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도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뉴스를 시청한 후 TV를 껐다. 벼락이 내리쳐서 도시를 깨부순 건 환상이었지만, 그래도 집도 부서지고 곳곳에서 사람이 난데없이 땅으로 처박히고 했을 텐데 그런 내용은 없는 것 같았다.
“뜨가 으느뜬드 요즘더 얼론혼제를 하나.”
이어폰을 귀에 꼽은 이도하가 웅얼거렸다. 칫솔을 물고 있어 발음이 다 샜다. 그의 머릿속에 웃음소리가 흘렀다.
-화이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씁, 양치하느라. 뉴스라고, 여기는 그날 있었던 중요 사건을 보도해 주는 그런 게 있는데 낮에 있었던 일이 하나도 안 나오길래. 뭐 통제를 하나 싶어서.”
그 정도로 광역 환상을 쳤으니 알아채는 특기자들도 있었을 텐데. 게다가 갑자기 사람이 날아와 멀쩡한 주택을 부수는 일은 틀림없는 뉴스감이다.
-하지 않을 리가 있겠어. 솜씨가 느는 것뿐이겠지.
잠깐 생각해 본 이도하가 곧 수긍했다.
“하기야.”
티비를 끈 이도하는 잠시 이어폰을 뺀 후 양치를 마무리하고 침대 위로 늘어졌다. 피곤하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눕고 보니 몸이 아주 침대로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끙, 이도하가 꿈지럭거리며 다시 이어폰을 찾아 꼈다. 이어폰은 최근에 그가 생각해 낸 꼼수였다. 하고 싶은 말과 하지 않을 말을 구분해서 전달해낼 꼼수.
“그래서 오늘 날짜가… 2019년 11월 8일.”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한 이도하가 말했다.
“어제 별일 없었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 종일 여기저기 찾아 쑤시고 다녔고, 랭 그 여자랑 가볍게 대거리 한 번 했고, 엄마랑 잠깐 통화했고. 거의 관광이었네.”
-맞아, 그대가 하루 종일 군것질만 해서 내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시오한이 말했다.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가만 보니 이 사람은 정말 제가 먹는 것에 진심인 것 같기도 하다… 생각하며 이도하는 좀 더 편안하게 늘어졌다. 공기가 건조해지는 게 싫어 히터를 틀지 않았더니 방 안이 아주 싸늘했다. 그가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오늘은 9시쯤 일어났나. 날짜 확인하고, 기록 써 놓고, 어제 말했던 곳에 가 봤는데 아무도 없었어. 이젠 우르슬라라는 여자가 진짜 있기나 한 건지조차 의심스럽다.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고 죄다 사라져서는… 흔적도 남아 있는 게 없어. 그 여자가 다녔던 초등학교 졸업 앨범에마저 없었더라면 진짜 허상인 줄 알았을걸. 전화로 약속했던 통역사는 나오지도 않고,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도서관 가 봤는데 흔적을 읽어봐도 뭐 죄다 독일어라…. 망했어, 거기는 그냥. 그러다 이 인간들이 나한테 추적을 걸어놨기에 또 대거리 거하게 한 번 하고… 와, 도시를 아주 아작을 내는 환상을 보여줬는데도 달려들더라. 아무튼 그래서… 이제 침대네.”
이도하는 거의 반쯤 잠에 든 것 같았다. 목소리는 점점 흐려졌고,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그가 잠을 깨려 미간을 꾹꾹 눌렀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도하가 눈꺼풀에 한껏 힘을 줬다.
-화이람, 졸려?
“아냐. 이불 덮고 있으니까 뜨뜻해서 그래.”
-졸리면 자.
아우. 이도하가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호텔 특유의 냄새가 물씬 올라온다. 베개를 구긴 이도하가 그 위에 팔을 얹고 엎드렸다.
“괜찮은 거지?”
-어제가 7일, 오늘이 8일. 그대는 한 달만 있으면 25살.
“까먹은 건 없나?”
-글쎄, 오늘도 끼니를 제대로 안 챙긴 것 정도?
이미 눈을 감은 이도하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당신은 제대로 챙겼고?”
-나야, 그러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걸. 마음이 없어도 그래야 하지.
“큰일까지야.”
-그러게, 큰일까지 나지 않는데도 그러네. 일이라는 게 크게 만들면 만들어지니.
“그래서 당신이 이렇게 끼니에 집착하나.”
-그건 내가 그대를 많이 사랑하여서.
“…….”
혼자 별 시답잖은 농담이라며 실실거리던 이도하가 멈추었다. 그는 괜히 아무도 없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몸을 쭈그러트렸다.
“뭐 이런 기습이 다 있냐.”
이도하가 가슴을 벅벅 긁었다.
-달갑지 않아?
“달가워.”
재깍 대답한 이도하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음. 그는 몇 번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쯧, 하고 혼자 혀를 차더니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당신이 느끼기에 시간이 돌아간 적은 없다는 거지?”
-응.
늘 그렇듯, 시오한이 순순히 대답했다. 이도하가 빙글 몸을 돌렸다. 이따금 바깥의 불빛이 커튼 사이로 어른거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우르슬라 그 여자한테 진짜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거야. 내가 베를린 한복판에 이런 활개를 치고 다니는데도 꼼짝도 안 하는 걸 보면.”
-머지않은 것 같네.
“그렇지….”
또 몽롱하게 수마가 몰려오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심란하기도 하여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낯선 호텔방, 낯선 냄새, 낯선 글씨, 이불마저 온통 낯선 것들이 그를 덮어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화이람, 괜찮아?
시오한이 물었다. 그 심란한 속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오즈에서야 공명 때문에 그렇다고 쳐도 제가 여기 있으니 그런 식으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어. 당신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하는 중이야.”
어쩌면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아니었더라면 모든 것이 어떻게 되었을지 역시 모르는 일이다. 캘리포니아 지진은 결국 일어났을 것이며, 그가 알든 모르든 계약 양도 실험도 진행되었을 것이고, 우르슬라 역시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는 것을 숨긴 채로 감추어져 있었을 것이다. 저는 그저 배경처럼 깔린 무수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도하는 문득 그 속에서 제가 인형 뽑기의 인형처럼 뽑히는 상상을 했다. 시오한이 절 소환한 것이 인형 뽑기와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시오한이 기원했다는 기적에 가장 가까운 특기자는 분명 저이지만, 그래도… 세상엔 많고 많은 다양한 특기자가 있으니까. 만일 다른 이가 소환되었더라면….
콰직!! TV가 종잇장처럼 우그러졌다. 깜짝 놀란 이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공처럼 동그랗게 우그러진 TV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제가 한 짓에 스스로 기가 막혀 하느라고 이도하는 잠깐 시오한이 한 말을 놓쳤다.
“미친….”
-화이람?
이도하가 손을 저었다. 구겨져 있던 TV가 신음 소리를 내며 원래 모양대로 돌아왔지만, 그래 봤자 구겨진 고철에서 펴진 고철이 되었을 뿐이었다. 에이씨. 이도하가 다시 철퍼덕 드러누웠다.
“아니야, 아무것도. 나 자야겠다.”
-그래. 잘 자, 화이람.
이어폰을 빼며 눈을 감은 이도하는 괜스레 혼자 쪽팔려 하며 이리저리 몸을 뒤집었다. 잠도 이미 달아난 듯싶었으나, 그는 곧 조용해졌다.
사위가 어둡다. 열린 창문으로 커튼이 밤바다처럼 너울거린다. 언뜻언뜻, 조금 기울어진 달이 모습을 비추었다. 벽에 기대선 책장에는 책이 가득했으며, 고풍스러운 책상에는 서류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널브러진 펜에서 잉크가 묻어나온 듯 책상 위 여기저기에 거뭇한 자국이 나 있다.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은 듯 잉크통은 엎질러져 바닥으로 잉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벌써 한참이나 그렇게 떨어진 듯 동그랗게 고여 있는 잉크물 위로 다시 똑- 잉크 방울이 떨어졌다. 어두운 시야로 그저 거뭇하게만 보이는 웅덩이가 기어 나오듯 조금 더 넓어진다. 눈을 깜빡였다 싶은 순간, 급격하게 이동한다. 무언가 번쩍이며 궤적을 남겼다. 긴 검날이 눈을 부릅뜬 얼굴을 갈랐다.
얼굴이 잘리고 당장이라도 피가 분수처럼 솟구칠 것 같다. 그러나 얼굴이 잘리기는커녕 앞쪽으로 쇄도한다. 두꺼운 군용 잭나이프가 한 치 앞으로 스쳤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선명하게 보인다. 벼려진 그 결 하나하나까지. 핏발이 선 눈가가 땀으로 번들거린다. 시야가 연이어 휘둘러지는 칼을 피해 어지럽게 움직인다.
반짝이는 금실 같은 것이 나풀거리며 흩날렸다. 배, 어깨, 가슴, 허벅지, 옆구리, 허점이 여러 번 눈에 들어오는데도 베지 않는다. 그 순간 시야가 확 낮아졌다. 크게 흔들리며 어두운 방 안의 전경이 홱 돌았다. 엉망으로 부서진 침대, 거뭇한 것이 흩뿌려진 벽, 심장을 꿰뚫린 시체 같은 것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다 아주 잠시 멈칫했다.
다음 순간 시야에 나타난 것은, 머리가 없이 선 시체였다. 손에 든 잭나이프가 툭 떨어졌다. 나무토막처럼 선 것이 기우뚱, 기우는 순간 시선이 움직였다. 길게 베인 팔이 있었다. 소매가 길고 품이 넓은 옷자락이 반이나 잘려 있으며 핏자국이 팔을 따라 길게 흐르고 있었다. 몇 번 팔을 뒤집어 상처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든다. 앞에서 어두운 머리칼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피가 엉긴 칼을 추스르던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젓듯 시야가 좌우로 흔들리더니 창밖으로 옮겨갔다. 아무 일 없는 듯 너울거리는 커튼 너머 창백하게 뜬 달에 닿는다.
“!!!”
이도하는 소리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