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몸에 닿는 감촉이 평소와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 그저 낯설었다. 이도하는 주변을 돌아보다 군나르 아스터를 보았다. 그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는 그의 뒤도, 옆도, 한 번 슥 둘러보았다. 그가 익히 알던 그 침실이 아니었다.
“중앙 침전입니다.”
군나르 아스터가 설명했다.
“시오한은요. 어떻게 된 겁니까? 자는 거예요?”
“예, 크게 상하신 부분은 없으십니다. 상처는 모두 치료되었고, 기력이 많이 떨어진 와중에 독이 스며들어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 잠드신 겁니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도하는 제가 지금 뭘 들었나 하여 다시 물었다.
“독이라고요?”
“암살자 중에 중독이 능력인 계약자가 있었습니다.”
군나르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생명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체력 회복을 저해해 폐하께서 크게 언짢아하셨습니다. 해서 이리 선택하셨습니다.”
크게 언짢아했다. 그 말에 이도하는 다시 잠든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기본적인 체력, 기력, 그런 것들이 마력의 바탕이다. 체력이 회복되지 않으면 마력도 차오르지 않는다.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꿈이었는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팔이 베였었다. 소매가 길어 걷어볼 수는 없고, 상처가 있다면 붕대로 감싸놓았을 것 같아 그는 조심스럽게 침의 위로 시오한의 팔을 쓸어보았다. 매끄럽기만 하다.
“상처는 모두 회복 되셨습니다.”
이도하가 멈칫했다.
“…여기 상처가 있었다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모르는 것처럼 굴면서도 확인을 하고 있으니 어찌 아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볼 법한테 군나르 아스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아까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 이제야 좀 궁금하고 혼란스러워졌다. 예지? 하지만 저는 그런 식으로 무의식중에 특기를 발현할 줄 모른다. 그럼 꿈도 아닌 아까 전의 그건 대체 뭘까.
“…무엇으로도 닿지 않고, 뭐든 통과하는 것이 능력이었던 것 같은 계약자라 폐하께서 부러 팔을 내어주셨습니다.”
가만히 대기하던 군나르 아스터가 덧붙였다. 이도하가 그를 보자, 여전히 묵묵히 서 있을 뿐이다. 제 군주의 팔에 상처가 난 것은 암살자에게 당해서가 아니라, 일부러 내어준 것이라며 굳이 묻지도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을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아 보였다.
검이 가르고 지나갔음에도 베이지 않던 능력자를 그도 보았다. 마치 남의 게임을 구경하는 듯 했던 시야로 허점이 여러 군데나 드러났는데도 베지 않았더랬다. 그러다 팔을 베이고… 군나르 아스터의 말대로였다. 그리고 이도하는 문득 깨달았다. 팔이 흐르는 피를 보던 시야가 고개를 들고, 그때 다가오던 어두운 머리칼의 사내. 그건 군나르 아스터였던 것이다.
“그… 경도 암살 당시에 같이 있었어요?”
당신도 아니고, 그쪽도 아니고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이도하가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습니다.”
군나르 아스터가 대답했다. 이도하는 좀 더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뭐지? 마치 시오한의 시야로 바라본 것처럼… 그러고 보니,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언제였더라, 언젠가 한번, 꼭 시오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데….
“외람되지만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예?”
잠든 시오한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빠져있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수의가 말하길, 폐하께서 잠드셔야 할 정도로 독이 유효했던 건 가장 기본적으로 남아 있어야 할 마력까지 남김없이 전부 끌어다 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체력과 기력이 회복되어도 당분간은 조금 더 쉬셔야 마력이 다시 돌아온다고.”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한데 어찌….”
오즈에 어떻게 왔냐- 그렇게 묻는 건 너무 주제넘게 들릴 것 같았는지 군나르 아스터가 말을 흐렸다. 잠든 계약주가 계약자를 소환할 리 없으며, 심지어 마력조차 남아있지 않은데 어떻게 계약자가 이 세계에 이렇게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지 그는 의문인 것이다.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정신없고 혼란스럽기는 이도하도 별다를 것이 없으며 뭐라 설명해 줄 길이 없었다. 해 보니 되던데요. 제가 대체로 늘 그런 식이기는 하지만 지금 그 따위 말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기적이 일어났나 보죠.”
이도하가 대충 둘러댔다. 에두르긴 했지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다.
“멀쩡히 일어날 수 있는 거죠? 얼마나 걸린다고 합니까?”
“하루 후에 깨어나실 예정입니다. 오래 잠드실 수는 없다 하시어.”
“…….”
말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먹고 자기만 하라고 했더니… 이건 참 말을 듣는 것도, 안 듣는 것도 아니고… 이도하는 또 속이 울렁거렸다. 젖은 걸레처럼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속상하다. 그가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오한의 어깨 위에 흐트러져 있던 금색 실타래들이 살짝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이도하는 생전 자책 같은 건 별로 해본 적이 없었으나, 이건 정말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르페노스 공.”
군나르 아스터가 불현듯 그를 불렀다. 그는 아주 고민하는 것 같은 기색이었는데, 이도하를 부르고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폐하께서 공께 말하려 하시던 일이 있습니다.”
“시오한이?”
“감히 주제넘으나, 아무래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뭐가요?”
“…모리온이라는 자를 기억하십니까?”
이도하가 인상을 찌푸렸다.
“현자의 탑 연구원?”
저를 팔아넘기려 하는 줄도 모르고 신은호가 좋은 사람이라며 그렇게 애달복달 하던 계약주 놈이 아닌가. 하나는 계약주, 하나는 원장. 부모도 없는데 12살밖에 안 된 애 옆에 붙어있는 어른이라고는 어째 개새끼밖에 없다하며 이도하는 한탄을 했으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그 이름이 왜 튀어나오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자가 위독합니다.”
“예?”
이도하가 반문했다. 그가 위독하다는 건 분명 이도하에게 완전히 생뚱맞은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처음부터 안색이 몹시 안 좋기는 했지만, 그때는 오장육부가 흠 잡을 데 없이 건강한 사람도 죽을상이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가 위독하다는 게 어째서 시오한이 이도하에게 말하려고 했던 일이 되는지, 그리고 또 어째서 시오한이 잠든 상황에서도 군나르 아스터까지 나서서 알려줘야만 하는 일인지는 이해되지 않는다.
신은호가 모리온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온 생떼를 다 부렸으니 이도하도 아차 싶기는 하다. 그러나 군나르 아스터와 시오한은 그런 신은호를 모른다.
어쨌든 군나르 아스터는 심경이 아주 복잡해 보였다. 몇 번 입술을 뗐다 붙였다 하던 그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
얼굴을 찌푸린 이도하는 잠시 생각하다, 다시 시오한을 보았다. 가만히 그를 보던 이도하가 이불 위에 올려진 따뜻한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잠든 시오한을 두고 나서는 게 이도하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으나 만나봐야 할 것 같다는 군나르 아스터의 말도 워낙 찝찝해, 이도하는 결국 그를 따라 감옥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금 같은 귀한 시간을 감옥 따위에서 낭비해야 한다는 사실에 곧 짜증이 솟았다. 퀴퀴하고 습기 찬 공기가 그를 더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째서 비가….”
그를 안내하던 군나르 아스터가 중얼거렸다.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창문 하나 없는 깊숙한 침실은 적막하기만 했지만 밖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온다- 고 할 수준을 넘어서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퍼붓고 있다. 그들만 몰랐던 듯 온 세상이 빗소리로 가득했다. 이도하는 제 발치에 떨어진 연푸른색 꽃송이를 보았다.
“비가 많이 오네요. 우기라더니.”
“우기는 지났습니다. 이렇게 많이 올 때가 아닌데… 이상하군요.”
회랑 너머로 아주 잠깐 손을 뻗었는데도 물에 담갔던 것처럼 아주 흥건하게 젖어버렸다. 군나르 아스터는 신중한 얼굴로 그런 제 손을 매만져보더니, 다시 길을 재촉했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가득한 빗소리 속을 짧게 걸어 그들은 감옥에 다다랐다.
입구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들을 환영하듯 문이 열려 있기까지 했다. 군나르 아스터는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감옥이라 하여 궁과는 아주 동떨어진 곳에 음침하게 있을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이도하는 겉으로 봐서는 감옥인지 전혀 모르겠는 입구를 잠시 바라보다가, 까만 입구 속으로 들어갔다.
군나르 아스터는 과묵하고, 이도하는 짜증이 나 있었다. 둘은 딱히 대화를 나눌 사이도 아닌지라 조용한 감옥에는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 두 개만 묵직하게 울렸다. 창문이 하나 없어 깜깜해 제 발밑이나 겨우 보이는 건 좀 전의 침실과 마찬가지인데 습기가 축축한 스펀지처럼 아주 꽉 차 있었다. 불쾌한 냄새가 묻어있고, 들이쉬는 공기는 거칠거칠하고 텁텁한 모래처럼 감촉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양옆으로는 창살이 아니라 단단한 석벽이 좁게 그들을 가두고 있었다.
탁- 군나르 아스터가 걸음을 멈추었다. 붉은빛이 사위를 밝혔다. 그가 벽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손 위로 겹쳐진 두 개의 진이 붉은빛을 퍼트리며 떠오른 것이다. 두 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챠르륵-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날 것처럼. 철컥- 두 개가 맞물리는 순간, 그의 손이 닿은 벽이 모래처럼 아래로 허물어졌다.
군나르 아스터가 옆으로 물러섰다. 불쾌한 와중에도 뭐 이런 신식 감옥이 다 있나 신기하게 구경하던 이도하가 안으로 들어섰다.
“…….”
구석에 앉은 인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불쾌하고 불길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이도하는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 몰라도 괜찮았을 일, 그런 것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폐하께서 공께 말하려 하시던 일이 있습니다.’
시오한이 그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일.
천장에 조그만 빛이 들어왔다. 반딧불이의 빛처럼 주변만 어렴풋이 밝히던 것이 조금씩 몸집을 키우자 빛도 넓어지기 시작한다. 이윽고 빛은 구석에 앉은 인영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