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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3화 (113/250)

113화

“…우르슬라.”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긴 머리채가 무릎에 닿을 만큼 고개를 푹 숙인 여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이도하가 움찔 손끝을 떨었다. 그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던 손이 멈추었다. 마른 어깨가 아주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이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잔뜩 배어 나온 줄 알았으나 차갑게 메마르기만 한 얼굴을 몇 번 쓸어내린 그가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시선을 낮췄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벽난로의 불빛을 다 가려 조용히 눈을 감은 얼굴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인다. 이도하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칼을 걷어 어깨 너머로 넘겼다.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

이도하의 손끝이 떨렸다. 그가 눈을 부릅떴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것처럼.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완연한 노인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

이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열린 채 찬바람이 스며들고 있는 문을 박차고 나오는 그를 본 그레타 랭이 몸을 굳혔다. 이도하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저게 우르슬라라고?”

탁- 그녀가 제 멱살을 쥔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키가 엇비슷해 시선이 사납게 마주했다.

<문제가 있습니까?>

“저런 구십 먹은 노인이?

그레타 랭의 눈이 흔들렸다.

“이 따위 장난질을 쳐?”

사실 이도하에게 서약서까지 받아낸 그들이 이제 와서 이도하에게 이런 장난질을 칠 이유가 없었다. 엉뚱한 이를 우르슬라라고 안내한들 시간도 벌 수 없고 화만 돋울 뿐이다. 그러나 이도하는 지금 그렇게 앞뒤를 따져볼 여유가 없었다. 그는 낭떠러지에 내몰린 사람처럼 초조하게 곤두 서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고, 저조차도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장난 같은 게 아닙니다.>

그레타 랭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가 우르슬라예요.>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

<자세히 보십시오.>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을 잡은 그레타 랭의 손끝이 이도하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이도하는 그제야 떠올렸다. 우르슬라의 계약명- 이올라. 읽을 수는 없지만 너무 유명해 모양 정도는 인식할 수 있는 그녀의 계약명은 손목에 있다.

벽난로의 불빛이 붉게 비추던 무릎 위, 뜨다 만 낡은 뜨개실이 쥔 손, 그 안쪽에…,

스르륵, 멱살을 쥔 손이 미끄러졌다. 이도하가 돌아섰다. 뛰듯이 잰 걸음으로 다시 오두막 안에 들어선 그는 여전히 못 박힌 듯 흔들의자 위 그 모습 그대로 잠들어 있는 노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숨을 죽인 채, 그녀 앞에 선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보라색인지 청색인지 알 수 없는 낡은 뜨개실, 그 실을 쥔 주름진 손을, 조금 들춘다.

“…….”

있었다.

불빛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그도 아님 그녀의 피부가 힘을 잃고 주름졌기 때문인지, 손목 안, 흐릿하게 번진 그녀의 계약명이.

이올라.

그녀가 정말로, 우르슬라인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도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날, 뉴스에 짧게나마 반복적으로 나오던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 또렷한 푸른 눈동자, 다소 냉소적으로 보이던 얼굴을. 그런데 어쩌다….

그때 문득 그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도하가 흠칫 물러섰다. 평온하게 오르락내리락 하던 어깨가 조금 빨라지는가 싶더니, 격렬해진다. 숨이 가빠지고, 그녀가 덜덜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고 얼어붙은 채 그녀를 응시하던 이도하가 앞뒤로 흔들리는 그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벽난로의 불빛이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한동안 이도하를 응시했다. 아주 또렷하고 명료했다. 악몽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숨을 들썩이며 불안에 휩싸여 있지만, 분명 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르슬라가 눈을 깜빡인 순간, 빛이 꺼지듯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지고 없었다. 가쁘게 들썩이던 숨도 가라앉고, 그녀는 꺼지듯 다시 흔들의자에 기대었다.

끼익- 끼익- 의자가 흔들렸다. 힘없이 늘어진 긴 머리채가 고장 난 괘종시계의 추처럼 반 박자 뒤쳐져 양옆으로 흔들린다. 시선은 허공의 어디쯤에 고정된 채로, 뜨개실을 쥔 손이 금방이라도 실을 뜰 것처럼 움찔거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허공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손끝만 까딱이고 있었다.

그리고 길게 늘어진 것 같은 짧은 시간 동안 그녀를 지켜보며 이도하는 깨달았다.

이 여자에게는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다.

그녀는, 아무것도 대답해 줄 수 없다.

“…이래서….”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로, 이도하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그레타 랭이 서 있었다.

“이래서 숨겼네.”

그가 허탈하게 빈 웃음을 내뱉었다.

“완전히 미쳐버렸잖아.”

“…….”

쾅! 거실 한쪽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이 터져나갔다. 파편조차 남지 않을 만큼 완전히 가루가 된 화분이 부스스 흩어졌다. 그레타 랭조차 눈에 띄게 몸을 떨며 놀랐으나, 흔들의자에 앉은 우르슬라는 미동도 없었다. 끼익- 끼익- 의자는 여전히 일정한 리듬을 타고 앞뒤로 흔들릴 뿐이었다.

“하.”

이도하가 웃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렇게 그냥 웃음만 나왔다. 연이어 몇 번 더 웃음을 터트린 그는 곧 그마저 그만두고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갑자기 방향이고 길이고 모조리 잃어버린 것처럼 그는 망연해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러시아의 그 마피아들을 다 쓸어버리든 밀어버리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 제 계약주를 건드리면 나라건 뭐건 그냥 눈이 뒤집혀 버린다는 걸 보여주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도하는 확신이 필요했다.

맹약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그 약속이 필요했다.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어쩌고저쩌고, 사실 이도하는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어떻게 되었건 우르슬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건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관심 없었다. ‘따위’라고 일컬을 그런 것들이 필요했던 것도 다 그 확신을 위해서였다. 우르슬라가 구구절절 제 사연 따위 알려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그녀가 대답해 줄 수 있길 바랐다.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그게 맹약이고, 그들 사이의 맹약 역시 그렇게 유효하다고.

“…….”

끼익- 끼익- 일정하게 이어지는 흔들의자 소리가 신경을 갉아먹는 소리 같다. 이도하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흐릿하게 번진 시야에 조용히 타오르는 벽난로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이지만, 그렇게 보고 있으면 결국 새하얀 빛일 뿐이다. 새하얀 빛- 세계의 사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그레타 랭이 문득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는 꼭 이도하가 우르슬라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도하는 아주 위태로워 보였고, 당장이라도 무슨 일인가 저지를 것 같았다.

죽일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이도하가, 우르슬라를 죽일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순간 그레타 랭이 이도하에게 뛰어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할지 아무것도 계획에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가느다란 소리가 그녀를 관통했다. 그녀가 아니라, 온 세상을 꿰뚫은 것 같았다. 아주 가늘고 차가운 실선이 양쪽 귀를 꿰뚫은 것처럼 머릿속이 섬뜩하게 울렸다. 그레타 랭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입을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기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집도, 벽난로의 불꽃도, 그들이 선 그 공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시야 가장자리부터 새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이 달아오르는 것처럼. 그레타 랭이 간신히 고개를 들었지만, 등 돌린 이도하의 모습조차도 하얗게 잠식되기 시작한다.

이대로 세상이 찢겨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그레타 랭은 우르슬라를 보았다. 거의 잔상만 남은 우르슬라가 이도하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으로 고인 그것이 떨어진다 싶은 순간, 더 이상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었다.

***

[---?]

[---]

[---!]

이도하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고 부정확해 어조 정도밖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목소리였다. 아주 친숙하고 익숙하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목소리다. 누구지?

[-------]

[----게.]

이도하는 온 신경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조금씩 들리는 것도 같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다가도 멀어진다. 이도하는 조금 더 집중하려 했다. 그 순간 그는 아주 똑똑하고 분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난 괜찮아, 화이람.]

시오한.

“!!!”

이도하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아주 푹신하고 부드러운 것 위에 엎드려 있었다. 씁쓸한 냄새가 나는 공기가 따뜻하게 맴돌고 있었고, 깃털 떨어지는 소리 하나마저 들릴 만큼 적막하다. 그리고 제 손가락조차도 보이지 않을 만큼 죽은 듯이 깜깜했다. 그가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사위가 한 순간에 밝아졌다. 동시에 캉-!! 거친 쇳소리가 울렸다. 이도하가 즉시 고개를 돌렸다. 섬광이 잠깐 번뜩였다가 곧바로 꺼졌다.

“오르페노스 공-!”

“군나르?”

저녁 하늘 같은 남색 머리칼에 눈동자, 암군 사령관 군나르 아스터였다. 눈에 띄게 당황한 그가 황급히 새까만 대검을 갈무리하며 물러섰다. 이도하를 다른 무언가로 오인하고 베어버리려고 했던 모양인데, 그는 그런 건 관심 없었다. 군나르 아스터가 여기 있단 건… 이도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시오한.”

그의 눈앞에 시오한이 누워 있었다. 황금색 머리칼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살아있는 사람 같지 않다. 평온한 얼굴은 자는 것도 같았으나, 시오한은 저렇게 바로 누워 있을 때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무기물처럼 현실감이 없기도 했다. 이도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가슴께까지 꼼꼼하게 덮여 있는 이불이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보고서야 이도하가 헉,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덥석 손까지 만져보았다. 아주 따뜻했다.

“…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고 머리칼까지 한 번 꽉 쥐어본 다음에야 이도하는 긴장이 탁 풀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을 보며 멍하니 앉아있던 그가 문득 대충 떨어트린 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제 손도 바라보았다.

진짜 됐네.

진짜…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오즈다. 정말로 시오한이 그의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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