차갑게 굳어진 얼굴이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으나, 드리시니언은 아주 잠시 움찔, 했을 뿐 황급히 제 할 말을 다 했다.

“잘했다는 건 결코 아니야. 사실 선의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 내 말은, 그래도 우리는 이해하잖아. 그러니까 마지막 인정 정도는 베풀어줘도 된다고 생각해.”

“드리시니언!”

“아, 가, 간다고!”

드리시니언의 신형이 빛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참, 나 뉴스도 봤거든, 난 응원해, 알지? 파이팅!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말을 다 지껄이고서야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 첼스니티 칼로스는 잠시 만에 아주 피곤해진 얼굴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대신 사과했다. 이도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와 남자의 앞에 섰다.

모리온.

이도하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손을 뻗었다. 남자의 흐린 눈동자가 이도하를 간신히 올려다보더니, 얌전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의 이마에 이도하의 손이 닿았다. 우웅- 미약한 이명이 울리며, 까마귀의 깃털처럼 까만 눈동자에 푸른빛이 돌았다.

이도하는 제가 마치 남자에게로 빨려 들어간다고 느꼈다. 기억이 쏟아졌다.

[평민 아냐?]

남자는 장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이었다. 그는 즉시 이 수군거리는 목소리의 주제가 저인 것을 알아챘다. 그가 조소했다. 장서관, 화장실, 뒷담화를 하기에 썩 적당한 장소가 아닌 것 같은데도 참 사람들이 일관적이고 전통적이다.

[노이드 출신이래.]

[노이렌슈에드? 그 노이렌슈에드?]

[아 노이드가 따로 있어?]

[미쳤네. 성도 없는 평민이 노이드를 졸업해서 탑에 선임으로 바로 들어온다고? 때아니게 웬 낙하산인가 했더니 그냥 괴물이었어?]

[반짝 출세지 뭐. 단물이나 빼려고.]

[미친놈아 저 정도 괴물인데 뭔 단물이야, 황금알이지!]

[반쪽짜리야.]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참 할 짓도 없다며 고개를 젓던 남자는 어느새 가만히 서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마력이 쥐꼬리밖에 없는 수준이니 반쪽짜리지.]

[아.]

[평생 소환은 꿈도 못 꿀걸.]

[아 그건 좀… 차라리 멍청하고 말지. 평민이질 말던가, 하나만 해야 되는데. 너무했네.]

[고아라던데.]

[와, 진짜 너무했네.]

그들은 어느새 남자를 마음껏 동정하고 있었다. 안타깝다, 불쌍하다, 혀를 차는 목소리에는 너그러운 진심이 넉넉히 담겨 있었다.

남자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동정이 역겹지도, 그것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그는 의자를 꺼내 읽으려던 책을 펼쳤을 뿐이다. 두런두런, 그들의 대화 소리를 배경으로 남자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건 분명 충동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술을 먹지도 않았는데 그저 불쑥 충동이 올라왔을 뿐이다. 저만은 아닌 줄 알았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그런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 지식과 이성의 화신으로 살아온 남자에게는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고, 해서 남자는 당황스러웠다. 내가 왜 그랬지?

남자는 아주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세상 자체가 이미 불합리로 가득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는 게 분명한데, 그런 충동적인 일을 하고 마니 이렇게 되어버린 게 틀림없다. 남자는 정말로 후회했다.

[와… 진짜 똑같이 생겼는데. 진짜 완전 똑같은데. 진짜 여기 서울 아니야? 요? 몰카 같은데?]

아이는 남자의 앞을 기웃거리며 한 시도 쉬지 않고 수다스럽게 떠들어댔다. 남자는 정말이지 한탄스러웠다. 장서관의 일은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 속에 분노를 품지도, 한탄을 품지도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반발심 따위는 아주 옛날에, 이 꼬마만할 때 다 해치웠는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고, 하필 그게 성공할 걸 또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세상은 불합리하다. 남자는 아주 피곤해져 멍하니 창밖만 보며 생각했다.

[아저씨! 내 말 안 들려? 진짜 여기 서울 아니냐니까?]

남자가 눈을 돌렸다. 시선을 받자 아이가 찔끔 하더니 요, 하고 존댓말을 덧붙였다. 그간 남자는 계약자를 아주 많이 봐 왔다. 그가 살던 시설에서 계약자를 소환하는 데 성공해 용병으로 출세 가도를 달린 사람도 있었다.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만 모인 노이렌슈에드에서는 흔하다 할 정도로 봤다. 그런데 이 아이처럼 조그만 계약자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몇 살이라고?]

[12살!]

[…….]

[뭐! 뭐! 12살 맞다니까?!]

[…….]

[…10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