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어떻게 나올 것 같아?
시오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이도하가 누구한테 왜 화풀이를 하는지는 관심 없고 그저 제 계약자의 말에 화답해줄 뿐이었다. 오늘은 이게 어땠고, 저게 좀 그랬어, 하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대는 것에 대답해 주듯이.
이도하가 생각하기에 어린이 시오한이 어린이 이도하를 만났다면 아주 싫어했을 거라고 확신했는데, 이제 보니 어린이 이도하가 어른 시오한과 만났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개망나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다 오냐오냐 받아줘서 어쩌냐.
조금 민망해진 이도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잠시 후 대답했다.
“입 다물고 모른 척 존버하든가, 무슨 변명이랍시고 떠들어대든가, 둘 중 하나겠지.”
-존버?
“존나 버티기.”
-아, 존나 버티기.
이도하의 말을 따라 하며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목소리가 낮고 말투가 느린 시오한은 비속어를 할 때조차도 그랬다. 이도하도 그 모양새가 웃겨 그를 따라 웃었다.
“여태 존버한 세월이 있으니 이번에도 존버한다에 내… 내….”
이도하는 잠시 고민했다.
“내 고래 인형을 건다.”
-고래 인형이라고?
시오한은 이제 완전히 웃음이 터져 버린 것 같았다. 웃음 사이로 그가 물었다. 이도하도 갑자기 신이 났다.
“있어, 8살 때부터 끌어안고 잔 애착 인형. 좀 꼬질꼬질하긴 한데 그래도 귀여움.”
-인형을 끌어안고 잔단 말이야? 지금까지?
인형을 끌어안고 자는 네가 더 귀엽다, 하는 어투였지만 이도하는 무시했다.
“습관이야. 뭐가 좀 품에 든든하게 차 있어야 편해. 당신은 안 그래? 하기야. 당신도 좀 죽은 듯이 자더라.”
-좀 죽고 싶었거든.
“뭐라고?”
시오한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그냥, 그런 때가 있어, 화이람. 너무 좋은데 그래서 좀 죽고 싶을 때가.
애석하게도 이도하는 눈치가 빨랐다. 물고 빨고 키스도 하고 여기저기 더듬거리기까지 했는데 이쯤에서 못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같은 남자로서 그가 하는 말을 단번에 이해한 이도하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애매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그게… 음. 아무도 없는 방을 괜히 한 번 살핀 그가 턱을 긁적였다. 이도하는 눈치도 빠르고 욕구에도 솔직했지만 입이 걸출하지는 못했다.
“어음, 아무튼. 그래서 내가 생각을 좀 더 해봤는데, 시오한. 그 감옥, 당신이 제단 같다고 했잖아.”
-구조가 효율적이지는 않았으니까.
이도하가 말을 돌렸다. 급격한 선회였는데도 시오한이 고분고분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천 년 전의 그 왕국은 악마 숭배와 마녀사냥으로 멸망했고.”
-응.
“나는 비명 소리를 들었거든. 피 냄새가 진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심했고… 남자는 살려 달라고 빌고 있었어.”
그때의 현장이 마치 시오한이 저를 소환했을 때와 닮아 더 비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 꽤 닮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닮아 있지 않았다. 비명 소리, 신음 소리. 그리고 피 냄새. 시오한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쏟아냈던 피는 거의 한강을 이루었었고, 속이 다 뒤집어지던 피 냄새도 이도하의 기억에 아주 강렬하게 남았다. 그러나 천 년 전의 소환에서는 그보다도 더했다. 피 웅덩이에 아주 코를 처박은 것 같았고… 기원도 달랐다.
“살려 달라고 했지만, 시오한. 당신이 진짜 바랐던 건 그게 아니잖아. 당신이 기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살아야 했던 거지.”
-그대가 옳아.
시오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도하는 잠시 입술을 잘근거리며 망설였다. 그는 제법 타당한 것 같은 결론에 도달했지만, 말하기가 달갑지 않았다.
“…당신이 기원했던 걸 이루지 못한다면 죽어도 상관없었다는 뜻이고. 맞아?”
목숨에는 목숨. ‘목숨을 건다’는 건 그런 뜻이니까.
-맞아, 화이람.
달큼하고 태연한 목소리에 이도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시오한이 무슨 이유로 저를 소환했건 상관없다고 했고, 정말 그렇게 여겼지만 때때로 이렇게 속이 울컥 차오를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이도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리, 당신 스스로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자신은 도대체 뭘 잊고 있을까. 무엇을 잊어야만 했을까. 이도하가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저 의구심에 지나지 않았다. 알든 모르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은 그런 의구심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살고 싶은 사람’이,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할 사람이 제 목숨을 걸 수가 있을까?”
이도하가 말했다.
“악마 숭배니 사탄이니 그런 정신 나간 인간들이 보통 제 목숨을 바치지는 않잖아. 남의 목숨을 바치지.”
좀 다른 경우지만 제 젊음을 유지하자고 수백 명의 피로 목욕을 한, 헝가리의 피의 백작 부인 바토리 에르제베트만 해도 그렇다. 그런 인간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이 제일 중요했고,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면 희생시켰지 스스로 무언가를 감수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제단 같다고 했을 때, 어쩌면 계약이 뭔지도 몰랐던 천 년 전에 특기자를 소환하려던 소환주가 악마 숭배로 오해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 우르슬라의 계약주도 그래서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응.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니 그게 오해가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처음부터 맹약은 ‘소환주의 피’로 그리는 소환진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게 남의 피일 수도 있을 거라고는.
천 년 전의 그 남자는 애초부터 계약 따위는 몰랐을 수도 있다.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마력이란 것조차도, 그 마력으로 다른 세상의 존재를 눌러 앉혀 그들의 특이한 힘을 이용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희생시킬 수 있었던 남자는, 정말로 악마라도 불러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시오한, 나는 아무래도 그 남자가 최초의 계약주 같아.”
이도하는 착잡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미처 모르는 새에 노랗고 붉게 물들었던 잎들은 이제 거의 다 떨어지고 나무들이 헐벗어 가고 있다.
“그게 계약의 기원일지도 몰라.”
최초의 계약. 모든 계약의 시작.
처음 그 가정을 떠올렸을 때처럼 이도하는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소환, 계약,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 악마 숭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그랬다. 악마, 마녀, 그의 세계에서도 아주 오랜 옛날에는 특기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았던 역사가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러다가 이능으로, 또 특기자로, 오즈나 그의 세상이나 알고 보면 그가 알고 있는 지금의 이 쉬운 세상 뒤에 참 다사다난한 역사가 숨어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이게 우연인가?”
사실 기원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온 세상에 만연한 이 다른 세계와의 접촉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었든, 천 년 전 그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어 이 계약의 기원일지도 모르는 이들과 우르슬라가 도대체 엮였는지는 이제 그녀를 만나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문제는 하필 이도하가 계약 양도 실험으로 소환된 곳이 공교롭게도 바로 그 지하 감옥이라는 사실이었다.
하필. 아주 우연찮게도. 멸망한 왕국, 이름조차 남지 않은 왕국, 그 유적조차 황무지로 버려진 아래에 천 년 동안 묻혀 있던 곳이다. 현자의 탑이 계약을 양도하려는 불법 실험을 하는 와중에 실험체로 쓴 사형수 웨이드가 독단적으로 이도하를 소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런 곳이 있는 줄 죽을 때까지 몰랐을 곳. 이만하면 ‘공교롭다’라는 단어로 퉁 치기에 요즈음 이도하의 세상은 석연찮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우연이라… 우연이라는 말은 위정자들이 참 많이 쓰는 말인데. 대체로 숨기려고 했던 무언가를 들켰을 때 말이야. 정무를 보다 보면 시시때때로 듣는 말이기도 하지.
시오한이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일이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도하가 천 년 전의 소환진을 발견하도록 했다는 말이 된다. 이도하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천 년 전’이라는 단서로 이어지게 만들었던 천 년 전의 고서.
김윤혜가 ‘우연찮게’ 발견한 우르슬라의 스크랩.
그를 천 년 전의 소환진으로 이끈 계약 양도 실험.
이제는 제법 그림이 그려졌다.
“날 소환해서 현자의 탑, 아이라, 레드 마피아 싹 다 물 먹여, 판 다 뒤집어 놓은 것도 모자라서 천 년 전의 소환진까지 발견하게 만들어, 와, 근데 알고 보니 이게 계약의 기원인 것 같네? 심지어 맹약이네? 아 참, 근데 맹약에 우르슬라도 엮여 있잖아? 가만 보니 우르슬라가 맹약에 연관돼 있다는 흔적을 발견한 것조차 우연이 아니지? 참나.”
이도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일거양득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다. 새끼인지 새끼들인지 모르겠지만 참 똑똑한 새끼들인 건 알겠어. 어디서부터 놀아났는지 자랑해도 되겠는데?”
이도하는 문득, 김윤혜가 시오한을 의심할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윤혜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는 시오한이 왜 목숨까지 걸어가며 그를 소환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버리지 못했다. 반드시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도하씨가 맹약을 하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럼.’
김윤혜가 스크랩을 보았던 것도 그가 소환되기 이전이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김윤혜가 말했던 것처럼 시오한이 이도하를 소환해 맹약을 할 거라는 전제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도하가 맹약에 대한 의문을 품으리란 것을 알아야만.
아니야.
아니야. 이건 마치 개미지옥과 같았다. 늪처럼,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만 하는 것 같다. 이도하가 고개를 털었다.
-계약자가 있었어, 화이람.
그때 시오한이 말했다.
“뭐?”
-그대를 소환했던 사형수가 실험에 참여하기 전에 머물렀던 곳에서, 계약자를 본 기억이 있어.
“…그 사형수는 죽었잖아. 그런 식으로도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기억을 읽는다고. 잠시 멍하니 그 말을 되뇌던 이도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계약자?”
-아마도, 그 사형수가 ‘가장 강한 계약자’를 거느린 계약주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심어준 자.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그대를 소환하도록 만든 자.
웨이드는 제 주제를 알았고 제 한계도 알았지만, 그라고 늘 저를 천대하고 무시하던 이들 위에서 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누군들 그런 마음이 없을까. 그런 작은 충동과 눌러온 욕망을 진실로 믿게끔 한 이.
-정신 계열의 능력을 가진 계약자였을 거야. 그대와 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20대 초중반의 남자. 어쩌면 이미 그대가 그대의 주변에서 보았던 일이 있을지도 몰라, 화이람. 그대가 모르는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