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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98화 (98/250)

98화

“내 주위에 계약자?”

이도하는 주변에 아는 계약자는 별로 없지만, 시오한의 말처럼 모르는 사이에 ‘스친’ 계약자라고 하면 또 추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계약자라고 해 봐야 고작 200명 남짓이었다. 아이라를 오래 오고 가며 한 번쯤은 다 스친 사이다.

물불 가릴 것이 없어진 이도하는 지금 아이라의 데이터베이스를 다 엎는다고 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지킬 일상이 있었을 때나 몸을 사렸지, 지금은 그런 것도 없어진 마당이다. 그깟 데이터베이스 좀 엎으면 절 뭐 어쩔 텐가. 감히 죽일 수가 있나, 쫓아낼 수가 있나. 문득 이도하가 악동 같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가만 보면 그렇게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은데 찾아서 일단 뚝배기부터 깨봐야지.”

그리고 한 번 봐야겠다.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건지. 저더러 천 년 전과 조우하게 해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한 번 봐야겠다.

-뚝배기를 깨?

“그런 게 있어. 음식 식지 말라고 쓰는 엄청 튼튼한 돌그릇인데 머리로 그 뚝배기를 깨버리겠다, 그런 표현이야.”

-머리로 그릇을 깬다고.

계약 특혜로 그동안 자연스럽게 서로의 말을 이해해 왔던 시오한은 이런 것들을 썩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대가 하고 싶은 건 다 해. 나는 그대가 빨리 보고 싶으니 이제부터 존버해야지.

이도하가 픽 웃었다. 뭘 이런 것도 빠르냐.

“당신은 존버하면 안 되지. 존나 쉬어야지.”

-쉬는 건 별일이 아니지만, 그대가 보고 싶은 건 버텨야 하는 일이거든.

시오한이 말했다. 달큼한 목소리에, 저를 보는 얼굴이 절로 그려지는 것 같다.

-보고 싶다, 화이람.

“…….”

그때 똑똑, 누군가 노크했다. 괜히 흠칫 놀란 이도하가 얼른 의자를 돌리며 들어오세요, 했다. 조심스레 문을 연 것은 김대용 변호사였다. 이도하가 아직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이 남자는 그에게 인터뷰 일정에 대해 논의하러 온 참이었다.

오늘 당장 인터뷰를 잡든 말든 당사자의 의견이 필요한데,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아 그가 총대를 멘 것이다. 참지 않는 이도하의 성질을 코앞에서 보고 나니 혹시라도 그의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간 큰일이라도 생길까 다들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인터뷰 일정 관련해서 조율해 주셔야 할 게 있어서요. 혹시 통화는 다 하셨을까요?”

김대용 변호사는 이도하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이도하가 뜬금없이 말했다.

“어, 나도.”

“예?”

이도하가 씩 웃었다. TV나 사진이나 여러 가지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잘생긴 얼굴이라고 김대용 변호사는 생각했다. 연예인들도 여럿 봤지만 이도하는 남자가 봐도 잘생겼다. 서늘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 저렇게 씩 웃으니 멋있었다. 다 가졌네, 다 가졌어. 김대용 변호사가 지극한 팬심으로 그를 보는 동안 이도하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아닙니다. 가죠.”

“예, 전략팀에서 말하길 인터뷰를 당장 오늘 잡을 수도 있긴 합니다만 그렇게 하면 기자들 사이에 잡음이 좀 클 거라고 합니다.”

“잡음이야 지금도 많은데요, 뭘. 기자야 한 명만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자본주의 경쟁 시대인데 올 사람만 오라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한동안 서바이벌 유행했잖아요.”

서바이벌… 김대용 변호사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고 얼굴에 힘을 주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복도에 쳐다보는 눈이 많았다. 어지간히 유명한 특기자나 계약자들쯤은 일반인처럼 보는 직원들인데도 이도하가 지나가니 저렇게 된다. 당장 그가 기자회견이건 뭐건 한다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를 대관하느냐, 그 많은 기자들은 다 어떻게 선별하여 들여보낼 것이냐, 주변 보안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런 것들이 문제지 다른 게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도하의 걸음이 확 느려졌다. 시선은 멀리 가 있었다. 표정도 아주 심상치 않았다. 다리도 긴 이도하가 성큼성큼 걸어가니 그에 맞추느라고 열심히 걷던 김대용 변호사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이고, 아부지- 그는 자기도 모르게 현재 마당 가꾸기에 한창일 제 아버지를 불렀다.

“오한울?”

디귿자로 생겨 중간이 뻥 뚫린 복도 저 너머에, 오한울이 있었다. 이도하랑 치고 박고 싸운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도는 그 오한울이. 그 옆엔 유세오까지, 둘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환영….”

오한울을 바라보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그게 좋은 일은 아닐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김대용 변호사는 일단 한 번 그를 붙잡아 보려고 했으나, 그가 손가락을 움찔했을 때 이도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이봐요, 오한울씨.”

“!!!”

“악! 형!”

단번에 그들 앞으로 도약을 한 이도하가 갑자기 나타나자, 오한울과 유세오는 깜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유세오는 그 자리에서 거의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하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오한울에게. 그가 몸을 경직시켰다. 조금 수척해진 얼굴이 바짝 긴장한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둘 사이에 낀 유세오가 불안하게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때 그쪽이 했던 부탁, 나는 지켰는데. 기억납니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눈동자가 움찔 떤다. 분명 유세오를 보려다가 말았다. 그렇지, 쟤가 입이 무거운 편은 아니지. 무겁기는커녕 바다에 빠져도 입만 동동 떠 살아남을 애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뭔가를 알게 되면 저도 모르는 새 탈탈 털릴 것이다. 눈치가 보이겠지. 오한울이 이도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할 말 있으면 어디 들어가서 얘기하죠. 세오야, 먼저 들어가라.”

“그냥 여기서 하죠. 이런 식으로 애를 보내면 세오가 얼마나 궁금하겠어요.”

이도하가 비죽 웃었다.

“어….”

“상관도 없는 애를 끌어들일 생각입니까?”

“애를 끌어들일 일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네?”

“말꼬리 잡는 게 특깁니까?”

“다 특기지, 나는.”

중간에 낀 유세오는 이도저도 하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는 늘 시큰둥하고 덤덤해 보이던 이도하가 저렇게 이죽거리며 사람 복장을 살살 긁어놓을 수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오한울은 이제 누가 봐도 열 받은 게 분명해 보였다. 목에 핏대가 섰고, 턱 근육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상관이 없기는 왜 없어. 얘 계약주가 궁성 기사단장인데.”

오한울의 얼굴이 굳었다. 거의 안절부절못하던 유세오는 제가 거론되자 화들짝 놀랐다.

“형, 그건-”

“들어가서 얘기하자고요. 지금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동네방네 다 떠들 일 있어요?”

“보는 눈은 원래도 많았고, 어차피 지금부터 다 떠들 생각이라.”

와락, 오한울이 이도하의 팔을 그러쥐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눈에 띄게 마른 얼굴이 창백해졌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 이도하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왜 진작 오한울을 생각 못 했지? 이도하가 오히려 그를 확 당겼다.

“보는 눈이 두려웠으면 처음부터 몸을 사렸어야지. 참 당연한 일인데 왜 하나같이 생각을 못 하나 몰라. 안 그럽니까?”

어느새 사방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대치하는 모양새였다. 함부로 휴대폰을 꺼내 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중간이 건물 옥상부터 아래까지 뻥 뚫린 구조에 난간마다 사람들이 붙어 있다. 오한울이 곁눈질하는 시선에 흩어질 듯 주춤거리기는 했으나, 호기심이 더 먼저였다. 오한울이 질끈 입술을 물었다. 그 순간, 그의 눈동자가 새파란 섬광으로 물들었다.

***

김윤혜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꼽고 태연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 태연했고, 어떤 급한 일도 없어 보였다. 3층에서 1층에 이른 그녀는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 또 태연히 걸었고, 몇몇 아는 사람들과 마주치며 간간히 인사도 했다. 1층의 넓은 로비에는 견학을 온 초등학생들이 조그만 병아리들처럼 가득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기도 했다.

로비에 연결된 중앙 정원으로 나온 김윤혜는 벤치에 앉아 바람을 조금 쐤다. 이제 공기가 차가워 옷을 두껍게 입지 않으면 콧물이 절로 났다.

핸드폰을 잠깐 만지작거린 후에, 김윤혜는 정원을 나와 1층 로비를 통과해 다시 비상구로 들어갔다. 아까와는 또 다른 비상구 계단이었다. 이번에는 아주 빠르게 걸어 단숨에 지하 3층까지 내려가자 양옆으로 문이 두 개 있었다.

김윤혜는 흘긋, 복도 구석에 박쥐처럼 웅크린 CCTV를 확인한 다음 오른쪽 문을 열었다가 멈추었다. 순간 CCTV의 빨간 불빛이 깜빡였다. 김윤혜가 튕기듯 재빠르게 반대쪽 문을 열고 나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복도가 나타났다. 전등은 환했고 복도도 깔끔했다. 그러나 적막한 것이 꼭 무언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김윤혜는 잰걸음으로 뛰듯이 걸어 가장 안쪽의 복도에 도착했다.

구석의 CCTV는 전혀 쳐다보지 않으며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가운 안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낸 김윤혜가 순식간에 카드를 입력시키고 문 안으로 열고 들어갔다. 복도를 지나 이 잠긴 문으로 들어오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시간이었다.

김윤혜는 숨을 죽이며 한동안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떼었다.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고상하게 말해서는 값비싼 미래지향적 건물이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돈을 갖다 처바른 아이라의 건물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철제 책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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