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시간에 간섭하는 능력을 가진 특기자가 또 있나? 하지만 그랬다면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다. 어떤 특기이든 천 년이나 시간을 거스를 만한 특기라면 우르슬라처럼 인소더블이 분명할 텐데, 인소더블의 힘은 숨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세상에 온갖 특기가 있는 만큼 아이라와 각국의 정부에도 특기를 감지하는 특기자들이 한 명쯤은 있었다.
이도하가 8살부터 아이라를 드나들지 않았더라도 아이라와 그의 나라에서는 먼저 알았을 것이며, 정말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 실존 인물이기는 하냐는 음모론까지 도는 미국의 해밀턴 블랙이 인소더블로 밝혀진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비명 소리, 흐느끼는 울음소리, 피 냄새, 철컹-! 귓가를 울렸던 커다란 쇳소리. 이도하는 다시금 그 순간을 상기했다. 푸른 눈동자. 가장 강력하게 그의 뇌리에 남은 것은 당황과 경악에 찬 그 푸른 눈동자였다. 마치 계약이 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세속과 인연을 끊은 깊은 산속 절간의 스님도 계약이 뭔지는 아는 시대이다. 특기자가 계약이 뭔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설마가, 설마가 아닌가. 진짜 천 년 전의 사람일까.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점점 커지던 회의실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지는 것도 모르고 그는 더 고심에 빠져들었다.
맹약의 기록. 천 년 전의 고서. 맹약….
맹약.
피. 붉게 넘실거리던 소환진.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천 년 전의 그 유적에서 소환된 사람이 누구이던, 그건 분명히 맹약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이곳에 있는 맹약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우르슬라의 기록뿐이다. 그가 천 년 전의 사람이건, 아무도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인소더블이건 무엇이건 간에 우르슬라와 그는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다. 그러니 확인해 줄 사람도 우르슬라뿐이었다.
우르슬라, 우르슬라. 이도하가 으득, 이를 깨물었다. 같은 인소더블로서 늘 귀 따갑게 듣기만 했지 이렇게 제 삶에 거하게 똥을 던져 놓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 우르슬라를 만나야겠다.
결국 우르슬라로 귀결된 이도하는 문득 회의실이 아주 조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이도하 아동 폭행 논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의견을 조율하고 있던 법무팀과 홍보 전략팀이 합죽이처럼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원래 한 번 조질 때 아주 만방으로 조져야 다시는 덤빌 생각을 못 한다고 하거든요.”
이도하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싶어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짓을 교환했다.
“아동 폭행이니 뭐니 하는 기자들 싹 다 고소하고 한 번 더 폭행이니 뭐니 입 벙긋해서 사람 짜증 나게 만들면 다시는 마력 매개 안 한다고 하죠.”
“예?”
한국 정서상 일단 겸손하게 나가야 한다- 고 주장했던 홍보 전략팀의 팀장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게 꼭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사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화등잔만해진 눈들이 놀라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아주 싸가지 없이 발표해 주세요. 너네 존나 짜증 나서 밥풀 찌끄레기도 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고. 마력이고 뭐고 좆까라고. 난 늙어 죽을 때까지 돈지랄 해도 빌어먹을 일 없으니까.”
“…….”
아연해진 사람들 앞에서 이도하가 말했다.
“분풀이 맞습니다. 짜증 맞고, 신경질 맞아요. 다들 내가 얼마나 빡쳤고 얼마나 기분이 더러운지 좀 알았으면 좋겠거든요. 그러지 말걸, 후회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요. 날 무슨 망나니처럼 대하니 그렇게 해 주겠다는 거예요. 이도하가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에 아주 환멸이 나서 손절하겠다고 하더라, 하면 되겠네요.”
회의실은 쥐 죽은 듯한 침묵에 휩싸였다. 묵묵부답, 기사대로 이도하는 그 어떤 기사나 취재에도 여태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도하가 피하거나 참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그는 참는 게 아니라 끓는 중이었다.
이도하는 단 한 번도 참은 적 없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는 저 좋을 대로 했다. 여태 별 거지 같은 일이 다 일어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며 무시했을 뿐 참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제 보니 사람들은 이도하가 대단히 인내심이 좋거나 아니면 정말 착하다고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천지 분간을 못하던 어린이 이도하는 사리 분별을 하는 어른 이도하가 되었을 뿐이었다. 그는 순하지 않은 성격이었고,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는데 참 제멋대로 하는 착각이었다.
“내가 고상하게 굴 이유가 있습니까?”
그제야 그들은 깨달았다. 그는 일반적인 어느 공인과도 달랐으며, 그들의 회사에 소속된 어떤 계약자와도 달랐다.
이 사람 이도하였지.
누군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다른 이들은 물론 이도하까지 그를 쳐다보자, 더 브릿지 엔터테인먼트의 법무팀 소속, 변호사 김대용은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숟가락을 젓가락 정도의 무게로 조금 더 가볍게 할 수 있는 특기를 가진 그는 이전부터 이도하의 열렬한 팬이었다. 일반인들에게도 그렇지만 특기자들에게 인소더블이라는 이름은 더더욱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는 세계에 단 셋뿐인 인소더블이 자국에도 있다는 사실에 아주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인소더블, 하면 모두가 우르슬라부터 떠올리니 이도하의 활약이 없어 아쉬워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도하가 계약자가 되어 나라를 통째로 굴려도 남을 수준의 마력을 매개하자 그는 아주 신이 났었다. 나아가 이도하가 더 브릿지와 계약하자 같은 회사 식구가 되었다며 연수원 동기들에게 술도 돌렸다.
그는 지금도 이도하의 팬이고 그를 선망했지만, 지난 캘리포니아 지진 때 이도하의 힘을 두 눈으로 목격한 이후에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김대용 변호사는 이제 이도하를 거의 경외하고 있었다. 티비로 그가 바다를 갈라 떠올려내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전율과 소름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일었던 논란부터 시작해서 그는 지금 아동 폭행 ‘의혹’으로 사람들이 이도하를 비난하는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들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가?
도대체 뭘 믿고 저러지?
마치 이도하가 그 욕을 다 처먹고서도 여전히 지금처럼 재난으로부터 사람을 구조하고 마력을 매개해 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랬는데, 결국 이 순간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때 이도하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다들 덩달아 흠칫하는 순간 그가 벌떡 일어났다. 성급한 움직임에 밀쳐진 의자가 콰당!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마치 저들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이도하가 말했다.
“험한 말 해서 죄송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해 주세요.”
순식간에 이도하는 회의실을 빠져나가고 그의 목소리만 남아 말을 한 것 같다.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충격에 빠져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들은 더 브릿지의 직원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역시 이도하의 마력 특혜를 받을 기회에 가슴 설레하던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었다. 충격이 조금 가시자 그 뒤에는 분노가 찾아왔다.
“망했네, 망했어.”
김대용 변호사가 허탈하게 중얼거린 말이 그들 모두를 대변했다.
진짜 망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다시 벌컥 열렸다. 의자 위로 스르르 늘어지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바로 앉았다.
“그냥 제가 할 테니 인터뷰 좀 잡아주세요. 기자회견 같은 거, 아무거나.”
“예?”
“최대한 빨리요. 오늘이라도 상관없어요. ”
“오늘요?”
그러나 또, 이도하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문만 저절로 스르르 닫혔다. 학창시절에 어지간히 전교권에서만 놀았다, 세계구급의 알아주는 명문대 출신이다, 하는 자리에 모인 이들은 잠시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인터뷰라고? 지금 저 말을 직접 인터뷰로 하겠다는 뜻인가?
“방검복 공구할 사람?”
흐트러져 있던 회의 자료를 챙겨 들며, 김대용 변호사가 말했다.
***
“시오한!”
급하게 빈 회의실을 찾아 들어간 이도하가 얼른 문을 닫고 말했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좋은 아침이야, 화이람.
시오한이 태연히 인사했다. 목소리가 기운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만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이었다. 이도하는 소리 없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작 일 년, 이 년만 했어도 이렇게 걱정하지 않았을 텐데, 무려 천 년이라 이도하는 내내 좌불안석이었다. 본래 특기라는 게 일반적인 물리 법칙에 어긋나는 것투성이지만 그 정도면 거의 세계를 거꾸로 뒤집었다고 봐도 좋았다. 마지막까지 시오한은 태연하게 굴었지만 이도하는 열이 나는 것보다 차가워진 몸이 더 겁났었다.
-인터뷰가 뭐지?
음? 이도하는 잠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냐고 물어보는 시오한의 말이 무척 생소해서 더 그랬다. 뭐냐니, 인터뷰가 인터뷰지…. 생각하던 그는 소위 저가 ‘무전기’라고 이름 붙인 이 의사 전달 방식으로는 계약자와 계약주간의 언어 특혜에 제약이 걸린다는 걸 깨달았다.
“그, 기자를 불러놓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거? 좌담? 아닌가. 면회? 회견?”
-아, 알겠어.
이도하가 버벅거리는 동안 웃고 있던 시오한이 자애롭게 말했다. 어렵다, 어려워. 고개를 저으며 아무 생각 없이 창가로 가려던 이도하는 약간 짜증을 내며 다시 돌아왔다.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의자나 빼 풀썩 앉은 그는 녹은 사탕처럼 녹진녹진하게 늘어졌다.
“그 여자 만나야지. 우르슬라-이올라.”
-인터뷰로?
의자 등받이에 고개를 꺾은 채 천장의 갈매기 무늬를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웃는 듯 슬쩍 눈썹을 구겼다. 하여튼 똑똑해 가지고.
“…뭐, 화풀이도 할 겸. 겸사겸사.”
신경 안 쓴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도하도 댓글을 보기는 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아동 폭행 논란이 일기 전 이도하더러 사람을 죽였네 마네, 책임이 있네 마네 할 때. 이게 왜 이모형 탓이냐, 그럼 예지 능력 있다던 우르슬라는 뭐 했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그 댓글은 퍽 예리한 취급을 받으며 한동안 여기저기서 언급되기도 했었다. 역시나, 이 아동 폭행 논란이 일기 전까지는.
재난 이후 기레기들이 기레기 한다며 이도하를 감싸고 도는 듯하던 옹호론은 아동 폭행 논란을 맞아 밀물에 맞은 것처럼 씻겨 나가고, 비난들만 암초처럼 남아 명맥을 이어가며 세를 불리고 있었다. 이도하는 이 암초를 남한테 떠넘겨 볼 생각이었다.
우르슬라에게. 독일에게.
내 인생에 똥을 던져 놓고 니들은 뭐했냐?
그녀가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한 번 던져 놓고 볼 생각이었고, 이건 합리적이고 타당한 이유 따윈 없는 그냥 화풀이가 맞았다. 어디 한 번 어떻게 나오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