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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07화 (107/250)

107화

“정말 시간을 돌려 죽은 사람을 살려내 본 적이 있을지.”

코트 자락이 펄럭였다. 선선하게 불던 바람이 급변했다. 순간적으로 돌풍이 홱 일었고, 그레타 랭의 신형이 연기로 흩어졌다. 이도하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소리도 없이 동그란 자국이 움푹 파였다. 잔디가 죄다 바깥을 향해 납작 누웠다.

다음 순간 이도하는 낮은 건물의 옥상 위에 서 있었다. 태양열 판이 무수하게 늘어서 있었고, 아래에서는 아이들 목소리가 떠들썩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태양이 쨍하게 내리쬔다. 눈부심에 이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작살 같은 햇살 줄기가 땅으로 줄기줄기 내리찍는 것 같다.

그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 작열하는 태양 빛은 죄다 어그러져 있었다. 시야가 조각나고 뒤틀려 아지랑이가 이는 것처럼 빙빙 돈다. 도열한 태양열 판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기울어지더니 그가 딛고 선 옥상도, 건물도 흐르듯 거꾸로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당장 속이 뒤집혀 멀미가 날 것 같은 시야를 가늘게 뜨며 가늠해 보았다.

“환영?”

우웅- 공기가 진동하는 특유의 소리가 울렸다. 비틀리고 녹아내린 시야 전체가 덜덜덜 떨리기 시작했으나 깨어지지는 않는다. 아니구나, 이도하가 즉시 판단했다. 환영이었더라면 오한울 때 그랬던 것처럼 주변의 특기 자체를 찢어버리는 이도하의 힘에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건 제 시야의 문제였다. 사물을 보는 이도하의 인식 자체에 오류를 낸 것이다.

-조를 이뤄 합을 맞춰본 이들을 상대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야. 여러 명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것 자체가 그렇고, 생각지 못한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니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시오한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도하는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로 이제 제 머리 위로 올라가 일렁거리는 학교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발밑에 있었고, 놀이터로 뛰어나오는 아이들은 당장이라도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머리칼과 긴 코트 자락을 흔들었다.

이도하는 ‘그들’이 긴장한 채 절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시오한의 말마따나 그들의 목적은 이도하를 이겨 먹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했다면 좀 우습다. 제압, 회유, 그게 그들이 원하는 방향이다. 그러니 가늠해 보고 있을 것이다. 세 명의 인소더블 중, 실질적으로 직접적인 ‘파괴’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되는 인소더블이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어디까지 제압할 수 있을지.

-하지만 그대는 그럴 필요가 없어.

시오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도하의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당신 말이 맞아.”

어차피 그는 저들과 달랐다. 경찰이나 군인, 하물며 요원도, 무엇도 아니고, 이제 다 글러 먹은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대학생- 아니, 휴학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고작 리모콘 들어 올리는 것보다는 특기를 좀 더 많이 써먹었지만, 특기자를 상대로 본격적인 전투 같은 건 한 적도 없다. 할 줄도 모르고.

우우우웅- 다시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이도하는 여태 그를 주시하던 이들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전투는 무슨.

원래 싸움은 개싸움이랬다.

뒤집어진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쿠쿵- 심상치 않은 울림이 일었다. 쨍하고 맑던 하늘에 삽시간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쿠구궁- 거인의 발걸음 같은 소리가 크고 가까워졌다. 이도하의 머릿속에 다급한 그레타 랭의 외침이 울렸다.

<안 돼!>

거뭇한 구름 사이로 파지직- 전격이 흘렀다 싶은 순간, 그것이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사위가 일순 하얀빛으로 번쩍였다.

쾅!!!

흡사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었다. 공기가 흔들리며 고막이 찢어질 듯 진동했다. 대지가 부수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쾅! 콰쾅!! 하늘을 가득 메운 뇌운 사이에서 벼락이 사정없이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건물이 깨지고 땅이 갈라졌다. 비명 소리가 벼락의 진동 사이로 희미하게 퍼졌다. 벼락에 맞은 곳곳에서 화마가 새빨갛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녹아내린 이도하의 시야로는 지옥도에 가까운 아비규환이었다.

온통 뒤집어진 그의 시야에는 발밑의 뇌운에서 벼락이 창날처럼 솟구쳐 올라 대지를 뚫는다. 바다처럼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에 수백 개의 벼락 줄기가 가득하다. 엄청난 굉음에 귀가 먹먹해지며 소리가 사라졌다. 까딱 고개를 기울인 이도하가 무심히 말했다.

“장관이네. 다음에 당신도 한 번 보여줘야겠다.”

-그대와 본다면 무엇인들 장관이 아니겠어.

“참나.”

그 순간에도 벼락으로 무자비하게 조각나고 있는 베를린을 바라보며 이도하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도하!!!>

가득 찬 비명 가운데 증오에 찬 외침이 찡- 하고 머리를 울렸다. 이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를 느낀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대중없이 도약을 한 이도하는 뇌운뿐인 것 같은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거친 벽에 쾅! 부딪쳤다. 동시에 콰직! 무형의 힘이 그를 덮쳤다. 미리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이었다.

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깜빡인다. 일그러지고 녹은 시야가 흔들리며 원래 그가 보고 있어야 할 시야가 점멸하듯 드러났다. 내려앉은 지붕, 무너지는 건물- 이도하는 어느 가정집에 처박힌 것이다. 다시 시야가 흔들렸다. 무너져 내려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린 주택과 벼락이 솟구치는 하늘이 뒤섞여 일그러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이도하가 머리를 털었다. 부스스하게 먼지가 잔뜩 흩어졌다. 포탄처럼 건물에 처박혀 집이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는데 먼지만 잔뜩 뒤집어썼지 몸에 생채기라고는 없었다. 머리가 좀 아찔할 정도로 열 받기만 했을 뿐.

그때 쐐애액-!! 순간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발톱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주변이 갈기갈기 분쇄됐다. 보이지 않는 충격에 강타당한 것은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쇄도하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바로 대응했으나, 정확히 그 반대쪽을 얻어맞은 이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뒤통수를 슬슬 문질렀다. 이도하가 아니었더라면 뒤통수가 얼얼한 게 아니라 몸이 반쪽으로 양분되었을 공격이었다. 물론 잘려나가진 않았지만 거대한 뿅망치로 후려 맞은 듯 얼얼하고, 무엇보다 기분이 참 더럽다.

그리고 그렇게 그를 죽여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쇄도한 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쐐액-!! 연속해서 공기가 찢어졌다. 수백 개의 칼날이 찢어발기듯 달려들었고 간간이 대포를 쏘듯 쾅! 원형의 충격파가 때려 박히기도 한다.

주변이 완전히 가루가 되는 와중에 이도하만 얄미울 정도로 멀쩡했다. 코트 자락이 찢어질 듯 펄럭이고 미친 듯이 나풀거리던 목도리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벗겨져 날아가다 분쇄 되어버렸다. 머리카락이 쉴 새 없이 나부끼며 개판으로 헝클어졌다.

머리칼 사이로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진짜 대단하네….”

이를 악문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베를린 전체가 다 박살 나도 상관없다?”

아니면 이미 다 박살 났다고 생각해서 저러는 건가. 이쯤이면 슬슬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가 됐는데. 파랗게 달아오른 섬광이 점점 더 옅어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공기가 진동하는 특유의 울림이 다시 주변을 채운다. 인식 오류, 중력, 공기, 그리고 아마도… 예지.

섬광이 다시 한번 달아올랐다. 그의 주변이 디지털 모자이크처럼 조각나기 시작했다. 암군의 발밑부터 번지듯 시작된 그것은 천천히 뻗어 나가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가 닿는 곳까지 모조리 뒤덮었다.

찾았다-

이도하가 사라졌다. 쾅! 허공에 나타난 그의 발밑으로 형성된 무형의 기운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이도하의 시야에는 다 녹아내려 뭐가 무엇인지도 구분할 수 없는 허공이었지만 크헉! 비명 소리가 터졌다. 그 순간, 일그러져 있던 시야가 싹 쓸려 사라졌다. 이도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뚝 선 기둥, 월계관과 창을 들고 선 천사. 그 아래 누군가 짓눌려 있었다. 주변이 원형으로 움푹 파여 있다. 어두운 머리칼의 남자는 핏기라고는 없이 아주 창백했으며, 입가에 피가 잔뜩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면서 핏발 선 눈동자가 이도하를 새빨갛게 노려보았다.

벼락은 이제 그쳤지만 사위는 여전히 깜깜하고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고 사이렌 소리와 소방차, 구급차 소리가 시끄럽다. 전쟁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같았다. 이도하는 새빨갛게 절 노려보는 남자를 별 감흥 없이 응시하다가 사라졌다.

그가 나타난 곳은 이미 다 무너진 폐허 더미 사이였다. 웅장하게 서 있었을 거대한 암석 벽들이 시체처럼 허망하게 널브러진 자리. 이도하는 발에 걸리적거리는 철제 구조물을 발로 대충 치워냈다. 푸른색을 띤 말의 머리였다. 비슷한 것들이 주변으로 널려 있었다. 베를린의 가장 유명한 명소, 자유와 단결의 상징- 브란덴브루크 문이었다. 이제 잔해밖에 남지 않았지만.

“어떡합니까, 아까워서.”

이도하가 비아냥거렸다. 그의 앞에, 방금 전의 그 남자처럼 짓눌린 여자가 이도하를 찢어 죽일 듯 섬뜩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레타 랭이었다. 제 앞에 선 이도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서 소리 없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도하는 별 힘든 기색도 없었다. 숨조차도 흐트러져 있지 않다.

예지로도 대항할 수 없는 속도로 각기 다른 곳에 흩어져 있던 그녀의 팀원 다섯 명의 위치를 파악함과 동시에 제압해 놓고서도. 단신으로 도시 하나에 재앙을 내려놓고서. 그녀는 이도하에게 증오와 함께 두려움을 느꼈다.

<당신도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나라도! 당신 혼자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진짜 깬다.”

악에 받침 외침에, 이도하는 머리나 탈탈 털며 성의 없이 중얼거렸다. 정말 별로입니다. 제 말도 이렇게 들릴까. 이딴 생각이나 하는 이도하의 눈에서 천천히 섬광이 가라앉았다. 그레타 랭의 눈이 흔들렸다. 섬광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잿더미처럼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던 뇌운이 사라진다. 쨍한 햇볕이 그대로 투과되는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사위가 밝아졌다. 마음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사이렌 소리도 사라지고 새소리만 평화롭게 짹짹거린다. 텅 빈 동공을 드러낸 채 그녀 앞에 널브러져 있던 부러진 말머리도 사라졌다. 폐허도 사라지고, 불길도 사라졌다.

분명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내렸던 브란덴부르크 문이 햇살을 받으며 평소처럼 웅장하게 그곳에 서 있었다. 주변에 가득한 관광객들은 그녀가 늘 보아왔던 풍경처럼 사진을 찍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레타 랭이 넋을 놓고 독일어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이번엔 머릿속에 울리지 않았다. 특기를 사용할 정신조차 없는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바글바글한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피해갈 따름이었다.

모든 것이, 환상이었던 것이다.

아무렴. 그렇게 도시, 그것도 수도가 박살 나고 있는데 어느 나라가 대응조차 하지 않을까. 하기야, 누군들 오감을 모두 속이는 수준의 환상이 도시 단위로 펼쳐질 거라고 상상이나 할까.

“다행이죠?”

대박 크네.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해 고개를 꺾은 이도하가 눈 위로 손 지붕을 만들며 태연하게 물었다. 새까만 눈동자만 흘긋 그녀를 보았다. 그레타 랭이 멍하니 그를 보았다.

“집 부서진 건 당신들이 한 짓이니까 알아서 물어주든가 하고.”

그가 그레타 랭의 앞에 시선을 맞춰 앉았다. 그녀를 짓누르던 중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지만, 그레타 랭은 일어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환상이었지만, 다음에는 아닐 수도 있어요.”

“…….”

“내가 진짜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시험해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도하가 서늘하게 웃었다.

“개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우르슬라 데려와.”

이도하가 그대로 사라졌다. 꺅! 그제야 피투성이의 그녀를 인식한 주변에서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레타 랭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녀는 제 팀원들의 안위부터 확인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특기를 과하게 써 당분간 병원 신세를 지기는 해야겠지만.

저기, 괜찮아요? 주변에서 그렇게 물었고, 그레타 랭은 대충 손만 휘저었다. 그녀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투박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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