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쯧….”
이도하의 시야에 문득 커튼을 잡은 제 손이 들어왔다. 그는 흐린 달빛에 제 손을 비춰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아무것도 묻은 건 없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뭐가 묻은 것 같았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려던 이도하는 이대로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침대 머리맡의 협탁에 두었던 핸드폰이 붕 떠올라 그의 손에 안착했다. 이도하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로 온 것들 수십 개는 한 번에 모아 싹 지워버린 뒤 다시 메시지를 확인하는 이도하의 미간이 점차 구겨져 갔다.
신은호네 원장은 아주 언론 플레이에 제대로 맛이 들렸는지 물 만난 물고기… 여기까지 생각한 이도하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아무튼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고, 독일에서 이도하가 정말로 목격되었다느니 하는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를 목격담까지 뜨며 여론은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회에서 인소더블 특별법 통과를 강행했고….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다들 입만 살았다. 캘리포니아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 사망 사고는 그의 소속사가 이드로와 연계해서 대응하는 중이었다. 이도하더러 ‘무자비한 방관자’라고 칭했다는 죽은 아이의 부모 사진이 제목과 함께 아주 대문짝만하게 떠 있다. 이도하가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와중에 계약 양도란 단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검색까지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다들 떠들지 못하면 죽는 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무 말이나 해대는 와중에 정작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아이라만 입을 딱 다물었다.
“아.”
대충 살고 싶다, 진짜. 고개를 저은 이도하가 메시지를 더 넘겼다.
“우리… 나쁜 놈. 이게 뭔 소리야.”
김윤혜는 말을 번드르르하게 한다고 넘어갈 위인이 아닌데. 도하가 첨부된 파일을 확인했다. 허- 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주 기가 찬 웃음이었다.
“이태학?”
아이라 한국 지부 연구 소장 이태학.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딱 보기에도 여든은 넘었을 이태학은 특기와 관련해서는 한국에서 가장 입지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이라 한국 지부의 초기 멤버 중 아직까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며, 초기 아이라의 비인도적 연구를 세상에 고발한 사람이기도 하다.
하여간에 교과서에도 얼굴과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올라가 있고 지금 한국에서 영향력 좀 쓴다, 하는 특기자들 여럿이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이었다. 기부도 하고 자선 사업도 하고, 강연도 다니고 자문도 여러 군데 하는, 간단히 말해서 조용한 거물이다.
그런데 최준원이 이 이태학을 ‘나쁜 사람’이라며 건네준 것이다. 이태학이 레드 마피아와 현자의 탑, 그리고 아이라가 손잡은 계약 양도 실험에 연루된 아이라의 고위 인사 중 하나라고. 마주치면 사탕 하나씩 쥐여 줄 것 같은 얼굴로 인자하게 웃고 있는 사진까지 딱 붙여서. 관상 따윈 믿지도 않고 남이 기부를 하든 자선을 하든 그러든가 말든가 하는 이도하마저 믿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할아범이라고?
그러나 최준원이 첨부한 서류에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아주 여럿 있었다. 태반이 내부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허.”
기가 막혀 연신 헛웃음만 내배던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물론 이런 걸 보내줬다고 해서 그가 최준원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오만 데서 다 수작질이네….”
적의 적은 친구, 뭐 이런 건가.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부딪치던 세력 싸움 같은 것에 제가 말려든 건가. 그런데 이건 새우 싸움에 고래 끌어들이기 아닌가. 아니지. 이도하는 제가 마치 거대한 폭탄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저는 폭탄이고 최준원은 절 들고서 지 멋대로 던져놓은 뒤 터트리려는 것이다. 계약 양도 실험 그 자체에 깽판을 놓은 것처럼.
그 실험으로 이도하는 아주 ‘우연히’ 천 년 전 소환진을 발견했고, 거기서부터 지금 여기까지 흘러왔으니 결국 저는 또 우르슬라, 혹은 독일에 던져진 폭탄이 되는 셈이겠다. 이 개새끼 좀 봐라. 이도하가 냉소했다.
최준원이 뭘 의도했든, 뭘 바라든, 이건 다 제 선택이었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지지고 볶고 뭘 하든 그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그들이 뭘 했든 거기서 무언가가 비롯돼 지금의 이 상황이 된 거라면, 그때부턴 얘기가 전혀 다르다. 세력이건 뭐건 어차피 이도하에겐 다 거기서 거기다.
일단 둬. 김윤혜에게 답장한 이도하는 냉장고로 향하려다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선 그가 커튼을 들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내 그곳에서 떠들고 있던 남자들이 그를 향해 눈인사했다. 그냥 동네 주민인 줄 알았더니… 속주머니에서 네모반듯하게 접힌 종이를 꺼낸 남자가 그것을 손끝에서 튕겼다. 둥실, 종이가 떠올랐다.
“진짜 별 지랄을 다 한다.”
그냥 전화하든가 문자를 보내든가, 뭐 하냐. 고개를 저은 이도하가 창문 앞에 두둥실 떠오른 종이를 잡아 펴보았다. 놀랍게도 가지런한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우르슬라는 누군가를 만나러 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직접 가야 합니다.
이도하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죽자고 달려들더니 낮에 보여준 광경이 충격적이긴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빨리 움직인 걸 보면.
그래도 설마하니 쉽게 포기할 리는 없는데. ‘만나러 갈 수 없다’라…. 이도하는 틱, 종이를 다시 남자에게 버린 뒤 외투를 챙겨 입었다. 문을 나서려던 이도하는 황급히 돌아오더니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이어폰을 주머니에 얼른 쓸어 담았다.
***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편안하게 울린다. 소쩍새 울음소리 같은 것도 났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평화롭게 타오르며 방 전체를 붉은빛 온기로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소파도 푹신한 천 소파에다가 엉덩이가 거의 파묻다시피 쑥 들어가, 따뜻한 차까지 손에 들고 있으면 몸이 아주 녹아내리기 딱 좋았다.
바깥 창밖에 눈이 쌓여 있고 벽난로 위에 양말이 걸려 있으며, 거대한 트리까지 있었다면 어떻게 보나 어렸을 적 퍼즐로나 보던 유럽의 푸근한 가정집 거실이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는데….”
물론 그나마도 마음이 좀 따뜻해야 그리 보이는 것이고, 이도하의 눈에는 죄다 수작질을 위한 소꿉장난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초코 잔까지. 막 그 핫초코 잔을 이도하의 앞에 내려놓던 그레타 랭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이도하의 사나운 시선을 받은 그레타 랭이 잔을 마저 내려놓으며 그를 외면하고 말했다.
<우르슬라가 이웃집 친구도 아니고 당신이 만나고 싶다고 바로바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절차가 있으니 기다리십시오.>
그녀가 딱딱하게 말했다. 이 통역 특기를 거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날것 그대로 들었더라면 모르긴 몰라도 고운 말투는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는 씹던 껌처럼 배부르게 욕이나 처먹고 있는데 여긴 절차 같은 것도 있고, 대우 좋네.”
이도하가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그레타 랭이 순간 움칠했다. 아무렴 이 집으로 그를 안내할 때부터 이곳에 우르슬라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렇게 쉬우면 참 좋겠지만,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그쪽은 알아요? 우르슬라가 어디 있는지.”
이도하가 물었다. 벽난로 가에 기대 불빛을 바라보고 있던 그레타 랭이 시선을 들었다. 굳은 눈동자가 이도하를 응시했다.
<모릅니다.>
짧게 대답한 그녀가 이내 뚜벅뚜벅 그를 스쳐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찬바람이 한차례 일며 벽난로의 불꽃이 휘청거렸다. 묵직한 구두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이도하는 아주 연한 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키가 큰 중년의 사내가 소파 옆에 다가와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져 있었으며, 눈과 눈썹이 거의 맞닿을 정도로 눈매가 깊어 근엄한 인상을 주었다. 검은색 코트에는 겨울 저녁의 냄새가 묻어 있다. 검은색 장갑을 낀 손이 목도리를 벗어내는 걸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목도리 좋네.”
남자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그가 제 목도리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독일의 겨울은 춥거든.”
중년의 남자가 능숙한 한국어로 말했다. 억양부터 발음까지 아주 완벽한 한국어였다. 거실에 들어온 사람은 남자 말고는 그레타 랭밖에 없는데, 그레타 랭의 특기는 머리로 직접 울린다. 남자 본인의 특기이거나, 아니면 그냥 한국어를 잘한다는 뜻이다. 이도하의 생각을 눈치챈 듯 남자가 먼저 말했다.
“한 6년 전에 배웠지. 필요할 날이 온 것 같아서. 내 특기가 ‘다윈의 증거’라.”
이름만 들어서는 그게 무슨 특기인지는 감도 안 온다. 그러나 6년 전이라면 이도하가 18살, 인소더블이 되었던 해였다.
“내 목도리는 어제 아주 가루가 돼 버렸는데.”
“음?”
난데없는 소리에 남자는 잠시 의아해했다. 그러나 또 금세 말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아,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직원들도 거의 가루가 됐으니 그만하면 뭐. 공평하지.”
“직원들이 목도리 하나 값인가 봅니다.”
“비싼 목도리인데.”
남자가 목도리를 들어 보였다. 과연, 명품 중에서도 명품이라는 말 로고가 단아하게 박혀있다. 곧 남자가 농담이라는 듯 씩 웃었다.
“인소더블과 이렇게 마주 앉을 값으로 충분하지. 목도리는 내가 하나 좋은 걸로 사주겠네.”
장갑까지 벗고 일인용 소파에 편안하게 앉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독일 특별 수사국 국장, 마누엘 뮬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