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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01화 (101/250)

101화

이도하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군거리며 난간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이 아쉬운 얼굴을 하며 하나둘씩 흩어지고 있었다. 위화감 같은 건 없었다. 마치 복도에서 금방이라도 싸움을 하려던 이도하와 오한울이 주변의 눈치를 보고 어딘가로 들어간 것을 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과연.”

이도하가 오한울을 보았다.

“잘하네, 조작.”

“……”

눈에 핏발이 선 오한울이 이도하를 노려보았다. 탁-! 이도하에게 잡힌 팔을 거칠게 털어낸 오한울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그 모양이 꼭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다 중심을 잡은 사람 같다. 불안하게 둘을 지켜보던 유세오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형!”

“괜찮아.”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키도 멀대 같고 연예인답게 몸도 짱짱한 인간이 웬 병약한 척인가 했으나, 가만 보니 오한울은 정말 안색이 창백했다. 눈이 벌게 더 아파 보이기도 했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열 좀 받고 충격을 먹었다고 갑자기 저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너 먼저 들어가 있어.”

오한울이 유세오를 밀었고, 이도하도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유세오는 영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미적거리다 결국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떴다. 따개비처럼 다른 층 난간에 붙어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었고, 복도에 남은 몇몇이 어느 한 문을 힐끔거리다 자리를 떴다. 이도하가 실소했다.

“우리가 저기로 들어간 줄 아는 모양이지?”

오한울이 대답 없이 그 문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린 채로 남겨두었고, 그건 그더러 따라 들어오란 뜻이었다. 저 문을 그냥 확 부숴버릴까 하는 충동이 잠시 일었으나,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어른 이도하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선 이도하가 달칵, 문을 닫았다.

“이미 다 끝난 일이잖습니까!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그가 들어서자마자 오한울이 물었다. 목소리도, 얼굴도 울분에 차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이도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끝나긴 뭘 끝나, 이제 시작인데. 요즘은 발뺌을 이런 식으로 하나 봐.”

“발뺌할 게 뭐가 있습니까. 서로 다 아는 마당에.”

“그러니까. 되게 당당하네?”

“뭘 더 바랍니까?”

“다.”

이도하가 성큼 다가섰다.

“왜 그런 건지, 뭘 바라는 건지, 뭘 하려는 건지, 전부 다.”

하- 오한울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망한 미소였다. 힘이 쭉 빠진 것처럼 테이블 위에 털썩, 엉덩이를 걸친 오한울이 말했다.

“계약주가 원해서였죠.”

고개를 떨어트린 그가 제 팔을 만지작거렸다.

“달리 무슨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중얼거리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듣는 사람까지 힘이 다 빠지게 했다. 물론 이도하는 힘이 빠지기는커녕, 저렇게 제가 뭔가 몹쓸 짓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구는 오한울을 보자 더 짜증 나기만 했다.

“계약주가 원하면 뭐든 해 주나?”

잠시 대답이 없던 오한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물었다.

“당신은 안 그럽니까?”

이 질문에 이도하는 아니라고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의 그였다면 망설임조차 없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시오한이 산을 하나 뜯어다 달라고 하면 ‘싫어’, 혹은 ‘안 돼’ 가 아니라 통째로 뜯어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면 뜯어다 놔도 상관없지 않나, 고민할 게 틀림없었다. 물론 이도하는 한 번도 그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시오한은 단 한 번도, 하다못해 물건 하나 옮겨달라는 부탁조차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 계약주는 바라는 거 없어.”

“그럼 왜 당신을 소환한 겁니까?”

오한울이 물었다. 시비도 트집도 아니었고,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아 의아한 것처럼.

“지금 내 계약주 얘길 하자고 하는 게 아닐 텐데.”

이도하가 차갑게 잘랐다.

“…안 믿겠지만, 나는 몰랐습니다.”

“몰랐다?”

그거참 편하고 빤한 변명이네. 오한울의 말처럼 이도하는 눈곱만큼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케드윈이 반군이 된 건 본인이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의 부모는 이미 반군의 주요 인사였고, 케드윈은 그에 따라야 했던 것뿐입니다. 그는 자기가 속해본 적도 없는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게도 종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방법밖에 알지 못했던 거지.”

그래서 그는 오한울을 소환하게 된 것이다. 환상으로라도 도망치고 싶었기 때문에. 의무와 책임만 주어진 삶이 아닌 다른 삶을, 다른 곳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결국 그조차도 반군의 활동으로 이용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이도하의 반응은 변함없었다.

“아, 어쩌라고.”

누가 인간극장 듣자고 했나. 이도하의 짜증에도 아랑곳않고 오한울이 픽 웃었다.

“세상에 악당이 어디 있습니까, 이도하씨. 다 그냥 사는 거지. 불행해 마땅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그랬다는 겁니다. 실험에 참여했던 사형수가 당신을 소환해 모든 게 다 탄로 난 이후에야 케드윈은 내게 토로했습니다. 계약자를 잃은 계약주를 위해, 그리고 혹은 계약주를 잃은 계약자를 위해 그런 실험을 했던 것뿐이라고. 자기도 이용당한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습니다.”

정작 그렇게 말하면서도 오한울은 그 말을 전혀 믿었던 눈치가 아니었지만, 이도하의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팔짱을 끼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왜 날 소환하게 만들었냐니까.”

이도하는 오한울이 자꾸 무슨 딴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오한울은 정말로 의아한 얼굴을 했다.

“누가요?”

“당신이!”

“내가요?”

“아니 당신이 사형수가 날 소환하게 만들었잖아.”

“예?”

“아.”

환장하겠네. 오한울은 헛나온 이도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도하는 오한울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아닌 만담에 둘 다 와락 얼굴을 구겼다.

“그 사형수, 웨이드가 당신을 소환한 게 아닙니까?”

“맞는데-”

이도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잠깐, 내가 소환되고 나서야 알았다고?”

웬 신파인가 하여 대충 흘려들었던 이도하가 물었다. 오한울은 드라마도 찍고 영화도 찍은 연기자이긴 하지만 저 영문을 모르는 얼굴은 정말 연기 같지가 않았다. 와중에 이도하가 한 말을 곰곰이 곱씹어본 오한울이 말했다.

“이도하씨가 지금 하는 말은… 내가 그 사형수를 시켜서 당신을 소환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

“……”

그제야 둘은 서로 핀트가 좀 엇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한울이 기가 찬 얼굴로 물었다.

“내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뭐 하러요?”

“……”

그리고 이도하가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이다. 오한울의 계약주는 반군의 일원인데, 웨이드가 이도하를 소환한 것은 시오한을 완전히 열 받게 해 반군을 엿 먹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한울에게 있어 하등 이익이랄 것이 없는 짓이었다.

“이도하씨, 가만 보니 모르는 것 같은데….”

그가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팔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방송에나 화보 등 여러 매체서 보인 적 있던 계약명이 온데간데없었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아주 깨끗하기만 했다.

“케드윈- 내 계약주는 죽었습니다. 나는 이제 계약자가 아니에요.”

오한울이 쐐기를 박았다.

“…죽었다고?”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은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계약주가 죽어?

“오즈에요, 이도하씨. 사람이 죽는 일 따위는 비일비재합니다. 아무렴 이리스티리움의 한복판에서 황제의 계약자인 당신을 소환하고도 반군이 무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한울이 힘없이 말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후에 발라리온의 반군은 모두 척살 당했습니다. 아무도 남지 않았어요. 정말 몰랐나 봅니다.”

오한울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칼에 찔린 사람 같았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 병든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 충혈된 눈, 한동안 전혀 소식이 없어 잠적했던 것처럼 알려졌던 것도, 전부 그래서였던 것이다.

“나는 케드윈이 뭘 하려고 하는지 몰랐고, 그래서 막지 못했고….”

시오한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뒤로 우르슬라니 신은호니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도하 역시 반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제가 대수롭잖게 지나친 책의 뒷면을 들여다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죽든 말든 그의 알바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고, 다 그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한울 계약주가 죽었대.

그렇게 지나가듯 전해 들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속이 텅 비어버린 사람처럼 선 오한울을 보고 있으니 그런 건 다른 문제였다. 이도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오한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무거운 침묵만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오한울이 먼저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사과 같은 건 하지 마세요. 좀 웃기지 않습니까.”

그가 먼저 일어서 이도하를 지나쳤다. 이도하는 그제야 그가 약간씩 절뚝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도하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시선을 따라 제 다리를 보더니 그냥 쓰게 웃고 말았다.

“반군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도 말해주지 않을 겁니다. 이제 내가 지켜줄 수 있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나랑 상관없는 일입니다. 내겐 끝이에요. 그러니 우리 더 이상 보지 맙시다.”

그리고 오한울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다 결국 말 것 같았으나,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계약주가 바라는 게 그저 당신뿐이라면, 부럽네요, 이도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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