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오한울은 근래에 한동안 어디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더라, 이도하와 싸웠다더라,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했지만 그중에 오한울의 계약주가 죽었다는 소문은 없었다. 벌써 꽤 되었는데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면 이건 아이라에서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오한울의 계약주가 반군이며, 또 ‘계약 양도’ 실험과 밀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 모르겠어요. 별말 없던데…?”
이도하의 질문에 당황한 듯하던 유세오가 기억을 더듬더니 대답했다. 이도하는 유세오 역시 오한울의 계약자가 반군이었기 때문에 죽었다고만 알고 있을 뿐, 자세한 내막은 모른다는 걸 확신했다.
그게 좋다.
특기자, 계약자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아이라 내부에서도 누가 적이고 누가 아닌지 알 수 없는 지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게….
“혹시 누가 뭐 물어보면 무조건 모른다고 해.”
“뭘 모른다고 해요?”
“그냥 다 모른다고 해.”
유세오가 미간을 좁혔다. 그건 모른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모르는 거 아닌가,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오즈와 이 세계 간에 정말 뭔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닌가 궁금할 법도 할 텐데, 아무것도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오즈 가게 되면 당분간은 그냥 거기 있어. 최대한 오래.”
유세오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그를 지켜보는 이도하는 묻지 않아도 지금 그 속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서울 것이다. 가까운 형의 계약주가 죽는 모습을 직접 지켜봐야 했으며, 그 일 뒤에 숨은 무언가가 지척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저는 영문을 모르고 있으니. 한숨을 삼킨 이도하가 유세오의 조그만 머리 위에 손을 얹었다. 말없이 슥슥 문질러주자 그가 맥없이 하하 웃었다.
“밥 많이 먹어야겠네요.”
“밥?”
“그래야 오래 있죠.”
이게 무슨 소리람. 이도하가 눈만 깜빡거리자 유세오가 의아하게 그를 보았다.
“형 몰라요?”
“뭘?”
“오즈에서 뭘 먹으면 소환을 조금 더 오래 유지할 수 있어요. 그 세계의 일부분이 삽입된다고 인식돼서, 이름을 통해 마력으로 그냥 눌러앉히는 것보다 부담이 조금 덜하대요. 한계는 있지만 그래도 제법 효과 있어요.”
“…….”
그래서였구나.
‘밥 먹자.’
‘뭘 좀 먹겠어?’
‘맛있어?’
“은근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긴 한데… 형?”
유세오가 멍해 보이는 이도하를 불렀다.
“아니야. 아무튼 그렇게 하고, 너 저번에 너튜브 한다고 했지.”
“그렇죠.”
“부탁 하나만 하자. 조회수 대박 나게 해줄게.”
“네? 형 나오게요?”
그동안 몇 번 제 채널에 한 번만 나와 주면 안 되냐고 조르던 유세오는 이 때아닌 요청에 어리둥절해졌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어, 라이브로 좀 찍어줘.”
“라이브…?”
웬 라이브? 나와 주면 물론 매우 좋긴 하지만 지금 그럴 분위기가 아닌 것 같은데… 하던 유세오는 방금 전 이도하와 양복을 입은 또 다른 어른 남자의 대화에 생각이 미쳤다. 마침내 이해한 유세오가 억! 입을 벌렸다.
***
<라이브> 이도하 최초 기자회견, 뒷모습 단독 공개!
에벨레 - 뭐야 이거 실화냐
dkdlel - 무슨 기자회견??이모형 기자회견 함??? 그걸 유세오가 찍음????
세오좋아19 - 헐 대박
오레오세오 - 세오야ㅠㅠ 이런 거 왜 해ㅠㅠ걱정된다ㅠㅠ
rnlcksk - 와 레알 이도하다 졸라 잘생겼네 진짜
닭갈비 - 진짜 뭐가 있긴 있나 보다 생전 이런 거 안 하던 이도하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휴지말이 - 난 다 모른다고 발뺌한다에 에어컨 리모콘을 건다ㅋㅋㅋㅋ
XTNT - 뭐지 졸라 떨린다 제발 인성질 아니길
LJD - ㅆㅂ 내 세금 어떻게 되는 건데
도랑앵무 - 그래서 몇 시에 하는 거임 인터뷰 좀 따봐라 유세오
아이시또르- 천하의 이도하도 고소크리 먹으니까 기어나오네 ㅋㅋㅋ 역시 인생은실전
직박구리 - 오 가까이 온다 시발 오오오
주주 - 목소리 개발린다 시발 다 가졌네
김수 - 와
제주도수 - 와 와와
dopyeong - 웃는거 개미쳤다 실화냐 진짜
올랑 - 존나 여유로운데?
댕댕 - 간다간다간다
“많이들 오셨네요.”
드르륵- 자리를 빼 앉으며 이도하가 말했다. 급한 대로 회사 곳곳의 테이블과 의자를 모조리 공수해 마련한 로비의 임시 기자회견장은 아주 조금만 비틀거려도 옆 사람의 발을 밟을 정도로 아주 꽉 차 있었다. 무자비하게 터지는 플래시에 이도하의 형상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었다. 엄청난 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은 광경이었으나, 정작 그는 평범한 무지 티에 조금 두꺼운 카디건 하나 걸친 차림이었다.
물론 이도하가 앞으로 어떤 대형 폭탄을 터트릴지 조금이나마 아는 더 브릿지의 관계자들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이도하에게 대본이라도 쥐여 줘보려고 하다 처참하게 실패한 참이었다.
중무장을 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에게는 이도하는 지금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 그가 저 맹렬한 기자 떼 앞으로 걸어 들어간 순간, 그들은 이제 저 한 치 앞도 모르는 기자들을 걱정해야 할지, 이도하를 걱정해야 할지, 제 자신들을 걱정해야 할지 알 수도 없어진 상태였다.
연신 터지는 플래시에 미미하게 눈을 찌푸린 이도하가 마이크의 고개를 조금 내렸다. 테이블에 기대며 몸을 기울인 그가 입을 달싹이는 순간 사위가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무언가 말하려나 하던 이도하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브릿지의 관계자들 틈에 선 유세오가 그를 향해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것이 요상하게 일그러져 웃기다. 핸드폰의 까만 렌즈가 눈알처럼 반질반질하게 그를 바라본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똑똑하게 구는 게 좋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영악하게 구는 게 더 이롭다는 것도.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안다.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까만 핸드폰의 카메라 렌즈를 바라본 이도하가 픽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웅- 마이크를 타고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기자님들 할 말 많으실 것 같은데, 저도 할 말 많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렀고…. 보면 아시겠지만 저 대본 같은 것도 없거든요. 터놓고 솔직하게 말하겠다는 뜻입니다. 저 할 말 하고, 기자님들 할 말 하고, 대화처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니까 바로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이도하가 말했다.
“자꾸 이딴 식으로 짜증 나게 굴면 은퇴할 겁니다.”
회견장이 삽시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원래도 조용했지만 타이핑 소리, 카메라를 만지는 소리, 물건을 움직이는 소리, 작은 기침 소리 등 그래도 잡소리들이 가득했는데 이건 정말 귀신도 죽은 것처럼 조용했다. 다들 제각각으로 일관되게, 방금 이도하가 무슨 말을 했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들을 앞에 둔 이도하가 보기에는 그냥 멍청한 얼굴이라, 또 비식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 순간 다시 미친 듯이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온갖 목소리들도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정말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엄청났다. 손을 들고 외치는 사람도 있고, 벌떡 일어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이어폰에 대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하여간 다양하게 난리다. 개중에 부모 죽인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도하는 아예 턱을 괴고 한가하게 그 모습을 구경하다가, 다시 마이크에 입을 대고 말했다.
“빌딩 무너진 건 내 탓 아니고, 사망자가 나온 건 안타깝지만 그 역시 내 책임 아니고, 그래서 고소도 내 알 바 아닙니다. 오즈에서 내가 내 계약주와 뭘 하든 그건 여러분이 알 바 아니겠죠. 12살짜리 아동 폭행한 적도 없습니다. 당하면 내가 당했지.”
“죄책감도 없습니까?!”
누군가 버럭 소리쳤다. 비슷하게 외치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그 모든 고함 소리를 뚫을 만큼 엄청난 성량이었다. 이도하가 벌떡 일어선 그를 바라보았다. 양복, 넥타이, 길에서 한 번쯤은 마주칠 것 같은 회사원의 정석이다. 사십에서 오십 줄쯤 된 것 같고… 목에 건 명찰을 보니 세 손가락 안에 든다 하는 거대 방송사 소속에 지위도 꽤 높다.
“동정, 연민, 그런 거 말고 죄책감이요?”
“당신 때문에 사람이 죽었는데!”
이도하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이철용 기자님, 그럼 기자님은요. 죄책감 없습니까?”
“무슨 죄책감!”
“당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죄책감이요.”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요. 내 말이 그 말이거든요.”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냐는 뜻이다. 그때 다른 누군가 또 버럭 외쳤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잖아!”
“아, ETS 김석호 기자님? 기자님도 마음만 먹으면 지금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아주 많거든요. 가서 구하세요. 직접. 왜 여기 앉아있습니까. 보내드려요?”
이도하가 손을 까딱했다. 분기탱천해 벌떡 일어났던 김석호 기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풀썩 주저앉았다. 당연히 이도하는 시늉만 한 것이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변의 한심해하는 시선을 받은 김석호 기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게 참… 감사를 바라고 한 건 아니지만 어째 고맙다는 말은 없고, 다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네요. 그것도 방구석에 앉아서 구경만 한 사람들이.”
방구석에 앉아서. 그 표현에 잠시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물론 입만 조용하고 손은 아주 바빴다. 플래시가 또다시 맹렬하게 터졌고 저러다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키보드 소리가 이어졌다.
“여진이 본인 특기로 일어났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말입니까?”
또 다른 기자가 물었다.
“물만 떠냈는데 여진이 일어날 일이 뭐가 있어요. 밥그릇에서 티스푼으로 물 퍼낸다고 밥그릇이 흔들립니까?”
이도하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대량의 바닷물을 한 번에 내려 앉힌 충격이라는 의견도 있는데요!”
“그럼 열심히 해서 꼭 증명해 보길 바랍니다. 특기자도 아닌데 특기와 과학을 동시에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전문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그리고.”
그 발언은 비특기자 차별 발언입니까?! 누군가 외쳤고, 이도하는 무시했다. 그가 마이크를 잡았다.
“앞으로 재난 구조 안 하겠습니다. 이드로도 탈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