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이도하는 움찔 놀라고 말았다. 그가 군나르 아스터를 돌아보았다. 군나르 아스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원래도 말라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뼈 위에 살가죽만 붙은 수준이었다. 푸석푸석한 머리칼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눈두덩이는 퀭하게 꺼져 있다. 움푹 들어간 뺨에 광대만 불룩 솟았고 옷은 푹 늘어져 저 아래 정말 사람의 몸이 있는가 싶은 수준이었다. 흡사 살이 붙은 해골, 미라와 같다. 군나르 아스터가 확인해 주지 않았더라면 눈앞의 이가 정말 그때 그 남자인지, 살아있는 사람인지조차 알아보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그때 빛에 정신을 차린 듯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연갈색 눈동자가 흐리게 드러나더니, 이도하에게 닿았다.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메마르고 터져 피딱지가 앉은 남자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놀랍게도 남자는, 이도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조금 웃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착각이 아니었다. 이도하는 남자의 눈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왜?
저를 보고 이 남자가 안심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허벅지 위로 늘어진 손을 까딱였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쇳소리가 섞인 바람소리만 쉿쉿거릴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불쾌한 기분이 더해진다. 이도하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몸에 부피감이라고는 거의 없어 마치 바람이 다 빠져 바닥에 들러붙은 풍선 껍데기 같았다. 혐오감을 일으키는 몰골이 분명했다.
그러나 불쾌감은 거기에서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남자를 내려다보던 이도하가 무릎을 굽혔다. 시선을 맞추고 앉아,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귀가 남자의 입가에 가까워지도록.
‘…억….’
목소리가 조각조각 부서진 파편처럼 흘러나온다. 옷이 당겨지는 느낌에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뼈마디만 남은 남자의 손가락이 이도하의 코트 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거의 걸쳐진 느낌으로.
‘…기…… 읽….’
이도하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기억을 읽어라.’ 조각난 파편으로 남자가 간신히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사람의 기억 같은 건 읽을 줄 몰랐다. 일전에 암군의 사령관이자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 시리스가 그림자의 흔적을 읽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했고, 후에는 그걸 조금 더 응용해 아예 사물에 남은 흔적을 읽었을 뿐이다.
그림자나 사물에 남은 흔적은 프린터에 인쇄된 기록과 비슷했다. 양이 초등학교 학급 일지냐 국립 도서관이냐 수준으로 차이가 날 뿐, 시간 사건 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기억은 그렇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남자는 저를 무슨 만능으로 아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것으로 기력을 다 한 듯 눈을 감았다. 이도하의 코트 자락에 걸쳐져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이도하가 얼른 남자의 코밑에 손을 대보았다. 미약한 숨결이 느껴진다. 고개를 숙여보니, 눈도 뜨고 있었다. 말 그대로 더 이상은 몸을 가눌 아무런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혀를 찬 이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기억을 읽으라는데요.”
그가 군나르 아스터에게 말했다. 군나르 아스터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리더니 남자를 한 번 바라보았다. 난 그런 거 할 줄 몰라. 감옥이 이렇게 조용하니 그도 그 말을 들었을 것이다.
“보면,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
“기억을 읽는 능력을 가진 계약자와 계약한 암군이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냐- 그렇게 말하려던 이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기억을 읽는다. 그는 모리온이 궁금하지는 않지만, 궁금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
우르슬라. 완전히 미쳐버린 듯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기억은 그녀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자물쇠가 고장난 상자처럼. 그 안을 그냥 들여다볼 수 있다면, 우르슬라의 협조 같은 건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봐야 하는 건 아닌데… 이건 겪어봐야 할 것 같네요.”
대답하면서도 이도하는 군나르 아스터를 좀 새롭게 바라보았다. ‘보면 할 수 있지 않냐’라… 장승처럼 기척도 없이 무뚝뚝하게 서서는 관찰력이 남다른 건가, 들은 게 있는 건가.
그 군나르 아스터가 누굴 부르거나, 하다못해 제스처 같은 것도 하지 않았는데 순간 이도하는 뒤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티 없이 흠칫 놀라며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군나르 아스터와 같이 온통 새까만 옷을 입은 남자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머리칼에, 비슷한 빛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어느 누구의 옆집에든 있을 것처럼, 한 번쯤은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인상의 아주 젊은 남자였다.
“오르페노스 공께 인사드립니다. 첼스티니 칼로스입니다.”
한쪽 무릎을 굽힌 남자, 암군 방첩대의 첼스니티 칼로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가 어깨 너머로 몇 번 본 바에 의하면 시오한에게 하는 것과 아주 똑같았다. 새삼 기억나는 어느 열정적인 기사의 적대 어린 시선도 달갑지 않았지만 이것도 좀 부담스럽다. 이도하는 그냥 고개나 끄덕이며 일어나세요, 했다. 첼스니티 칼로스가 빙그레 웃으며 일어났다. 군나르 아스터와 한 번 시선을 맞춘 그가 곧바로 말했다.
[드리시니언]
웅, 하고 목소리가 울리더니 바닥에 소환진이 쫙 펼쳐졌다. 반딧불 떼가 들고 일어나는 것처럼 소환진이 부서져 흩날려 일어나더니 금세 형체를 이루어냈다. 빛이 한번 확 번졌다 사라진 자리에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청바지에 검은 티, 군인처럼 빡빡 깎은 머리에 다부진 체격의 남자는 어깨에 홀스터를 끼고 있었다. 그 안엔 새까만 권총이 꼽혀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배지가 달려있다. FBI. 이도하는 즉시 알아챘다. 계약자에, 기억을 읽는 특기, FBI. 남자는 SCU(Special Crime Analysis Unit)의 일원이다.
시오한이 일전에 언급했던, 죽은 자로부터도 기억을 읽어낸다는 암군의 계약자가 바로 이 남자인 것이다.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기대하는 것처럼 아주 흥미로운 얼굴이던 남자는 이도하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더니, 주변을 둘러보고 이곳이 감옥이라는 걸 깨닫고는 또 한 번 놀라고, 제 계약주를 찾아내 한 마디 했다.
“와우.”
아주 유쾌한 감탄사였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친구 기억을 읽어달라는 거면 나는 못 해. 왠지 알지? 끝장나는 친구란 말이야.”
성격도 아주 유쾌한 것 같다. 말도 많은 것 같고. 절 보며 하는 말에 첼스티니 칼로스는 이미 익숙한 듯 절레절레 손을 흔들었다. 별로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식이었다. 이도하가 먼저 말했다.
“읽어요.”
“엥?”
“읽어달라고요. 그래서 부른 거니까.”
첼스니티 칼로스의 계약자, 계약명 드리시니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확인하듯 제 계약주를 보았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이도하를 홱 돌아보았다. 감옥 안을 힐끗 본 드리시니언이 히익, 하고 큰일 난 얼굴을 하더니 다시 더 격렬하게 홱 하고 제 계약주를 돌아보았다. 고작 주변 몇 번 둘러본 것으로 상황 파악을 한 모양이다. 첼스니티 칼로스는 어깨만 으쓱 추켜올렸다.
“아니 황제 폐하 계약주라고 자기 계약자 장사 밑천을 이렇게 갖다 바치고 말이야….”
투덜거린 드리시니언이 솥뚜껑 같은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하더니 이도하에게 다가왔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이도하는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대충 양해를 구하더니 그가 이도하의 앞머리를 싹 쓸어 올리고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흡사 열을 재는 것 같은 자세였고, 별로 좋은 기분도 아니었다. 참는 듯한 이도하의 표정을 보며 ‘그러게 실례한다니까’ 하고 능글거린 그가 말했다.
“나는 잘 모르는데, 대체로 기억 읽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거든. 뭐, 여러모로. 기분 좀 더러워도 때리면 안 돼요, 자원한 거니까.”
“궁금하면 직접 겪어보게 해줄 수도 있는데.”
“아, 생각했던 것보다 유머를 아는 친구네.”
이도하는 농담이 아니었다. 낄낄거리다 이도하의 얼굴을 본 그가 입을 딱 다물더니 대놓고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만화처럼 표정도, 말도 아주 풍부한 사람이었다.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드리시니언이 곧 자세를 바로 잡았다.
“사실 기억을 읽는다 하면 무슨 드라마 한 편 보듯이 쫙 다 보는 줄 아는데, 그건 아니고 장면 장면 사진처럼 보는 거거든. 그 사이를 잇는 건 알아서 해야 하는 거고. 엄청 옛날은 당연히 못 읽고 나 정도나 돼야 한 석 달 전까지 보나. 참, 사람들이 이게 쉬운 줄 알아요.”
어두운 눈동자가 반짝인다 싶더니, 파도가 몰려들듯 홍채가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몹시 뜨거운 찜질방에 한참을 앉아 있었던 것처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저도 모르게 솟구쳤고, 특기가 아지랑이처럼 움찔거리며 반응하려고 한다. 이도하는 그것을 꾹 내리눌렀다.
“눈 감는 게 좋을 거야.”
드리시니언이 절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이도하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조금 더 일찍 했어야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천천히 달아오르는가 싶던 드리시니언의 눈동자가 완전히 새파랗게 번뜩였고, 그 순간 이도하의 눈앞도 번쩍했다. 플래시 라이트를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번졌다.
[너 달팽이야?]
[괜찮아, 괜찮아.]
[잊어버려.]
[도하야!]
[인소더블이에요.]
[약속할게요.]
[너 그거 소환진 아니야?]
[절대 안 해.]
[안녕.]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겠는 찰나의 순간들이 일시 다발적으로 쏟아졌다. 수백 수천만 개의 순간들이 겹치고 겹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소리들이 뒤엉켜 아무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순서대로 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차근차근 잘 가라앉아 있던 침전물을 한 순간에 모두 뒤집어 흙탕물로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뇌에 얼음물을 끼얹은 것 같고, 수백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