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끼익,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최준원이 고개를 드는 순간 방금 그의 앞에 앉은 사람이 손에 들려 있던 책을 쑥 빼갔다. 눈앞의 상대를 확인한 최준원이 텅 빈 손을 잼잼하며 황당한 얼굴을 했다.
“팔자 좋네요. 평일 대낮에 카페에서 이렇게 책이나 보고. 좋겠다, 재벌 3세.”
원서로 된 책을 성의 없이 몇 번 뒤집어 본 김윤혜가 다시 책을 돌려주었다. 거의 던지는 것에 가까웠다. 얼결에 책을 받은 최준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김윤혜의 말처럼 아침에 가까운 평일 대낮이라 넓은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둘을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고, 김윤혜가 착각해서 자리를 잘못 앉았을 가능성도 없었다. 최준원이 슬그머니 웃더니 물었다.
“나 찾아온 거예요?”
“모르는 척 하지 말죠, 피차 안 좋은 일 있었던 사이에. 나 기억나죠? 여기.”
팔짱을 낀 김윤혜가 고개를 까딱였다. 쉽사리 잊을만한 기억은 아닐 텐데. 이 카페는 김윤혜와 이도하가 주꾸미를 먹은 뒤 커피를 마시러 왔다가 난데없이 시비가 걸렸던 바로 그 카페였다. 이성 그룹의 3세 이규원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멍청한 짓’을 했던 곳.
아주 전국구로 중계되었던 일이고, 이도하에게 시비를 걸었던 이규원이 뭇매를 맞다 결국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게 되었었다. 생각해 보면 계약자가 되고도 비교적 조용했던 이도하의 인생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끄러워졌다.
“기억나죠.”
최준원이 말했다. 팔짱을 끼고 아주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김윤혜에 비해 턱을 괸 것이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나 원래도 여기 자주 와요.”
김윤혜가 말했다. 이렇게 만난 건 우연이라는 뜻이다. 누가 물어봤나, 최준원은 그런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상냥하게 말했다.
“그래요? 고맙네.”
“그쪽이 왜요.”
“여기 내 카페거든요.”
“염병할.”
김윤혜의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여태 여긴 그냥 유명한 카페였다. 깔끔하고 예쁜 인테리어와 넓은 내부가 sns 등지에서 유명했고, 음료도 디저트도 전부 맛있었다. 주변에 카페가 별로 없는 아이라에서 그나마 가까운 카페이기도 했고, 그래서 드나드는 유명 계약자나 특기자들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변에 나무뿐인 한적한 곳에 카페만 있으니 어느 돈 많은 계약자가 차린 것이다, 하는 소문은 들었는데 돈 많고 재수 없는 재벌 3세 카페인 줄은 몰랐다. 그래서 자주 왔구나. 지 거라서. 당연히 최준원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왔던 김윤혜는 혀를 찼다.
“자기 카펜데 친구가 그 행패를 부리게 놔둬요?”
“등신을 누가 말리겠어요. 그리고 그 뒤에 돈도 받아서.”
행패 부린 값. 두둑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최준원은 엄지와 검지로 동그랗게 만 손을 흔들었다.
“무릎 꿇고 울며불며하더니 교훈은 좀 얻었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잖아요. 그보다 이렇게 나와 있어도 돼요?”
최준원이 물었다.
“이도하 담당 연구원인 걸로 알고 있는데. 요즘 바쁘지 않나, 해서. 보통 이럴 때 불똥이 주변으로 튀잖아요.”
“담당 특기자가 없는데 한가하죠. 내가 이도하씨 담당 연구원인 거 어떻게 알아요?”
“‘함께 있던 이모 씨의 지인은 담당 연구원으로, 올해 19살의 미성년자라 더더욱 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최준원이 태연하게 말했다. 당시에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던 비슷한 류의 뉴스 기사 중 한 줄일 테였다.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걸요. 이도하씨만 보다 보니 본인은 별로 안 유명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관심이 없는 거죠.”
칼 같은 대답에 최준원이 더욱 깊이 웃었다. 서글서글해 호감을 많이 받았을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나한테는 관심 있고요?”
“내 취향 아니에요. 개상은 별로라.”
김윤혜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개상… 낯설면서도 알 것 같은 단어에 최준원이 황당해하는 사이에 김윤혜가 물었다.
“특기자죠?”
“오.”
최준원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내렸다. 테이블에 좀 더 몸을 기울이며 그가 대답했다.
“맞아요.”
“이규원은 아니고.”
“아니죠.”
“약도 하고?”
“난 안 하고.”
김윤혜는 가만히 최준원을 응시했다. 대놓고 관찰을 하듯 빤한 시선에도 그는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윤혜를 마주 응시하고 있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특기자도 아니고, 본인은 안 하는 약도 하고, 등신이고, 근데 왜 같이 놀지?”
“그런 인간들이 써먹기에는 딱이거든요.”
“어디에다가?”
“어디든.”
최준원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난데없이 찾아와서 찬바람만 쌩쌩 부는 스무고개를 하듯 질문만 쏟아내는데도 싫은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아주 재미있어 보였다.
“원래 누굴 그렇게 잘 써먹어요?”
“필요하다면 그런 편이죠.”
“개자식이네.”
“와.”
평온하고 가감 없는 욕설에 최준원이 유쾌하게 감탄하더니 말했다.
“나 나쁜 사람 아니에요.”
“내가 9살로 보여요?”
“정말인데. 이렇게 물어보는 것도 솔직히 다 대답해 주고, 나쁜 놈들 잡는 것도 도와줬으니 이 정도면 좋은 사람 아닌가요?”
김윤혜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최준원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말에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그가 한 일이 결과적으로는 좋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계약 양도 실험을 진행하던 현장에 이도하를 소환시켜, 꽤 많은 준비를 들였을 그 모든 일들이 단숨에 모조리 절단나게 만들었으니. 광활한 이리스티리움 땅에서 이제 두 번 다시는 그런 시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뱀이 뱀을 먹어봤자 뱀이지.”
다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세상이 믿음직하지 않아 문제지. 속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알 게 뭔가. 애초에 멋대로 사람을 이용해 먹은 것이기도 하고.
“뱀이 나빠요?”
“사회적인 이미지 몰라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최준원에게 김윤혜가 싸늘하게 대꾸했다. 사탄의 화신, 교활함과 사악의 상징, 해악, 기만. 보통 뱀이라고 하면 그런 것들을 일컫기 마련이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당장 뱀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는 징그러워하며 기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닐 텐데 최준원은 당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말했다.
“부활, 영원, 무한, 지혜의 상징?”
“…….”
“아니, 사회적이라는 게 워낙 상대적이니까. 관점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난 뱀 귀엽거든요.”
진짜 얄밉다. 이도하도 사람 뒷목 잡게 하는 재주가 상당하지만, 이 남자는 그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았다. 둘이 만났으면 아주 볼만했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저 매끈한 얼굴에 주먹 한 대만 날려버리면 딱 좋겠다고 김윤혜는 생각했다.
“그럼 나쁜 놈은 누군데요?”
“아, 너무 많지 나쁜 놈.”
진짜 너무 많아, 최준원이 휴대폰을 들며 한탄했다. 진심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김윤혜가 인내심을 가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그가 김윤혜의 메일 주소를 물었다. 최준원은 김윤혜가 불러주는 대로 경쾌하게 손을 놀렸다.
“나쁜 놈 하나 보냈어요, 구워 먹을지 삶아 먹을지 기대할게요. 요리 좀 하죠?”
“더럽게 못 하는데요.”
“그럼 더 재밌겠네.”
탁, 최준원이 핸드폰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김윤혜의 시선이 그 핸드폰을 따라갔다가, 다시 최준원을 바라보았다. 그가 빙그레 웃었다. 김윤혜가 눈을 찌푸렸다. 잠깐이지만 이제껏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진짜 같은 모습이었다.
“김윤혜양 주시하고 있는 시선이 많은 거, 알아요? 몸조심해요. 다치지 말고.”
“주승현 알아요?”
김윤혜가 기습적으로 물었다.
“음.”
“개인적으로 아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알죠. 재벌 3세쯤 되면 싫어도 인맥이 굉장해지거든요.”
“그쪽이랑 같은 패거리예요?”
“패거리….”
험악한 단어 선택에 최준원이 황당하게 웃었다. 너무 직접적인 질문에 황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윤혜는 표정도 없이 창끝처럼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보낸 나쁜 놈이 주승현은 아니에요.”
모호한 대답이었다.
“이유가 뭐예요?”
김윤혜가 또 물었다. 최준원의 대답처럼 주어도 없이 모호한 질문이었다. 주승현을 아느냐고 했던 이전의 질문에 대한 네 대답 따위 뭐든 이젠 관심도 없다는 태도였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죠. 나쁜 놈들 잡는 이유가 다 그렇듯이.”
“뱀은 상대적이라더니?”
김윤혜가 말꼬리를 잡았다. 최준원이 지긋이 눈웃음 지었다. 그가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천천히 손을 뻗어 김윤혜의 손을 쥐었다. 김윤혜는 꿈쩍도 않고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김윤혜보다 좀 더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가락 끝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어떤 차가운 것이 김윤혜의 손바닥에 닿았다.
“‘우리’한텐 아니에요.”
“우리?”
“우리. 세상이 원래 보이는 거랑 좀 다르거든요. 잘 생각해 봐요, 똑똑한 친구.”
김윤혜의 손을 다시 쥐여 준 그가 매끄럽게 책과 핸드폰을 챙겨 일어났다. 그때처럼 찡긋, 윙크한 그는 구겨지는 김윤혜의 표정에 폭소를 터트리며 유유히 카페를 떠났다.
“졸라 재수없네 진짜….”
혼자 남은 김윤혜가 손바닥을 펴보았다. 은색의 원형 통 같은 것이었다. 이게 뭐야. 김윤혜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생긴 건 꼭 립스틱이나 마스카라 같았다.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본 뒤에도 모르겠어서 김윤혜는 아예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검색했다.
호신용 미니 후추 스프레이(강력!)
“진짜 또라이 아니야.”
탁자 위에 스프레이를 탁, 집어던진 김윤혜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핸드폰에 연결하고, 재생 버튼을 누른다.
녹음0008
20분 남짓의 짧은 대화였다. 김윤혜는 그 짧은 대화를 여러 번에 걸쳐 아주 꼼꼼히 들었다. 김윤혜가 이어폰을 빼 내려놓았을 때에는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들판에 건물도 없이 온통 나무뿐이라 그 사이사이로 노을이 진득하게 가라앉는 게 그림 같다.
김윤혜는 영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하여 그 노을이 까무잡잡한 밤이 될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김윤혜가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최준원이 보냈다는 파일을 확인한 김윤혜가 얼굴을 구겼다.
“미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