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06화 (106/250)

106화

“두 개 주세요. 두 개.”

이도하가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가게 주인이 그의 주변을 곁눈질했다. 어딜 봐도 혼자인데… 하는 눈치였으나 군말은 없다. 이도하는 가게 앞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잠시 제가 주문한 것이 나오길 기다렸다. 기다란 코트에 짧은 목도리까지 받쳐 입고 편안하게 앉아 이어폰을 낀 그는 가벼운 가방조차 하나 없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관광객이에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금발을 거의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자애였다. 서양인들이 본래 제 나이보다 좀 더 들어 보이는 편이라는데, 두꺼운 털실로 짠 빨간 비니를 쓴 이 애는 이도하의 또래가 분명했다. 그는 나이 같은 건 짐작할 줄 모르지만 느낌이 그랬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친구 셋과 함께 이도하를 보며 까르륵까르륵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나머지 친구 셋은 지금 저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신나 하고 있고. 이도하는 관리가 아주 잘 된 듯 찰랑거리는 금발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아니요, 누구 찾으러 왔어요. 이렇게 말하는 대신 이도하는 간단하게 고개를 저었다. 듣기평가 한 세월이 있어 영어로 듣기는 좀 해도 말하기는 영 안 된다. 그래도 이건 쉽다.

<나 게이예요.>

<꺅!>

이도하게에 말을 걸었던 여자애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인사밖에 하지 않았는데 다짜고짜 못을 박아버리는 이도하의 무례함에 화가 났다기보다는 아주 신이 나 보였다. 고마워요! 깔깔깔 웃은 여자애가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꺄아악! 그 무리에서도 비명 소리가 터졌다. 방방 뛰며 서로 손뼉까지 친 소녀들은 누가 봐도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

때마침 나온 커리부어스트를 양손에 받아든 이도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게이라는 게 고마울 일인가. 일회용 포크를 든 이도하는 매콤한 소스가 부어진 소시지를 통째로 입 안에 욱여넣다가 황급히 뱉어냈다.

“와, 씨. 뜨거워!”

-조심해야지.

“배고파 죽겠어.”

툴툴거리며 이도하는 성의 없이 뿌려진 마요네즈를 대충 섞어 감자튀김부터 입에 밀어 넣었다. 짠맛과 고소한 맛이 입 안에서 바삭바삭한 감자와 어우러졌다. 감자도 속이 뜨거웠으나 마요네즈가 버무려져 입이 데일 정도는 아니었다. 순식간에 감자튀김을 해치운 이도하가 소시지를 후후 불며 나머지 한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기를 하도 써댔더니. 이게 찔끔찔끔 썼다고 우습게 볼 게 아니네.”

큰돈 한 번 쓰는 것보다 치킨 몇 번 사 먹는 게 더 무섭다더니 딱 그 짝이다. 이도하가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는 눈 깜짝할 새에 비어버린 접시로 나머지 접시에 받쳐 들며 바쁘게 걸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꼽고, 나머지 한 손에는 커리부어스트 종이 접시를 든 채 볼을 우물거리며 인파 속을 바쁘게 걷는 그를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나 작업 걸렸어.”

-작업?

“그런 거 있잖아, 그쪽 괜찮아 보이는데, 같이 놀래요?”

관광객이세요? 여자애는 그렇게밖에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도하는 뻔뻔하게 과장했다. 저가 영어를 조금만 잘했어도 거기까지 갔을지도 모르니까.

-해서?

시오한이 물었다. 그때 탁,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친 이도하가 휘청였다. 간신히 손에 받쳐 든 커리부어스트를 사수한 이도하가 죄송합니다, 짧게 사과했다. 상대 쪽도 마찬가지였다. 평일 대낮의 베를린 거리에는 관광객도 많았고, 현지인도 많았다. 그리고 모두가 바빴다. 이도하는 다시 바쁘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몇 가서 그 걸음은 서서히 느려졌다. 마침내 멈춰 선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았다.

“금발이더라.”

그가 제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짙은 회색 코트에 감싸인 어깨는 누가 봐도 멀쩡해 보였다. 그는 이미 남자가 사라진 인파 속을 다시 한 번 보았다가, 삐딱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이도하는 그 잠깐 걷는 사이에 이미 꽤 식은 소시지를 하나 더 욱여넣으며 태연하게 걸었다.

-금발이라… 나보다 예뻤어?

시오한이 늘 그렇듯 느리고 부드러운 말투였다. 누가 봐도 뭔 일 치르겠구나, 하는 얼굴이던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해 보라고 한 말이기는 하지만 정말 이렇게 대놓고 해 주면 어떡하냐. 평상시와 아주 똑같은 목소리로 저렇게 옜다, 하듯 말하니 이도하는 그 얼굴이 어떨지 아주 궁금했다.

“그랬으면 고민 좀 해 봤을 텐데, 아쉽게도.”

-다행이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대가 고민할 일은 없겠어.

“맙소사.”

횡단보도를 건너던 이도하가 또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고 말았다.

“당신 거울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 없다며?”

-그대가 날 예뻐라 하잖아?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내가 당신을 예뻐라….”

이도하가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저런 식으로 말하니 아주 묘하게 들렸다.

-아니야?

“아, 물론 그렇긴 하지.”

이도하가 웃음기를 머금고 대답했다. 아니야? 하고 물어보는 시오한이 조금 뚱한 것 같이 들려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키가 낮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그는 나무가 아주 많은 곳에 도착했다. 풀이 아주 잘 다듬어져 있고 한적한 그곳은 꼭 공원 같았으나, 나무 사이로 가지각색이 비석이 누워 있었다. 묘지였다. 이도하는 잘 정리된 길을 벗어나 수풀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치만 누구라도 그렇잖아. 당신을 예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이런, 화이람. 그럴 리가 있겠어.

시오한이 대답했다.

-그대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날 예뻐해?

“당신이 너무… 아.”

이도하가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이미 나머지 커리부어스트 하나까지 싹 비워낸 그는 종이 접시를 구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레기통이 없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어이구야, 많이도 왔다.”

이도하가 공중으로 쓰레기를 던졌다. 바닥에 떨어져야 할 것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순간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도하는 손을 탁탁 털더니 흘끗, 앞을 응시하며 어깨도 툭, 털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어깨였는데 모래 같은 것이 부스스 떨어졌다. 햇빛에 닿을 때마다 반짝거리는 게 부서진 무언가의 조각 같기도 했다.

“특별 수사국 아니랄까 봐, 사람 참 잘 알아보네.”

이어폰을 고쳐 끼며 이도하가 느긋하게 말했다.

“나 추적해서 뭐하려고요?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우르슬라 만나게 해 주면 얌전히 협조해주겠다니까?”

<그녀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것부터 얘기해 보기로 한 것 같습니다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던 허공에서 연기가 퍼지듯 스르륵 여자의 형상이 나타났다. 구불구불한 금발에 머리 뿌리가 까맣게 올라온 여자였다. 키가 이도하와 비슷해 보일 정도로 컸으며, 나이는 이도하의 어머니와 비슷해 보였다. 긴 코트 주머니에 손을 꼽은 여자는 그 용맹한 신은호라도 딸꾹질 한 번은 할 것처럼 위압적인 인상이었다.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여자가 말하는 독일어는 귀로 들리고, 그 의미는 한국어로 머리에서 울린다. 같은 통역 특기라도 지난 재난 현장에서 겪었던 케이시 윌리엄스의 특기와는 다른 종류인 것이다. 이드로의 단장인 케이시 윌리엄스의 특기가 당연히 오십만 배는 더 편하다. 이건 머리도 울리는 데다 헷갈리고, 무엇보다 이제 겨우 이어폰이라는 꼼수를 사용해 익숙해진 시오한과의 대화에 아주 방해가 되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그렇다고 나도 이미 얘기한 것 같고, 안 그래요?”

<무엇을?>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여자- 독일 특별 수사국의 그레타 랭의 통역 특기는 마치 AI가 통역하는 것처럼 말투가 아주 딱딱했는데, 심지어 그녀는 목소리도 낮고 고저가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무슨 쇄국 정책처럼 아주 꽉꽉 막혀서 이도하는 이 여자와 말을 나눌 때마다 복장이 들썩들썩했다. 저도 바라는 게 있어 좀 참고 있었는데 이제 슬슬 깔딱 뒤집힐 것 같다.

“아, 시오한.”

이도하가 한탄하듯 그를 불렀다. 투정과 비슷했다. 옅은 웃음소리가 나더니 시오한이 말했다.

-누가 내 화이람을 자꾸 화나게 할까.

이도하가 픽 웃었다. 아, 이게 참 시도 때도 없이 이렇게 웃음이 인다. 입가를 매만지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어떡할까?”

-능력을 잘 파악해,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도 정말 그의 의견을 물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오한도 말릴 생각 같은 건 눈곱만큼도 없어 보인다. 이도하가 슥 눈동자를 굴렸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옅게 인상을 쓴 그레타 랭을 흘끗 보았다. 다중발현 특기자, 연기로 흩어지는 그녀의 특기는 도약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고….

-그대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능력을 가진 이가 하나 이상 있을 거야. 애초에 그대와 맞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니. 다만 그대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기는 할 테지. 그대를 상대로 어디까지 막아설 수 있는지도 알고 싶을 테고.

<국장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총리께서도.>

“날 뭘 믿고?”

하여간 여기나 저기나 착각은… 주머니에서 손을 뺀 이도하가 삐딱하게 웃었다. 국가 원수를 만나게 해 주는데 아무렴 옜다, 가서 봐라 하고 데려다줄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묶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런 걸 수락하는 조건으로 일단 국장이니 총리이 윗분들을 만나봐라, 일단 들어보고, 그러고 나면 우르슬라를 만나게 해 주겠다. 뭐 이런 것이다.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이도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허락도 없이 넘어와 억지를 쓴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그녀를 만나게 해 주는 건 내 권한도 아닙니다. 우선 조건을 들어보십시오.>

“이봐요, 그쪽은 안 궁금해요?”

이도하가 딴소리를 했다.

“우르슬라가 왜 그렇게 꽁꽁 숨어 버렸는지. 내 나라는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난리인데, 그쪽 나라는 왜 인소더블을 감추기에 급급한지.”

우웅- 이명이 울렸다. 새파랗게 물든 이도하의 눈동자를 본 그레타 랭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 시간을 돌려 죽은 사람을 살려내 본 적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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