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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2화 (112/250)

112화

쾅! 조용한 벌판에 난데없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한가롭게 서서 잠을 청하던 소 떼가 놀라 우르르 달아났다. 벌판 한가운데가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 부스스 일어났다. 이도하였다.

“왜….”

‘무슨 여파가 있을지 모른다’던 김윤혜의 경고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이도하는 그동안 소환 없이 오즈로 넘어가는 것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앞뒤 가릴 여유 따위도 없었다. 그는 분명 오즈로 넘어가려고 했다. 바로 확인해야만 했다. 지난번처럼 소환이 그를 시오한에게로 안내해 줘야 했다.

그러나 여기는 오즈가 아니었다. 이도하는 보이지 않는 벽에 세게 부딪친 듯한 충격을 느꼈다. 밑도 끝도 없는 거대하고 두꺼운 벽- 절대로 넘어설 수도, 무너트릴 수도 없을 것 같은 벽. 이도하는 난생처음으로 망연함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건 세계의 벽이다. 여태 오즈를 넘나들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그 단절에 그가 부딪칠 만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를 ‘화이람’으로서 그 세계에 녹아들게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시오한에게, 이도하를 잠시도 그곳에 눌러놓을 만한 마력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혹은….

아냐.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를 만났었고, 그때의 시오한은 괜찮았다. 여느 때와 다른 건 없었다. 돌이키던 이도하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미끌거리는 뭔가가 손에 묻었다고 느꼈었다. 돌아와 보니 그런 흔적 같은 건 없었지만…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불현듯 깨달았다.

꿈.

팔을 내려다보던 시야. 흘러내리던 피.

“꿈이 아니었….”

숨이 턱 막혔다. 발밑이 쑥 꺼지는 것처럼 아득해지고 눈앞이 핑 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맺혔다.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던 이도하가 퍼뜩 스치는 생각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달빛뿐인 허허벌판에 밝은 화면 빛이 환하게 번졌다. 카메라를 킨 이도하가 제 얼굴을 비추었다.

“!!!”

있었다. 그의 눈 밑에 여전히 선명하게. 처음으로 시오한의 손끝이 닿은 곳에, 그의 계약명이. 이도하는 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이를 악 물었다가, 간신히 잔뜩 억눌려 있던 숨을 다 뱉어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꽉 쥐어 잡았다. 한동안 그 손에 이마를 대고 있던 이도하는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피. 다시 생각해 보면 제 손에 묻었던 건 분명 피였다. 제가 등신처럼 안일했던 것이다. 당연히 흔적이 없을 수밖에. 오즈가 이곳의 그 어떤 것도 남겨두지 않는 것처럼, 이 세계 역시 오즈의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이도하는 지금에서야 그것을 실감했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를 불렀다.

“시오한!”

까맣게 밤이 내린 허허벌판에 이도하의 목소리만 허망하게 울렸다. 답은 없었다.

“시오한.”

아무리 기다려도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난 괜찮아, 화이람.’

“…진짜 가만 안 둔다.”

이를 악문 이도하가 짓씹었다. 한차례 안도가 지나가고 나자 분노가 치솟았다. 거짓말의 정의라는 게 이렇게 얄팍할 수가 있나. 죽지 않았다고 해서 다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았을 뿐, 이도하가 잠시도 넘어갈 수 없을 만큼 마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떤 상태이든, 그에게 대답할 수 없는 없는 상태라는 것도.

핸드폰을 꽉 쥔 이도하가 일어섰다. 그대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

쾅!!

벽난로를 정리하고 있던 그레타 랭이 벽으로 처박혔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우우웅- 공간 전체가 그녀를 찌그러트려 버릴 것처럼 진동한다. 네모반듯한 벽돌이 쌓인 벽도, 반쯤 탄 장작도, 푹신한 소파도 모두 테두리가 없는 것처럼 뿌옇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어디까지 참을 것 같았어.”

섬뜩하게 날이 선 목소리가 물었다. 삐그덕,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레타 랭은 새파랗게 섬광이 돋은 이도하의 눈과 마주쳤다. 차분한 얼굴이었으나, 그건 마음이 평안해서가 아니라 분노가 완전히 어느 극점을 뚫어버려 싸늘해진 것이다. 벽면에 짓눌린 그레타 랭이 입술을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주르륵 새어 나왔다. 이도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누엘 뮬러의 흔적은 없었다.

“그새 튀었네.”

이도하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레타 랭을 바라보는 순간, 진동이 멈추었다. 압박도 사라졌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말이 우습게 들렸어?”

헉-! 바닥으로 허물어진 그레타 랭이 급히 숨을 들이켰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의 눈동자는 파랗다 못해 거의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직감했다. 이번에는 환상이 아니다. 저 남자는 정말로 베를린을, 독일을 송두리째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레타 랭이 다급히 외쳤다.

<죽지 않았습니다! 암살 당했다는 소문이 돌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당신 계약명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건->

표정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이도하가 저벅-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레타 랭이 흠칫 떨었다.

“시오한이 죽었으면, 당신네들 나라는 이미 불바다였어.”

이도하가 말했다.

“개미 한 마리도 남김없이.”

꾹 입술을 다문 그레타 랭이 이내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다 불어.”

쾅-!!! 지축이 흔들렸다. 오두막이 펄쩍 뛰어오른 듯 바닥으로부터 그 충격이 전해졌다. 그레타 랭이 귀를 틀어막았다. 바로 지척에서 터진 어마어마한 굉음에 고막이 나가버린 듯 귀가 멍멍하게 이명이 떠돈다. 고작 백여 미터 남짓한 거리에 벼락이 꽂힌 것이다. 그녀는 빠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가 그녀를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숨긴 건 없습니다. 우리라고 다 알지 못하고, 일부분만 알 뿐입니다.>

“누구냐고.”

암살 시도가 있어 왔다고 시오한은 분명 언급했지만, 손가락이 좀 간지럽다는 투로 대수롭잖게 말하니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도하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처음의 그 도박장에서도, 지하 감옥에서도, 어째서 시오한이 다수의 계약자를 상대로 하는 전투에 그토록 능숙했는지. 시오한에게 암살 시도가 있었다면 그건 일반적인 오즈인이었을 리가 없다. 반드시 계약자여야만 했을 것이다. 꼬리를 자르기도 쉬우며,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려면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파악된 바로는 세 차례의 시도가 있었고, 계약자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저희 정보부 쪽에서는 러시아 국적의 계약자들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그렇다면 계약 양도 실험 건이다. 이도하가 한숨 쉬듯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다. 그럼 그렇지. 엎친 데 덮친 격, 산 넘어 산이라고 인생은 역시 실전이었다. 하나씩 줄 서서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르슬라를 정말 코앞에 두고 있는데 벌써 몇 번이나 걸림돌처럼 걸리적거리던 일이 이 따위로 뒤통수를 때리니 이도하는 화가 나다 못해 약간 머리가 어지러운 지경이었다.

“레드 마피아네.”

그레타 랭이 무언으로 긍정했다. 원래도 썩 세상에 긍정적인 편도 아니었으나 근래에 들어 특히나 더 염세적이게 된 이도하는 말 그대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부터 레드 마피아라고 하지 않고 ‘러시아 국적’이라 에둘러 말한 것부터 제가 알고 있나 모르고 있나를 떠 본 것 같다.

“죽었다는 새끼들이 어디 마피아 새끼들인지 알아내라고 해.”

짓씹듯 말한 이도하가 성큼 그레타 랭의 코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당장.”

<뭘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정계와의 유착도 있고 무슨 개미 군집처럼 모여 있는 게 아니->

“그건 그쪽이 알 바 아니고.”

이도하가 차갑게 잘랐다.

“우르슬라. 어디 있어.”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 줄 생각이 없는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레타 랭이 핸드폰을 꺼냈다. 빠르게 무언가를 두드리더니 대충 소파에 던져버린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바라본 시선이 다시 그레타 랭을 한 번 보았다. 싸늘한 눈빛이 조소를 띠었다. 이도하의 손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둘의 모습이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주변의 까만 어둠 속에는 나무가 장승처럼 가득 차 있다. 벽난로의 따뜻한 온기도, 장작이 타오르는 냄새도 사라지고 축축한 습기에 침엽수 냄새가 떠돈다. 찌르륵- 밤벌레가 울고 있었다. 숲이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예민하게 귓가를 스쳤다. 독일의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창문으로 붉은 빛이 어른거리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굴뚝 위로는 아직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이도하가 그레타 랭의 손을 놓았다. 한두 발짝 따라간 그녀가 멈추었다. 우두커니 선 그레타 랭의 시선이 뒤따르는 가운데 이도하가 오두막의 문고리를 잡았다. 끼릭- 녹슨 소리를 내며 그것이 돌아갔다. 잠겨 있지도 않았다. 꽉 끼어있는 듯한 문 사이로 먼지가 피어오르는 순간, 삐그덕-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정체되어 있던 뜨끈한 공기가 그를 덮쳤다. 붉은 벽난로의 빛이 작은 거실을 모두 채우고 있었다. 벽난로 외에 다른 불이라고는 없었고, 온통 낡은 냄새가 났다. 나무 바닥 위로 솔방울 하나가 이도하의 발에 채여 굴러갔다. 두꺼운 천 소파,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 벽면에 가득한 책장, 여기저기 낡은 것들뿐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벽난로 가의 흔들의자에. 긴 갈색 머리를 늘어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다.

우르슬라.

이도하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주변의 소리가 모두 사라진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그녀만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심장을 꽉 쥐고 있는 듯 숨이 답답하다. 몇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가 한참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탁- 운동화를 신은 이도하의 발끝이 실내화에 감싸인 작은 발끝을 마주보았다.

우르슬라 발터. ‘되돌아가는 태엽’ 역사상 세 번째 인소더블. 최초의 인소더블 계약자. 그리고 아마도… 맹약의 창시자. 마침내 그녀 앞에 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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