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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11화 (111/250)

111화

이도하는 내밀어진 손을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2초 남짓한 시간이 길게도 흐른 뒤에 이도하가 그 손을 대충 잡았다. 마누엘 뮬러가 진하게 웃었다.

“그래, 우르슬라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한다고…. 물어볼 게 있다고 했다지.”

“…….”

“만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아, 얼마든지 협조해 줄 수 있는 문제라네. 다만….”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으며, 마누엘 뮬러가 말했다.

“독일은 그 무엇보다도 자국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거든.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헷갈려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지.”

“그냥 솔직하게 너네 나라 졸라 구리다고 해도 됩니다.”

이도하도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나라에 대한 애착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애착이 다 뭔가, 아주 진절머리가 난 사람 같다. 자박- 구두 소리가 나더니 그레타 랭이 마누엘 뮬러 앞에 잔을 놓아주었다. 고맙네- 그가 인사했다. 고소하게 우유 냄새가 올라왔다. 그레타 랭은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스치듯 이도하를 보더니, 조용히 벽난로 가로 가 불꽃을 보며 그들을 등지고 섰다.

타닥- 장작이 튀며 방 안에 가득한 붉은 빛이 일렁였다.

“무엇보다 들었겠지만 우르슬라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네.”

이도하의 태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마누엘 뮬러가 제 말을 마무리했다.

“만나러 갈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벌써 꽤 오래 되었지. 해서 부득이하게 자네를 여기까지 오게 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잘 알겠지만, 이건 어디 가서 말하지 말아 주게.”

마치 그게 여태까지 우르슬라가 세상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인 것처럼, 그가 퍽 가볍게 말했다. 이건 비밀인데, 너만 알고 있어. 그 정도의 무게감밖에 없었다. 태도로만 봐서는 말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는 것 같다.

이도하는 별말 하지 않고 그런 그를 응시하기만 했다. 그냥 여기 눌러앉아라, 잘해줄게, 이런 속내가 빤히 보이는데 그걸 포장하지도 않으면서 또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무겁고 중후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다 그렇게 가벼웠다.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식이다. 우르슬라를 미끼에 끼워 흔들면서.

“알겠지만, 굳이 또 찾고자 하면 못 찾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도하도 대수롭잖게 말했다. 목적어를 빼먹었어도 누굴 말하는 건지는 빤했다.

“물론 그렇겠지. 자네가 하고자 하면 누군들 막을 수 있겠어. 그건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어. 자네도 그걸 알 거고.”

마뉴엘 뮬러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빛이 어른거리는 옅은 갈색 눈동자가 이도하를 또렷이 응시한다.

“자넨 범이고, 우린 개미에 불과한걸.”

“…….”

“세상에 개미가 태반이니 저가 물어뜯는 게 범인 줄도 모르고, 치명상을 입히고 있는 줄 알 수도 있겠지. 개미가 가진 것이라고 해봐야 끈기밖에 더 있겠나. 뜯고 뜯다보면 무릎 정도는 굽히겠지… 하고.”

마뉴엘 뮬러가 빙긋 웃었다.

“안타까운 착각이네만, 참 귀찮기는 할 거야. 그렇지 않은가?”

오백 년 묵은 구렁이다. 이도하는 마누엘 뮬러에 대한 인상을 정리했다. 어느새 묘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던 이도하가 소리 없이 혀를 차며 뚱하게 턱을 괬다.

그 말 그대로였다. 범이니 개미니 하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어쨌든 그는 하나고 이쪽은 평생 액션 첩보 영화를 찍던 수전노들이었다. 다짜고짜 개박살 내버리는 거라면 몰라도 이런 이들을 상대로 술래잡기를 하자면 골치가 아파도 아주 단단히 아플 게 분명하다. 어차피 이도하도 이 정도는 예상하고 온 참이었다.

“뭘 어쩌자고요.”

“어쩌긴,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말했다시피 자네가 싫은 걸 누가 강요할 수 있겠어. 독일에 귀화하라는 것도, 무엇을 하라는 것도 아니야. 듣자 하니 계약주와 사이가 아주 좋다던데, 어차피 자네는 즐겁게 오즈를 오가고 있잖은가?”

“마력만 있으면 된다?”

“세상이 혼란스럽지도 않은데 쓸데없이 힘쓸 필요는 없으니까.”

쓸데없는 힘- 이도하는 그가 뭘 일컫는지 알 것 같았다.

“서로 윈윈인 셈이지.”

마누엘 뮬러가 빙그레 웃었다.

“우린 자네에게 선택지를 제시할 뿐이야. 그리고 단언하건대… 우리만 한 선택지가 또 없을 거네.”

“…그야 인정하지만, 욕심이 과한 건 아닌지. 우르슬라가 있는데 인소더블이 또 필요합니까?”

말마따나, 세상이 혼란하지도 않은데. 이도하가 덧붙였다. 이미 마누엘 뮬러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한다는 뜻과 같았다. 그는 그저 웃으며 속주머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내려놓았다. 구렁이, 오백 년 먹은 구렁이… 이도하가 고개를 저으며 서류를 펼쳤다.

“서약서네.”

마누엘 뮬러가 말했다. 그가 꺼낸 서약서는 그냥 일반적인 서약서가 아니었다. 아주 명료하고 쉬운 영어로 적힌 서약서는 길지 않은 내용으로 윗 문단과 아래 문단이 나누어져 있었다. 개중 아래 문단의 글씨들은 허공에 붕 뜬 것처럼 입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종이 가에는 붉은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피였다. 이도하가 마누엘 뮬러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자네가 서약을 지키지 않으면 레고를 밟을 거라는 내용이네.”

그 순간 마누엘 뮬러의 손등에 새빨간 오망성이 나타났다. 이도하가 보기에 정 방향- 즉 본인인 마누엘 뮬러가 보기에는 역오망성이었다. 아주 잠깐 사이에 선명한 오망성의 선이 흐리게 번지더니, 그의 손등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이도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상처가 나며 피로 그려진 것이다.

“난 기독교거든. 이제 엄마한테 큰일 났어.”

손수건으로 손등을 슥 닦아내며 마누엘 뮬러가 태연하게 말했다. 서약을 지키지 않으면 레고를 밟을 거라는 황당한 말은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전교 173명 중 100등의 영어 실력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적힌 윗 문단에는 마누엘 뮬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는 이 서약서에 대해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이도하에게 설명을 해 줄 의무가 있다고. 마누엘 뮬러가 말했다.

“레고를 밟는다는 말 정도야 가벼운 거짓말이라 이 정도로 끝났지만, 큰 거짓말을 했다가는 아주 끔찍한 몰골로 죽을 거라는 말이지. 보시다시피 내 것은 그렇고, 자네의 서약은 별것 없어. 우르슬라를 만나고 나면 그녀와 있었던 일을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이야. 어긴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도 않아. 행여나 말하려고 하면, 입술과 성대가 굳어 말하지 못하게 되는 것뿐이지. 그게 전부야.”

이도하는 말없이 서약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누엘 뮬러는 그가 고심하는가 하여 좀 더 기다리다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자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어.”

이도하는 그런 이유로 서약서를 쳐다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묘한 기분이 들어서 그랬다. 언젠가 오늘처럼 이렇게 서약서를 앞에 두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떠올라서.

‘이건 서약이에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좌시하지 않고 어느 때든, 어떤 때든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

약속. 이도하가 얼핏 웃었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마누엘 뮬러가 손수건에 묻은 피를 검지로 슥 훔쳐 서약서에 떨어트리는 시늉을 했다. 손등에 붉게 드러난 역오망성과 피를 본 이도하는 또 묘한 기분을 느끼며 검지에 피를 냈다. 종이에 똑 떨어트리자, 그것은 장미꽃처럼 옅게 퍼지며 종이에 스며들었다. 이도하가 떨어트린 핏방울이 옅어질수록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글씨들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마침내 핏방울이 사라지는 순간, 글씨들이 종이에 완전히 박혀 들어갔다. 주변의 빛도 사라졌다. 이제는 그냥 테두리가 붉은 평범한 종이처럼 보인다. 세상에는 정말 별의별 특기가 다 있구나. 다시금 깨달으며 이도하가 일어섰다.

“가죠.”

“지금?”

서약서를 챙기던 마누엘 뮬러가 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우르슬라는 이제 쉰이 다 되어 가는데.”

아 어쩌라고. 독일까지 와서 웬 노인공경이며, 요즘 세상에 쉰이면 노인도 아니다. 이도하의 얼굴에 짜증이 스쳤다. 그런데 마누엘 뮬러가 말했다.

“그보다 자네, 기다려 봐야 하지 않아?”

“뭘요.”

“자네 소환주- 자네, 설마 모르나?”

정말 난감하다는 듯 마누엘 뮬러가 물었다. 시오한이 여기서 왜 나와. 이도하는 짜증과 함께 불안을 느꼈다. 그의 기세가 사납게 변하는 순간, 그때까지도 말없이 벽난로 가에 서 있던 그레타 랭이 곧바로 마누엘 뮬러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벌써부터 얼굴이 창백했다. 마누엘 뮬러가 그녀를 말리듯 손을 뻗는 순간, 쿵- 무형의 기운이 그들을 압박했다. 범이 송곳니가 뒷목에 닿아있는 듯 살벌한 위압감에 마누엘 뮬러마저 얼굴이 굳었다.

“말을 조심해서 하는 게 좋을 텐데.”

이도하가 눈을 시퍼런 섬광으로 물들이며 나직하게 얘기했다.

“…아직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르페노스 황제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이 있어.”

“무슨 개소리를-”

이도하가 말을 멈추었다. 그는 코웃음이나 치려고 했다. 시오한은 그쪽에서는 지고한 황제요, 여기서도 모르는 이가 없으니 유명인이라 봐도 좋은데, 그런 이들에 대한 별 괴 소문이 도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인가 말이다. 게다가 불과 두어 시간 전에도 멀쩡히 만나고 왔는데 암살당했다는 말은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오밤중에 시오한을 만나야만 했던 이유가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고 만 것이다.

바닥으로 뚝, 뚝 떨어지던 잉크. 그 밑에 거뭇하게 고인 웅덩이. 부서진 침대, 벽에 튄 자국.

그 꿈.

짧은 소환.

“물론 자네-”

이도하의 신형이 그대로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터트려버리든, 짓눌러버리든 할 것 같던 무형의 기운도 사라졌다. 헉, 그레타 랭이 거칠게 숨을 뱉어냈다. 마누엘 뮬러는 어깨를 펴며 섬찟 솜털이 솟은 목을 어루만졌다. 태연자약하던 여유 같은 건 미소와 사라지고 어느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이도하가 사라진 자리를 신중하게 살폈다. 소환진의 잔상이 희미하게 맴돌다 사라졌다.

<스스로 오즈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인데.>

보기 드물게도 얼굴에, 그것도 눈 밑에 떡하니 새겨진 계약명이 멀쩡했으니 물론 황제가 암살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것도 사실이고, 조금 와전된 소문이 도는 것도 사실이니 그가 거짓말을 한 셈은 아니다.

<그레타>

<예, 국장님>

그레타 랭이 즉시 대답했다.

<이도하가 돌아오거든 바로 우르슬라에게 안내해 줘.>

잘 해줘야지. 마누엘 뮬러가 코트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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