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핸드폰으로 조도가 낮은 불빛을 밝힌 김윤혜가 미간을 구겼다.
갬성이야 뭐야.
불빛에 어렴풋이 드러난 방은 꽤 컸다. 사실 아주 컸다. 길게 나 있던 복도의 한쪽 면에 있는 방을 전부 다 터 하나로 만든 것 같은 크기였다. 철제 책장에는 서류들이 가득 꼽혀 있었으며 아래에는 플라스틱 상자들도 많았다. 서류 하나를 뽑자 먼지가 아주 수북하게 피어올랐다. 일이 년으로 쌓일 먼지가 아니었다.
반사적으로 김윤혜가 푸엣취! 재채기를 했다. 철제 책장들 사이로 소리가 더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김윤혜는 깜짝 놀라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을 죽이고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꺼낸 서류를 조심스레 쓸어 확인했다.
그러나 그건 김윤혜가 찾는 서류가 아니었다. 그다음 서류도, 그다음 서류도 전부 아니었다. 그곳에 가득 찬 모든 서류들은 라벨 하나 없고 서류의 색상도 모두 같아 겉으로 봐서는 뭐가 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책장의 생김새마저 모두 같아 보고 있자면 약간 혼란이 올 정도였다.
정신병 올 것 같네. 속으로 이죽거리면서도 김윤혜는 쉴 새 없이 서류를 하나하나 뽑아 확인해 가며 책장들을 뒤졌다. 찾는 게 쉽사리 나오지 않아 뽑아 열어보자마자 다시 넣어놓기를 수십 차례였다. 이만하면 건초더미에서 바늘 찾기라고 해도 좋을 모양새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탁한 먼지 냄새만 퀴퀴하게 가득 차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질 즈음이었다. 서류 하나를 뽑아냈던 김윤혜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한지유. 6세.
1993.05.12~ 1999.02.08
특기 – 스케치북
노란 유치원복을 입은 어린아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돌아보다가 찍힌 사진이 붙어있는 신상 명세서였다. 아래로 몇 가지의 긴 기록이나 메모 따위가 함께 붙어 있었고 뒤에도 몇 장의 서류가 더 있었다. 왜 하필 이 애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김윤혜는 곧바로 파일을 덮었다. 출입문을 확인한 김윤혜는 아예 그 책장의 모든 서류들을 일일이 들추어보기 시작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서류들을 확인했을 때에는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김윤혜의 눈에 슬슬 초조함이 돌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기계적으로 파일을 열고 덮어 꽂아놓기를 반복하던 그녀가 문득 우뚝 멈추었다.
이도하. 24세.
그 순간 김윤혜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뒤에, 누군가 서 있었다. 고개를 들려는 순간 귓가에 따뜻한 입김이 느껴졌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여기서 뭐 해요?”
두피에 바늘이 꽂히는 것처럼 머리카락이 주뼛 선다. 뒤에서 껴안듯 김윤혜의 옆구리 옆으로 넘어온 손이 그녀의 손에 들린 파일을 빼갔다. 소리 없이 얼어붙었던 김윤혜가 헉, 숨을 내쉬려는 순간 재빨리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솜털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적막한 가운데 가슴만 가쁘게 오르락내리락한다.
입을 틀어막은 손은 그녀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김윤혜는 흘긋, 옆을 보았다가, 조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김윤혜의 눈이 아주 잠깐 크기를 더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쉬, 여자가 입에 손가락을 세웠다.
“여긴 들어오면 안 되는데.”
어둠 속에서, 생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여자가 김윤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둥근 안경 너머로 휘어진 눈동자가 상냥하고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제법 키가 큰 편인 김윤혜보다도 눈높이가 위에 있을 정도로 컸다. 많이 잡아봐야 서른 후반으로 보였고, 나이를 잘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본다면 20대로도 볼 정도로 얼굴이 아주 젊었다.
어차피 늘 가운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그 안에는 뭘 입든 자유로운 연구원들과는 달리 그녀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정장이 아니었더라도, 대한민국의 누구나가 그녀를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이라 집행 이사 주승현.
김윤혜 이전에 17살의 나이로 아이라 최연소 입사 기록을 가지고 있던 연구원이자, 한국 지부 수석 연구원, 그리고 지금은 아이라의 다음 대 부총재이자 최연소 부총재로 가장 유력하게 점쳐지고 있는 여자였다. 이 한국 지부에서는 가장 윗선이라고 봐도 좋았다. 고아원 출신으로 오직 능력만 가지고 세계 최대 연구 기관의 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아이라의 가장 유명한 고위 인사인 것이다.
“이도하?”
파일을 내려다보고 있던 눈동자가 김윤혜를 슥 바라보았다. 색소가 옅은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김윤혜를 직시했다.
“담당 계약자라면 굳이 기록을 들추어보지 않아도 아는 게 더 많을 텐데요, 김윤혜 연구원.”
흥미로운 기색으로 까딱 눈썹을 올린 주승현이 말했다.
“그럼 누굴 찾아보러 왔을까?”
김윤혜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완전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한 걸음 물러서 공간을 마련해 주면서도 주승현의 시선은 여전히 김윤혜에게 꽂혀 있었다. 웃는 낯을 하고 있지만, 집요한 시선이었다.
“여기에 이런 신상 명세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주승현이 파일을 내밀었다. 꼭 김윤혜에게 주는 것 같았으나, 파일은 그녀를 지나쳐 다시 책장에 꼽혀 들어갔다. 원래부터 꽂혀 있던 자리는 아니었으나, 주승현도 위치 같은 건 확인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파일은 다른 똑같이 생긴 파일들 틈으로 들어가, 눈만 두어 번 깜빡여도 방금 주승현이 꼽은 게 어느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대답하기 어려워요?”
주승현이 물었다.
“네.”
김윤혜가 대답했다.
“질문을 연달아 하시니 어느 것에 대답해 드려야 할지 고민이 돼서요.”
어둠 속에서도 김윤혜의 안색은 몹시 평온했다.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고, 얼굴 어디에도 놀라거나 긴장한 흔적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서고 안이 온통 깜깜하지 않았더라면 이상할 게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몰래 숨어 들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당당한 태도에 주승현이 까딱 고개를 기울였다.
“김윤혜 연구원이 대답하고 싶은 것부터 해 보세요.”
“객관식인가요, 주관식인가요?”
주승현이 삐뚜름히 웃었다.
“내가 선택지를 줬던가요?”
“사실을 말하면 될지, 이사님의 마음에 들어야 될지 궁금해서요.”
아, 그 객관, 주관. 이 말장난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김윤혜는 여전히 태연한 동시에 진지했다. 주승현도 여전히 웃는 낯이었으나, 그게 이 말장난이 재미있어서는 아닐 것이었다.
“그래요, 원래 똑똑한 사람들이 좀 맹랑한 편이죠.”
주승현이 말했다.
“객관식으로 해요.”
“짐작했습니다.”
김윤혜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무는 숲에 숨겨라. 아이라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보면 한 번쯤은 듣는 말이죠. 옛날부터 속담 같은 것에 진심이기도 했고. 아이라는 원래 디지털 방식보다 종이 서류를 잔뜩 만드는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했어요. 2008년이 돼서야 디지털화 작업을 시작했을 정도로. 그러니 자료들을 테이터베이스화 시켰다고 해도 종이 서류들을 폐기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거기다 종말론이 한창 돌던 2012년에 데이터베이스를 통째로 날려버린 테러를 받은 적이 있으니 분명히 블랙박스가 아니더라도 기록 서고에 보관 중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흘긋, 김윤혜가 책장을 눈짓했다.
“숲에 나무를 숨기는 방식으로요.”
주승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맹랑한 연구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가만히 김윤혜를 바라보기만 했다. 김윤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정적 속에서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내, 주승현이 선선히 말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네.”
말이야 참 쉽다. 누가 저걸 모르냐, 이죽대는 마음이 들 정도로.
“찾는 기록이 어디 있을 줄 알고요?”
아이라에 기록 서고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이라는 고상하게 말해서 세계 최고의 연구 기관답게 규모가 아주 거대했고, 사람들이 흔히 표현하는 직설 화법으로는 그냥 오지게 컸다. 시간에 걸쳐 증축을 거듭하여 본관 외에도 부속 건물이 한두 개도 아닌 데다가 연구동만 해도 10개가 넘었다. 어지간한 아파트 대단지 규모라 차를 타거나 도약 특기자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예 갈 엄두가 안 나는 거리도 분명 있었다.
그런 규모에 이런 식의 서고가 뿔뿔이 나눠 흩어져 있었으며, 접근이 금지된 그 각각의 서고에 뭐가 있는지는 당연히 관리자만 알고 있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요.”
김윤혜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발품을 팔았다는 뜻이다. 주승현이 까딱 눈썹을 올렸다. 별로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기야, 누구도 근 한 달에 걸쳐서 그 연구동의 서고들을 모조리 뒤졌다는 말을 들으면 헛웃음이나 칠 테였다.
“허가는 당연히 안 받은 것 같고… 그래서, 누굴 찾고 있었어요?”
주승현이 물었다. 사뭇 가벼운 어조였다. 어떻게 찾았는지는 더 이상 묻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김윤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가늠하는 듯한 시선에, 주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가 다시 물었다.
“김윤혜 연구원, 뭘 찾고 있었어요.”
“…한지유요.”
마침내 김윤혜가 대답했다.
“이도하씨와 특기의 성질이 비슷한 것 같아서,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아이라 외의 다른 자료들은 다 부정확한 것 같아서요.”
“한지유라, 소문과 추측이 무성하긴 하죠.”
주승현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얼핏 김윤혜의 뒤로 책장을 바라보는 시선에 안타까운 빛이 어렸다. 그러나 아주 잠깐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요즘 같이 예민할 때에 한지유를요?”
“요즘 같은 때라고 하시면 신은호 때문인가요?”
좁은 책장 사이에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의 거리는 고작 두 뼘 정도에 불과했다. 김윤혜는 주승현의 눈가에 작게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색소가 연한 갈색 눈동자 속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는 동공이 조금 커졌다. 꼭 제 모습이 비칠 것 같았으나, 어둠 속에서 동공은 아주 까맣게만 보일 뿐이었다. 입술이 조금 얇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