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청담동 소재의 값비싼 마사지숍에 누워, 평일 대낮부터 끝까지 트레이닝 복 지퍼를 채워 올린 남자는 한량 소리 꽤나 들음직한 모습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한량이었다. 국내 굴지의 기업 중 하나인 도원 그룹 회장의 손자로 소위 ‘재벌 3세’인 그는 한량보다는 금수저라는 단어로 더 많이 불리지만, 어쨌든 백수는 백수였다.
“쓸데없이 계획에도 없는 짓을 하니까 그렇지, 최준원.”
최준원이 누운 소파 옆, 불투명한 파티션 너머 마사지를 받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말투가 곱지 않았으나, 최준원은 별로 아랑곳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솔직히 재미있었잖아, 효과 쩔었고. 내 덕에 캘리포니아 지진 때 인간들이 더 유난을 떤 건 인정하잖아? 이모형, 이모형 애칭도 생기고. 형군단이라는 추종자들도 생겼고. 우리 이모형이 잘못한 거 아니다- 하고 나서서 편 들어주는 인간들 얼마나 많아.”
주제도 모르고. 최준원이 비죽 웃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어차피 인간들은 똑같이 나왔을 거고.”
“그러니까 그 전에 양념 한 번 쳐주자는 얘기였지.”
여자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어려 있었다. 그 옆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불투명한 파티션 너머, 여자를 마사지해 주고 있던 사람의 실루엣은 조금의 동요도 없어 보였지만 최준원은 그녀가 웃은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할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데 그냥 한 번 잘했다고 해 줘요. 그럼 내가 더 열심히 하지.”
“고래로 변해 봐. 그럼 얼마든 칭찬해 주마.”
“아, 정말. 야박하다, 야박해.”
고래는 귀엽기라도 하지. 그렇게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정말로 부드러웠다. 할멈이라는 호칭과는 전혀 맞지 않게 아주 젊기도 했다.
“쟈갑다.”
최준원이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순간 머리끝에 파직! 전류가 튀었다. 깜짝 놀란 최준원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잠시 동안 그러고 있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는 그제야 몸을 폈다. 할멈 성깔 참… 들리지 않게 조용히 투덜거린 그는 대충 핸드폰을 탁자에 던져 놓으며 길게 기지개를 펴고 누웠다. 그는 은은한 조명으로 밝혀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떡할까,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둬?
“내버려 둬.”
“왜? 계획에 비해 좀 빠른 거 아닌가. 장작이 너무 활활 타잖아. 너무 한꺼번에 여러 일이 터져서 우리 이모형 정신없을 텐데?”
그러나 그 순간 뭔가를 깨달은 아,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시 고개를 꺾어 파티션 너머 여자의 실루엣을 보며 그가 말했다.
“설마 이것도 미리 알았어? 나한테만 말 안 해준 거야?”
“네가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그렇긴 한데… 거 참, 진짜 야박하네. 유리씨라도 나한테 좀 알려주지 그랬어요.”
마사지를 하던 실루엣이 최준원을 보는 듯 고개를 돌렸다. 높게 묶은 긴 머리칼이 흔들렸다. 보나마나 웃고 있겠지, 뭐. 최준원이 다시 녹은 젤리처럼 소파 위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 애나 조심해. 똑똑한 아이니까. 네가 너무 빨리 노출되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몰라?”
“엄청 좋아하면서 왜 그러실까. 결국 날 찾아낸대도 그 애 말릴 생각은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잘하라고.”
최준원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찾으면 찾는 거지 뭘. 귀여운 동생 하나 생기겠네.”
“도하 앞에서도 그렇게 얘기하든가.”
“그거 말인데. 이모형이 이러다가 진짜 제대로 열 받아서 다 뒤집어엎으면 어떡할 생각이야? 그럼 계획이고 뭐고 없어.”
“그러지 않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오올- 최준원이 까딱 눈썹을 들었다.
“자신감 넘치네, 할멈.”
“그렇게 자라도록 하지 않았으니까.”
여자의 목소리가 고저 없이 확신을 담았다. 최준원은 소리 없이 웃음만 머금었다. 그러니까, 그걸 이도하가 알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작게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맞춰 그는 발을 까딱였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려나 궁금했던 거지, 어차피 그도 걱정이 되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우리 이모형 사고칠 일만 남았나.”
“연락 왔어?”
“5시간 전에 유적에 갔었대. 황제랑 같이.”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여자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최준원이 다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새로 연락이 들어온 건 없는지 확인하고 다시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 잠깐 사이에도 댓글이 아주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검색어 3위쯤에서 반짝이던 이도하 폭행이 2위로 올라가 반짝이고 있다. 1위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었지만 아주 순식간의 폭등이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반응은 아주 다양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며 이도하를 감싸는 분위기에서 팩트만 들고 봐야 한다며 치고 박고 치열하게 싸우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도하를 비난하는 흐름을 타더니 이제는 완전히 그쪽으로 물꼬가 터버린 모양새였다. 쉽기도 하지, 정말. 최준원은 흥미롭게 기사들을 훑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가, 여자를 불렀다.
“할멈.”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모노톤의 우아한 인테리어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게 작은 볼륨으로 틀어진 힙합만 쿵쿵거리며 비트를 탔다.
“황제는 이제 그냥 둘 거야?”
“엉뚱한 생각하지 마. 진짜 끝장나고 싶지 않으면. 헬스나 한 네 몸뚱어리로는 머리카락 하나 못 건드려.”
“좋은 마사지 받으면서 말 참 뾰족하네. 무슨 생각인지 궁금하다는 거지. 그가 모든 걸 다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들어?”
나는 드는데. 최준원이 중얼거렸다.
“예로부터 사랑이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라잖아. 로미오와 줄리엣 좀 보라고.”
여자가 콧방귀를 끼는 소리가 들렸다. 최준원도 그러려니 하려는데, 여자가 말했다.
“어차피 다 도하가 선택해야 할 문제야.”
흘긋, 소파 너머의 파티션을 한 번 바라본 최준원이 픽 웃었다. 양심 없기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절대 가만히 앉아서 일이 노선 밖으로 벗어나는 걸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아니다. 알아서 하겠지. 그는 시키는 대로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을 찾아 하는 의지 같은 건 없었다. 지난 카페에서의 일은 정말로 우연이었고, 순간적인 충동의 결과였다. 뒷일이 잘 풀리리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이모형이 부디 불쌍한 우르슬라를 가엾게 여겨야 할 텐데 말이야.”
가여운 우르슬라. 최준원이 혼잣말처럼 흥얼거렸다.
***
<인소더블 이모 씨, 아동 폭행 논란… 브릿지 엔터테인먼트 ‘확인 절차 먼저 거칠 것’>
<12세 계약자 등장, 아이라 반응은?>
<석연찮은 이모 씨 행적… 목격자 인터뷰 ‘오즈에서 심상찮은 일 일어나고 있어’>
<계약자 아동 폭행 사건, 법적 처벌 받을 수 있나.>
<최연소 계약자 신모 군, 앞으로의 거취는?>
<김대훈 원장 ‘신모 군 보호 최우선으로 할 것.’>
<인소더블 이모 씨, 행적 묘연- 묵묵부답으로 일관>
<도약으로 아이라에 모습 드러낸 이모 씨, 기다리던 기자들은 ‘닭 쫓던 개 신세’>
<언제 아이라에? 기자들 바보 만드는 이모 씨- 찌푸린 얼굴>
넓은 회의실이 달린 커다란 스크린에는 각종 기사들이 띄워져 있었다. 모든 기사들이 이도하의 다양한 사진을 첨부하고 있었지만 특히나 마지막 것이 가관이었다.
아이라는 주변에 다른 건물도 없이 잘 관리된 잔디밭뿐인데 나무라도 올라탄 건지, 저격총 스코프에서나 볼 법한 각도로 이도하가 찍혀 있었다. 아이라 2층 건물 테라스에서 이도하는 잔뜩 미간을 구기고 있다.
시오한은 입 밖으로 굳이 소리를 내지 않고도 생각만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고 했지만 이도하는 그게 좀 어려웠다. 이도하는 그러다가 엉뚱하게 속에 있는 생각까지 죄다 그에게 전해지느니 차라리 조금 쪽팔리고 마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사진이 바로 그 결과였다. 그리고 시오한은 아직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걸 아는 건 이도하 본인뿐이었고, 다들 이도하가 애를 때려놓고 이 사태가 나니 짜증을 내는구나, 하고 소설을 쓰는 중이었다.
“이쪽에서 잘못한 게 없는데 일단 사과를 한다고요?”
“대외적인 입장이라는 게 있잖아요. 이미지라는 게 있고요. 사람들 감정이 법처럼 정확하게 딱딱 잘리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특히나 더요. 다른 공인들이라고 죄다 구린 구석이 있어서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게 아니에요. 발표를 그렇게 내자는 거지 진짜 사과를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해요. 토씨 하나, 말투 하나,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나중에 꼬투리가 될 수도 있어요.”
“지금 이건 법조문을 쓰는 게 아니에요.”
“어떤 식으로 인식하느냐에 있어서는 다를 게 없는 문젭니다.”
차분하게 시작했던 회의는 어느새 점점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제법 이도하의 눈치를 보았던 더 브릿지 엔터테인먼트의 법무팀과 홍보 전략팀 직원들은 이제 이도하가 그 자리에 있는 것조차 까먹은 듯했는데, 실제로 이도하는 완전히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스크린에 뜬 기사들도, 차분한 듯 하지만 어조가 점점 격앙되어 가는 듯한 직원들도 하나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천 년 전.
이도하는 짧은 꿈처럼 아주 잠깐 보았던 천 년 전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붉게 어른거리던 소환진, 촛불, 비명 소리, 불에 탄 냄새, 바람, 흐느끼며 우는 소리, 살려달라고 빌던 목소리, 쇳소리. 잠깐이나마, 마주친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남은 푸른 눈동자.
왜 우르슬라가 아니었을까.
어떻게 아닐 수 있지? 무려 천 년이다. 막연하게 천 년, 하며 그게 고려시대인가 언제였나 긴가민가하던 때와는 다르게 직접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던 이도하는 이제 그 세월의 무게를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최초의 계약자가 고작 100여 년 전의 어느 18살 여자아이라고 하는데, 무려 천 년 전인 것이다. 설마 소환된 게 진짜 천 년 전의 사람일 리는 없고.
도대체 누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