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좁은 책장 사이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두 뼘 정도에 불과했다. 주승현을 관찰하는 미세한 움직임까지 모두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김윤혜가 이렇게 주승현을 바라본다는 것은, 주승현 역시 같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령, 눌러 참았다가 태연한 척 아주 천천히, 느리게 내쉰 숨이 떨려 끊어진 것까지 알아챘을 수 있을지도 모를 정도로.
“…그렇죠. 아이라가 지금 여간 곤욕을 겪고 있는 게 아니라….”
말끝을 늘이는 주승현의 시선이 내려갔다. 김윤혜의 허리춤과 바지 주머니, 그리고 손- 그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
“괜한 말까지 섞이는 건 달갑지 않겠죠.”
6살이었던 한지유, 12살 신은호. 주승현의 말마따나 ‘괜한 말’까지 섞이기에 썩 알맞은 주제였다. 그런 게 아니다, 하는 변명 같은 해명은 지금 별로 의미가 없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든, 맞든.
“아무도 비극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누구나 기다리고 있답니다. 언제든 떠들 수 있는 주제, 마음껏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닌 불행. 우리 모두 겪어 봤잖아요?”
주승현이 가늘게 웃었다.
“그러니 김윤혜 연구원이 궁금한 게 뭐든, 이건 잠깐 미뤄 둘까요?”
“…가 봐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더 궁금한 게 있어요?”
“…없습니다.”
김윤혜가 돌아섰다.
“아, 잠깐만.”
뚜벅- 묵직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김윤혜가 일순 몸을 긴장시켰다. 등 뒤에서 길게 뻗어온 손이 그녀를 끌어안을 듯 감싸다가, 가운 안주머니로 들어갔다. 뱀이 몸을 스치듯 매끄럽고, 차가웠다. 안주머니에서 출입 카드를 꺼낸 주승현이 말했다.
“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죠.”
“…….”
“호기심은 물론 연구원의 미덕이지만, 조심해요. 김윤혜 연구원.”
“…경고시죠?”
“걱정이에요.”
손끝이 김윤혜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몇 발자국 걸은 김윤혜는 턱을 조금 내렸다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이사님은 왜 여기에 계세요?”
집행이사 정도의 직위라면 아이라의 거의 모든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할 수 있었다. 타이핑 몇 번이면 끝날 일을 굳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었다.
“이런, 방금 얘기했는데….”
그러나 주승현은 순순히 대답했다.
“부탁을 받아서요.”
김윤혜는 마치 기다리는 사람처럼 조금 더 서 있다가, 무겁게 한 걸음을 떼었다. 깜깜한 어둠이 끈적하게 발을 붙잡는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곧 어두운 서고 안으로 책장이 펼쳐지듯 빛이 들이쳤다. 각진 철제 프레임임과 먼지가 뿌옇게 쌓인 서류들을 비추었다가, 빛은 다시 접혀 사라졌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만 남았다.
잠시 후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서 있던 주승현이 움직였다. 형상조차 쉽사리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내부가 훤히 보이는 사람처럼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이 꽂혀 있는 수백 개의 파일 중 하나를 망설임 없이 꺼내 펼쳤다. 신상 명세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주승현이 고개를 돌려 벽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둘러대는 건지, 뭘 알고 저러는 건지… 조심하라고 말을 해도.”
한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며, 주승현이 탁- 파일을 덮었다.
***
김윤혜는 누가 봐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히 다시 로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잡아탔다. 아이라는 규모가 거대한 만큼 엘리베이터도 여기에 두 개, 저기에 세 개 식으로 흩어져 있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잘못 잡아타기 일쑤였는데, 늘 아이라에 살다시피 하는 연구원들은 헷갈릴 일이 없었다. 그러니 가운을 입고 있는 김윤혜가 자기 연구실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엉뚱한 엘리베이터를 탔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쩡한 안색으로 한참을 돌아 다시 자기 연구실로 돌아온 김윤혜는 지문을 인식시키고 들어가,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가 나며 완벽히 문이 닫혔는데도 김윤혜는 한동안 문에 기댄 채로 멀뚱히 서 있었다. 그녀는 벌써 몇 년이나 옮기지 않아 사소한 잡동사니가 여기저기 눈에 띄지 않게 자리한 자기 사무실을 바라보다가, 난데없이 주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헉! 김윤혜가 숨을 토해내며 쭈그리고 앉았다. 따뜻한 손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손은 따뜻하지도 않았으며 수전증이 온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쳤어….”
집행이사 주승현. 주승현이라니. 아이라 한국 지부의 지부장보다도 까마득하게 높은 고위 인사다. 김윤혜가 어린 시절부터 늘 바라봐 온 여자였다. 꽤 오랫동안 선망했었다. 그녀의 최연소 아이라 입사 기록을 깼을 때는 제2의 주승현이니 하는 말들도 잔뜩 들었다. 하필 들켜도 주승현에게 들키다니. 그렇게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주승현이 들어오는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 같았다.
질끈 입술을 깨문 김윤혜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김윤혜가 서고를 뒤질 생각을 한 건 언니 김나혜의 카페에서 이도하를 만난 직후였다. 천 년 전의 계약주와 계약을 했을지도 모르는 우르슬라- 그리고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로 하여금 보게 만들었던 것 같은 스크랩. 벽에 난 조그만 구멍 너머로 누군가 눈알을 붙이고 들여다보는 것처럼 불쾌감과 거리낌이 드는 이 일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녀는 이도하가 말한 오즈에서의 기이하고 이상한 소환 같은 건 잠시 미뤄두려고 했다. 이도하도 일단 알아두기만 하라고 했고.
그러나 시시때때로, 아주 틈틈이 그 기이하고 이상한 일은 그녀의 생각 사이로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김윤혜는 과학자이지만, 동시에 인류가 아직도 해명해 내지 못하고 있는 특기라는 힘의 소유주이자, 그 특기를 연구하는 연구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자꾸만 그렇게 거슬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후에 이도하가 또 그 일은 아이라와 현자의 탑, 그리고 어쩌면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가 합작으로 벌인 ‘계약 양도 실험’이었다고 전해 준 뒤에도 김윤혜는 여전히 이 일을 되새김질하듯 곱씹었다. 이도하는 ‘실험’을 그냥 단어 그대로 받아들인 듯했지만, 그 ‘실험’ 하나란 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아는 김윤혜는 이도하가 그랬던 것보다 한층 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사형수가 갑자기 딴 마음이 들어 잘못 소환해냈다고 해도, 하고 많은 세계의 계약자들 중 하필, 정말 하필 이도하를 소환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제가 보았던 스크랩도 사실 누군가 보란 듯이 거기에 두었던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김윤혜는 아무것도 우연으로 여길 수 없었다.
우연이 아니라 인과를 가지는 인위적인 조작. 가령 누군가가 그 사형수로 삼아 이도하를 소환하게 만들었다면. 그런 건 계약자만이 가능했다. 김윤혜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도하더러 보란 듯이.
그때부터 김윤혜를 직접 발품을 팔아 서고를 뒤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승현에게 둘러댄 것처럼 한지유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당연히, 어떤 계약자가 어떤 특기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그걸 알아보려고. 그 나이에 일반적으로는 받을 수 없는 연봉을 받고도 크게 쓸 데는 없어 고스란히 쌓아두고 있던 김윤혜는 서고에 출입하기 위해 난생처음 거액의 돈을 아주 불법적으로 써 보았다.
김윤혜는 한 달 동안 본관을 비롯해 각기 다른 동의 서고들을 총 12개 뒤졌고, 이번이 마지막 서고였다. 다른 서고에서 전통적이고 무식한 방법으로 뒤진 결과 의심이 가는 계약자들이 몇 있기는 했지만 확신이 들지 않아, 이곳에야말로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주승현에게 들켰다.
‘속담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도 있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김윤혜를 바라보는 새까만 동공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라의 고위 인사.
설마 주승현이.
김윤혜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꽉 움켜쥔 제 손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없었어.”
분명 이도하의 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녀가 이 일 뒤에 있을 거라고 확신할 만한 계약자는 없었다.
왜 없지?
어떻게 없을 수 있을까. 모든 특기자가 아이라에 등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모든 계약자는 반드시 아이라에 적을 올리게 되어 있는데. 없을 수가….
김윤혜가 눈을 크게 떴다.
없을 수가 있구나.
모든 계약자가 적을 올리게 되는 것은 계약을 함으로서 얻는 계약주의 마력이 거대한 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었다. 아이라에 적을 올리는 것은 소속사, 에너젠과의 거래 등에서 모든 것을 훨씬 수월하게 해 주기 때문에. 어지간한 직장인 월급 수준은 가뿐하게 뛰어넘으니 그런 걸 마다할 사람은 없었다. 없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었다.
하지만 그런 돈 따위가 전혀 아쉽지 않다면. 그러면 굳이 아이라에 적을 둘 이유 같은 건 없다.
김윤혜가 벌떡 일어났다. 거의 날 듯이 책상으로 달려간 그녀는 의자도 치워버리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 날의 영상은 너무 많이 떠돌아, 어디서든 이도하만 검색하면 손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딸깍- 클릭 소리가 울렸다.
‘-안 그러냐고! 따지고 보면 존나 돌연변이 기형아 새끼들 아니야! 특기니 계약이니 존나 유세 부리는 거 나만 싫어? 괴물 새끼들이 운 좀 좋게 태어난 거 가지고 대우 받으니까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고 - 시발 인간들도 존나 대가리가 빠가사리지, 뭐 오즈? 존나 지랄 대잔치 진짜 푸하하하!’
핸드폰으로 찍은 낮은 구도. 찍어, 찍어- 수군거리는 목소리. 왜 저래, 미친 거 아니야? 완전 또라이야- 웅성대는 사람들. 김윤혜가 다른 영상을 클릭했다. 여러 가지 영상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찍은 영상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윤혜는 확인해야 할 것은 다 확인할 수 있었다.
‘근데 왜 하필 이도하씨를 소환하려고 했대요? 너무 멍청한 짓 아니에요?’
너무 멍청한 짓-
수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재벌 3세가 이유 없이 자국의 인소더블에게 시비를 거는 멍청한 짓.
불법 실험을 진행 중이던 사형수가 계획과는 달리, 하필이면 황제의 계약자를 소환하는 멍청한 짓.
‘아, 미안해요. 근데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그러면 곤란해질 거거든요.’
말리는 듯하지만 오히려 은근히 화를 더 부추기는 말투. 느물거리며 웃는 얼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시종일관 상황을 느긋하게 구경하는 작태.
특기자.
도원그룹 최도원 회장의 막내손자- 최준원.
“이 개새끼….”
꽈악- 김윤혜는 손바닥이 아프도록 주먹을 쥐었다. 김윤혜는 그 날, 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던 최준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윤혜가 핸드폰을 낚아챘다. 뚜- 뚜-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신호음뿐이었다. 김윤혜는 초조하게 기다리다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었다. 뚜뚜- 여전히 신호음이 이어진다.
“왜 안 받아….”
불안하게 문을 흘끔거리던 김윤혜는 핸드폰을 어깨 사이에 끼고 재빨리 의자 등받이의 재킷을 낚아챘다. 가방에서 대충 지갑 하나만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똑똑- 누군가 노크했다.
김윤혜가 흠칫 물러났다. 뚜- 뚜- 신호음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린다. 심장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끼릭, 손잡이가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