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커튼 너머로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뿌옇게 비치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소리가 재깍거리는 벌레 소리처럼 조용하게 요란하고, 골목에서 어떤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팔을 베고 누운 채로 멍하니 어른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오한!”
이도하가 이불을 제치고 황급히 일어났다. 그러나 갈 데도 없었다. 호텔 방은 양옆으로 걸어서 고작 열 걸음 남짓이었다.
“시오한!!”
그나마도 왔다 갔다 하며 이마를 짚은 이도하가 한 번 더 소리를 높였다.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나? 여기가 밤이라고 저기까지 밤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근데 왜 답이 없느냔 말이다. 자고 있으면 오히려 다행인가? 물론 그는 황제니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처럼 입 밖으로 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응, 정도는 해줄 수 있을 텐데.
불안감이 엄습하자 방 안의 물건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방 안에만 지진이 난 것처럼 테이블도 의자도 진동으로 슬금슬금 움직인다. 진동이 심해지는 순간,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이람?
“…왁!”
우당탕! 덜덜거리며 조금씩 기어 나온 의자 다리에 발이 탁 걸린 이도하가 바닥을 뒹굴었다.
-화이람?!
“쓰읍… 아파라.”
-화이람? 다친 거야?
다급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도 아주 멀쩡한 것 같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긴장으로 꽝꽝 얼어있던 몸이 녹듯이 노곤하게 풀린다. 이도하는 그제야 난데없이 오밤중에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떤 제 꼴이 우스워 입술을 꾹 물었다. 그는 꽝 소리 나게 찍은 제 무릎을 살살 문질렀다.
“별거 아냐. 넘어졌어. 당신 뭐 했어? 잤어? 별일 없지?
-응. 한밤중인걸. 넘어졌다고?
“그냥, 꿈을 꿔 가지고.”
-꿈?
꿈인지 뭔지 모르겠다. 꿈 같았다. 꼭 제가 겪은 일 같았지만, 보이는 것이 하도 어지러워 뭘 봤는지도 제대로 모르겠다. 다만 반짝거리며 나풀거리던 실타래 같은 것이 꼭 시오한의 머리카락 같아서… 이도하는 문득 이거야말로 유난인가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개꿈.”
이도하가 대충 둘러댔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침대까지 돌아가는 것도 귀찮다. 그는 그냥 바닥에 덜렁 드러누웠다. 캄캄한 천장이 시야의 전부였다.
-꿈에서 날 본 거야?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려 있다. 아주 좋아하는 듯한데, 정작 그 목소리를 들은 이도하는 갑자기 골이 났다. 그는 잠시 뚱하게 셈을 해 보았다. 틀렸나 싶어 두 번이나 해 보았다.
“있잖아, 여기 날짜로는 오늘로 17일째거든.”
-응?
“당신 왜 나 안 불러?”
이도하가 물었다.
“물고기냐, 나?”
-…물고기?
“어장 안의 물고기냐고. 이미 당신 그물에 들어가서 이제 다 잡았다 싶냐고. 언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불러대더니 이래도 되냐?”
-……
말이 없다.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뭐야, 진짜야? 그런데 갑자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시오한은 정말 웃겨 죽겠다는 듯이 아주 한참을 웃었는데, 이도하는 여러 번이나 무슨 말을 하려 입술만 달싹이다 말고 말았다. 웃어라, 웃어. 정말 우습게도 시오한이 그렇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를 들으니 그게 또 좋다.
-세상에, 화이람.
겨우 웃음이 잦아든 시오한이 말했다.
-그물이라니. 당연히 아니지. 그대가 어찌 그런 것에 들어가겠어.
“…이건 또 예상 못 했네.”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이도하에게는 그 말이 퍽 모호하게 느껴졌고, 그만큼 그의 표정도 요상해졌다.
-맹세컨대 화이람, 나는 단 한 번도 그대를 잡았다 여겨본 적 없어.
“아니, 왜?”
이건 또 이거대로 이도하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이도하는 다 잡은 물고기가 되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놓은 물고기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이제 당당하게 ‘난 게이’라고 말한다고.”
투덜거린 이도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시피 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조금 젖힌 그가 꽉 들어찬 건물 사이로 달을 찾았다. 구름이 많아 흐리긴 하지만 가느다란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당연하지만 독일 달이나 한국 달이나 똑같다. 달 예쁘다고, 달…. 이도하가 혼자 중얼거렸다.
-글쎄, 그대가 그대를 물고기라 여긴다면 나는 그물보다는 바다이고 싶은걸.
“……”
-그대가 행복하고, 그게 내 곁에서라면 더 바라는 게 없을 거야. 허니 그물보다는 바다가 낫지 않을까?
미친… 이도하가 창틀에 머리를 박았다. 쿵, 쿵, 여러 차례 박자 알싸하게 머리가 아팠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심장이 더 아팠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근데 왜 안 부르는데.”
-그건…
“보고 싶어, 시오한.”
이도하가 말했다. 말하고 나서야 그는 깨달았다. 정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난 이주간 내내 그가 필요했다.
-…….
“당신이 보고 싶어 죽겠어.”
그 순간, 발밑에 쫙 소환진이 펼쳐졌다. 푸른빛이 온 방 안에 가득 차올랐다. 곧이어 따뜻한 손이 이도하의 뺨을 감쌌다. 다급하게 맞닿아오는 입술에 그가 입을 벌렸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사람처럼. 이제는 익숙한 숨결, 익숙한 향이 온통 그를 감싸 안는다. 감은 시야 속에 푸른 잔상이 남아 맴돈다. 열린 창밖으로부터 흘러온 습기 어린 공기에 맞닿은 살이 따끈하게 달라붙었다.
“살겠다.”
이도하를 가득 끌어안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 공기의 진동을 타고 직접 이도하에게로 닿는 목소리.
“물고기라고 하면 나야말로 물고기지, 화이람.”
차가운 금발이 이도하의 손가락 사이로 차갑게 빠져나갔다. 주변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라지지 않은 소환진의 가닥가닥들이 떠올라 너울거리며 이도하의 팔과 어깨로 얽혀 든다.
“그대가 있어야 내가 숨을 쉬니.”
“-시오한.”
푸른빛으로 물든 황금색 눈동자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이도하가 충동적으로 그 위에 입술을 가져갔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입술을 스쳤다. 어깨를 떨며 웃은 시오한이 이도하의 뒷목을 감싸고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다만 그대를 기다리게 한 것은 내가 부족한 탓이야. 미안해.”
“당신-”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 마력이 쉽사리 회복되지 않을 것은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다렸고, 또 그렇기 때문에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마력은 기본적인 기력을 필요로 하는데, 옛날부터 ‘기력이 쇠한다’는 말도 있으니. 행여나 정말 그 말처럼 시오한이 원래대로 회복할 수 없을까 봐.
“난 괜찮아, 화이람.”
앞서 대답하며 여느 때처럼, 시오한이 웃었다. 너울거리는 소환진의 빛이 이제 거의 하얗게 느껴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어루만지듯 이도하의 위로 얽혀 일렁거리던 획 하나하나가 팽팽하게 당겨진다.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시오한을 꽉 붙잡았다. 그런데 팔을 붙잡은 손이 미끌거린다. 뭐야? 그가 시선을 내리려는 순간, 시오한이 고개를 숙여 이도하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사자가 인사하듯, 어리광을 부리듯. 긴 금발이 이도하의 위로 쏟아졌다.
“그대만 있으면 난 다 괜찮지. 그대가 보고 싶은 것만 제외하면.”
“…일하지 마.”
끙, 목에 비벼지는 감촉에 질끈 눈을 감고 있던 이도하가 간신히 말했다.
“말하지도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 침대에 누워서 밥 먹고 잠만 자.”
“허면 이 나라는 어떻게 하고?”
“알 게 뭐야. 나야, 나라야.”
이도하가 뻔뻔하게 물었다. 시오한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말했다.
“그대야.”
“그럼 됐지. 놔두면 다 알아서 하게 되어 있어. 당신 아니라도 괜찮다고.”
꼭 그여야만 할 필요는 없다. 시오한의 등을 감싸며 이도하가 말했다. 방 안을 잠식했던 푸른빛은 이제 벼락이 치던 순간처럼 아주 새하얬다. 소환의 틈, 세계의 사이, 이도하는 마치 그들이 그 어딘가의 순간을 잘게 나누어 그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어야 한다고 했잖아.”
불쾌한 습기에 피비린내가 묻어 있던 그 지하 감옥에서. 기적을 기원했던 시오한이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소환한다는 생각으로도 약간 피가 거꾸로 솟지만, 그가 아닌 다른 이가 절 소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응, 화이람.”
“그러니까 따져도 내가 먼저지.”
좋아, 이만하면 엄청 논리적이었다. 황제에게 다 때려치우라는 억지를 부려 놓고 이도하는 가뿐하게 합리화했다. 하하- 시오한이 결국 소리 내어 웃더니 그를 아주 꽉 끌어안았다.
특기만 세계 최고지 운동이라고는 숨 쉬는 것 외에 딱히 하지 않는 이도하는 생각지도 못한 어마어마한 힘에 억, 한 번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운동을 좀 해야겠다, 생각하며 이도하가 얌전히 단단한 어깨에 턱을 얹었다. 사위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하얗게 번졌다.
“그대 말이 다 맞아.”
“시오한, 그 달-”
불은 끈 것처럼 새하얀 빛이 일순 사라졌다. 온통 주변이 깜깜하다. 달아오르듯 기이하게 귓가를 맴돌던 소리도 없었다. 이따금 차 소리와 함께 두런두런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가 들리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울리고, 조용하지만 소란스럽게 소리로 가득 찬 그의 세계였다. 이도하는 그가 서 있던 창가에 원래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방금 전의 일은 꿈이었던 것 같다.
이도하는 커튼을 조금 걷고 창밖을 보았다. 소환되기 전 보았던 그대로였다.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골목길의 남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떠들고 있었다. 정말 아주 잠깐 소환되었던 모양이다. 이도하는 창밖에 뜬 달을 아쉽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