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달칵,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오한울의 말이 맞았다. 그는 다시는 오즈로 갈 수 없다. 더 할 말은 없었다. 오즈는 그에게 한때의 여행담처럼 남을 것이고 이제 모든 건 끝이었다.
끝.
“…쯧.”
혀를 찬 이도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었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속에 누가 끈적끈적한 시멘트를 확 들이부은 것 같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시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데, 아까부터 계속 주머니에서 진동하던 핸드폰이 또 난리다. 이도하가 거칠게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이참에 아주 부숴 버리든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화면에 뜬 이름이 그를 막았다.
김똘.
“왜-”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버럭- 김윤혜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이도하는 흠칫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트렸다가, 다시 가져다 댔다. 무슨 말인가 하려 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왜 전화를 안 받았는지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입을 열 틈도 없이 김윤혜가 말했다.
-찾았어요, 이도하씨.
“뭘?”
-이도하씨를 소환했다던 사형수, 그 사형수가 왜 이도하씨를 소환해냈는지 찾았다고요!
격앙된 목소리였다. 마침 방금 전에 그 일로 헛다리를 거하게 짚은 이도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김윤혜에게는 알고만 있으라고 한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녀가 이제 와서 찾아냈다며 전화를 한 건 크게 놀랍지 않았다. 알고만 있으라고 했다고 정말 가만히 있었으면 김윤혜가 아니다. 그러나 이미 시오한이 오즈에서 암군을 움직이고 있었으니 괜한 고생을 한 것 같긴 해, 이도하는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도하씨가 그랬잖아요, 판이 그렇게 벌여져 있는 마당에 왜 하필 이도하씨를 소환하는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어, 그랬지.”
이도하가 문을 열고 나갔다. 가엾은 김대용 변호사는 그때까지도 복도 한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손짓했다. 잠깐만 더 기다려 달라고. 아까 전보다 좀 더 공손해진 것 같은 김대용 변호사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데자뷰 안 와요? 이도하씨 앞에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멍청한 짓을 한 상황 말이에요.
“김윤혜씨, 나 지금 스무고개 할 시간이-”
말하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그런 기시감을 느낀 적이 있긴 했다. 언제였던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멍청한 짓을 한 상황이라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사건이 있었다. 잘 가라앉았던 침전물이 떠오르듯 지금 또다시 떠오르는 사건. 이도하 폭행- 조금 묘한 연관 검색어로 찾으면 아주 다각도로 영상이 찍혀 있는 그 일.
“그 재벌 새끼?”
-그 재벌 새끼 친구요!
“친구?”
재벌 새끼도 아니고 재벌 새끼 친구는 뭐야. 거기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한 번 찾아볼까 하며 주머니를 뒤지던 이도하는 곧 제가 바로 그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시오한과 애기하면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보는 일이 많아 헷갈렸다. 이도하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 말리던 놈?”
-도원 그룹 3세인데, 특기자예요. 다중발현 특기자요. 어쩐지 윙크 따윌 하더라니, 시발놈 진짜.
김윤혜는 무척 험악하게 말했으나, 이도하는 좀 혼란스러워졌다.
“김윤혜씨한테 윙크를 했다고?”
-모르겠어요? 정신 조작 계열 특기를 가진 거예요. 그 재벌 새끼가 이도하씨한테 시비를 걸도록 옆에서 부추긴 거라고요, 오즈에서 사형수가 이도하씨를 소환하도록 만든 것처럼!
“그걸 어떻게-”
-얼른 가서 조져 봐요.
“…….”
이도하는 잠시 아연해졌다. 저도 참지 않고 살기는 하는데, 김윤혜도 정말 만만치 않다 싶었다. 방금 전의 일이 없었다면 일단 한 번 잡고 볼까, 했을 게 분명해 더 아찔했다. 김윤혜가 허투루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만 조금 더 신중해진 이도하는 할 말을 찾았다.
-계약자예요, 이도하씨. 그런 식으로 단시간에 충동을 부추기고 망상에 빠지게 할 수 있는 건 계약자뿐인데, 내가 요 한 달간 우리나라 계약자들 신상명세를 다 뒤져봤는데도 없었다고요. 계약자가 아이라에 적을 올리지 않은 건 그게 아쉽지 않아서일 텐데, 솔직히 누가 그럴 수 있겠어요? 돈이 아쉽지 않은 재벌이 아니고서야. 그 새끼가 원래부터 수상쩍었다고요.
너도 좀 신중해지는 게 어떠냐, 하고 잔소리를 하려던 이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핸드폰을 화면을 바라보았다. 김똘똘이. 김또라이. 김똘. 중의적 의미로 붙인 별명이기는 하지만 이도하는 후자로 좀 더 생각하는 편이었다. 물론 전자도 진심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좀 놀랐다. 진짜 천재 맞구나. 증거도 자료도 없이 혼자서 궁리했을 김윤혜의 추론은 놀랍게도 시오한의 설명과 아주 흡사했다.
추론일 뿐이라 확신할 만한 제대로 된 근거는 없이 일단 가서 조져 봐라 식의 왈가닥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놀랍다.
“조져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맞는 것 같네.”
순간적인 분노는 방금 전의 일로 화르륵 타올랐다 꺼져 버리고, 잿더미처럼 가라앉은 이성만 남은 이도하가 차분하게 말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20대 초중반, 어쩌면 주변에서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완벽하게 부합하는 조건이었다. 죽기 전날, 사형수 웨이드가 술집에서 마주쳤던 계약자에 대해 들은 김윤혜는 분개했다.
-그 얘기를 왜 이제 해요?! 빼박이네!
“그래서 내가 일단 가만히 있으라고- 근데 김윤혜씨 뭘 했다고? 뭘 뒤져?”
계약자들 신상명세? 그런 게 오픈되어 있을 리가 없다. 이도하가 뒤늦게 기겁했다.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예요, 몰래 뒤졌지.
“너-”
버럭, 소리를 지르려던 이도하가 목소리를 낮췄다.
“너 미쳤어? 아이라 상부가 개입했다고 네가 그랬다?”
-안 그래도 아까 주승현 마주쳤어요.
“주승현?”
-아이라 집행 이사요.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주승현을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다. 기가 차서 물어본 거지. 세상일에 무관심한 이도하도 주승현은 안다. 우리나라에서 아이라 집행 이사가 선출됐다! 하며 한동안 참 떠들썩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를 뒤진 건데?”
-아이라 기록 서고요.
“기록 서고? 그런 게 있어? 계약자들 신상 명세가 그런데 있다고?”
고작? 그렇게 쉽게? 그 숨겨진 뉘앙스를 느낀 김윤혜가 이를 갈았다.
-조용히 해요. 난 오늘부터 해킹 배울 거니까. 디지털이 최고야.
뭐라는 거야…. 잠깐 어이없어하던 이도하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지금 디지털이 어쩌고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멀리서 김대용 변호사가 눈동자만 내려 시계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한껏 밝은 미소를 보이며 아무것도 아닌 척하긴 하지만 모르려야 모를 리가 없을 정도로 티가 났다.
“너 괜찮아? 주승현은 왜 거기 있었는데? 뭐래?”
-…별일 없었어요. 한지유 신상명세 찾으러 왔다고 둘러댔었는데….
“한지유?”
-사람을 시켜 그 애 신상명세를 보내줬네요.
‘앞으로는 허가받고 보는 걸로.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해요.’ 친절하게 쪽지까지 붙여 가지고. 김윤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별말 안 했다고? 한지유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
-이도하씨도 첫 발현이 꽃 피운 거였잖아요. 개나리 노래 부르다가 한여름 땡볕에 개나리 죄다 피게 만들었다고 하던데.
“난 공룡도 만들었어.”
정확히는 아동 도서에 나오던 가상의 메가 사우르스였다.
-어쨌든, 한지유는 고작 6살이었으니까 발전의 여지는 많았을 거예요. 순간적이었지만 꽤 그럴듯한 대응이었다고요.
“그래서 그 말을 주승현이 믿었다고?”
-…그거야 모르죠.
“김윤혜씨 지금 어딘데?”
-연구실이요.
“당장 나와. 일단 나와서-”
나와서 어디로 가라고 해야 하지? 만에 하나 주승현이 계약 양도 사건에 개입한 아이라의 인사 중 한 명이라면, 계약자들의 신상을 캐고 있던 것을 들킨 김윤혜는 어디로 가도 안전할 것 같지 않았다. 오즈에서도 이미 망설임 없이 꼬리를 다 끊어내던 이들이다. 이쪽에서라고 몸을 사린다는 장담은 없었다.
-아뇨, 이도하씨. 나 그럼 일단 최준원 한 번 만나보려고요.
“뭐?”
-이도하씨 말대로라면 최준원이 확실한 거잖아요. 그럼 지금 당장 조지는 게 아니라 일단 한 번 지켜볼래요.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주승현이 계약 양도 실험에 가담한 인사고, 그래서 당장 입막음을 하려고 했다면 한가하게 한지유 신상 명세나 보내주고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김윤혜씨.”
-우리도 팀 플레이하자고요. 우린 지금 누가 적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핸드폰에 GPS 깔아라.”
잠시 후 이도하가 말했다. 김윤혜가 투덜거렸다.
-나도 내 몸 귀한 거 알거든요. 혹시라도 SOS 치면 1초 만에 튀어 와요.
“아무렴.”
이도하는 몇 마디 더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한 말이 될 것 같았다. 때마침 김대용 변호사가 별로 좋지 않은 표정으로 황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둘은 별 인사도 없이 그냥 전화를 끊었다.
“이것 좀 보셔야겠습니다.”
그가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기서 뭐 더 일어날 일이 있나, 하고 들여다본 이도하가 허,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단독> 리스트 빌딩 붕괴 사고 사망자 유족, 붕괴에 인소더블 책임 묻겠다 밝혀…
“책임?”
“살인죄로 고소했다고 합니다.”
이도하는 실소밖에 안 나왔는데, 김대용 변호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붕괴를 못, 아니 안 막았으니 내 책임이다?”
“결정적인 붕괴를 일으켰던 여진 자체가 그날 바다를 내려놓은 이도하씨의 특기에 의한 여파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그로가 참 참신하네요.”
이도하가 이죽거렸다.
“물론 입증하기 어려울 겁니다.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요. 하지만 지금 여론이-”
“형!”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외침에 김대용 변호사와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사색이 된 유세오가 단숨에 달려와 이도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형, 아까 한울 형은-”
급하게 말을 하려던 유세오가 멈칫하더니 김대용 변호사의 눈치를 봤다. 마침 김대용 변호사는 정말로 유세오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는데, 도리어 유세오가 그에게 눈치를 주자 두 사람은 아예 이도하를 보았다. 서로 급한 일이니까 이 사람, 혹은 이 애 좀 잠깐 보내라, 하는 눈치였다. 이도하가 말했다.
“한 시간 뒤에 하죠.”
“예?”
“이런 기사까지 터진 마당에 굳이 부를 것도 없이 여기로 다 몰려들고 있을 것 같은데요.”
김대용 변호사는 할 말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지만 이도하가 여기 있다는 건 모두가 알 것이고, 곧 이 사옥 앞은 조각난 사탕 위로 몰려든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해진다, 에 그는 제 귀중한 집도 걸 수 있었다. 그러니 정말 모으고 부르고 할 필요도 없었다.
“대관 필요 없이 그냥 로비에서 하고, 마이크 뭐 대충 있는 거 쓰거나 제가 특기 쓰면 되니까요. 한 시간 가능하시겠죠?”
이렇게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김대용 변호사는 예, 그럼요, 하고 그 정해진 답을 내놓았다. 답을 듣자마자 이도하는 유세오에게 돌아섰다.
“형, 한울 형은-”
“알아. 들었어.”
이도하가 말을 잘랐다. 그는 방금 전 오한울과 있었던 그 방으로 유세오를 끌고 들어왔다.
“너 알고 있었어?”
“한울 형 계약주 일이요? 그럼요, 형이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이리나가 궁성기사단장이니까요.”
유세오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유세오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잠깐 봤을 뿐이지만, 이도하는 유세오를 대하던 이리나 소버스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유세오도 오즈에 가서 제가 하는 일은 별로 없고, 늘 놀고먹으며 흔히들 말하는 ‘오캉스’를 즐긴다고 했다.
“너… 봤어?”
유세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한울 형이… 계약주를 데리고 찾아왔었어요, 도와달라고.”
“뭐?”
“이리나가 안 된다고 해도 나는 살리고 싶었는데… 그때는 이미 제가 도와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어요. 그래서….”
미친놈. 아무리 급하다고 하기로서니 애한테 찾아가냐. 그것도 궁정시가단장을 계약주로 둔 애한테. 그러나 정작 속으로 그렇게 욕설을 뇌까리면서도 이도하는 사실, 저 깊은 마음속으로는 그를 이해하고 말았다.
“저는 한울 형 계약주가 반군인 것도 몰랐어요. 한 번도 보여주질 않아서 만날 섭섭하다고만 했는데….”
고개를 떨어트린 유세오가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이도하는 노려보듯 그 작고 동그란 머리통을 쳐다보다 물었다.
“아이라에서도 알아?”
“한울 형 계약주가 주… 죽었는데 당연히 알죠. 아이라에서 이리스티리움 동태에 예민하잖아요.”
“말고, 네가 그걸 아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