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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93화 (93/250)

93화

“엄청 큰데.”

차이라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환진과 크기가 남다르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크냐 하면, 아무래도 이 동공 전체를 꽉 채우는 크기 같았다. 이도하의 소환진도 크기는 일반적인 소환진과 다를 것 없었는데 이건 어림잡아도 다섯 배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올라, 이 소환진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그 여인이 맹약을 만들어 낸 것 같다고 했지.”

동공 전체를 한 번 둘러본 시오한이 말했다.

“과연 비슷하긴 하네.”

“확실하지는 않고?”

“천 년 전이니까. 멸망한 왕국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화이람. 그 당시에 어떤 식으로 계약자를 소환했는지도 알 수 없으며… 계약자를 소환할 수는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해. 그대가 말했듯 이곳과 저곳의 틀어짐이 이올라라고 하는 여인의 힘 때문이라면, 그 전에는 그대의 세계도, 이곳도 똑같이 천 년 전이었을 텐데. 그대의 세계에서는 천 년 전에 소환되었던 계약자의 기록이 있어?”

“…없지, 그런 건.”

오즈가 이도하의 세계에 처음으로 공인된 건 1907년이며, 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도 10년 전 쯤에 제가 다른 세계에 갔다 왔다며 세상을 잠깐 떠들썩하게 했던 18살 어느 여자아이가 최초였다. 그래 봤자 고작 100여 년이었다. 천 년 전이라고 하면 이도하가 아는 지식으로는 제 나라는 고려 시대요, 세계사로 보면 십자군 즈음인 때일 텐데 계약자는커녕 특기자에 대한 기록도 겨우 찾을까 말까 한다. 천 년은 갖다 대지도 못할 숫자였다.

“소환은 곧 기원이라고 했지. 대체로 소환주들은 그 기원만큼이나 특별한 곳, 의미가 담긴 곳, 또한 웬만하면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을 곳에서 소환진을 그리고 소환을 시도해. 그게 반드시 좋은 곳이지는 않겠지만, 이런 곳이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야.”

시오한이 말했다.

“화이람, 이곳의 구조가 그대의 눈에는 어떻게 보여?”

이도하는 시오한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다시 보았다.

“꼭, 제단 같지 않아?”

천장이 낮은 동그란 동공, 새까맣게 타버린 듯한 검은 석벽, 두 팔을 뻗은 듯 양옆으로 이어진 복도. 그 안에 늘어선 좁은 감옥. 희한한 구조라고만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여하간 일반적인 감옥 같지는 않다. 이도하는 다시 시선을 내려 이 거대한 동공 안에 꽉 들어차는 거대한 소환진을 다시 보았다. 천 년. 천 년 전.

“목숨에는 목숨으로, 가교를 만들기 위한 매개는 피로 한다….”

손끝에 닿는 홈, 뻗어 나가고 얽히며 이어져 거대한 소환진을 이루는 그 선을 매만지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맹약은 소환주의 피를 필요로 한다.

“…이름도 안 남은 천 년 전의 그 왕국 말이야, 시오한.”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뭐 때문에 멸망했다고 했지?”

“마녀 사냥, 악마 숭배.”

시오한이 대답했다.

“…혹시 그게….”

“계약이었을지도 모르지.”

천 년 전. 멸망한 왕국. 악마 숭배. 피로 그리는 계약진. 아귀가 맞는다.

“그 계약주, 죽었다고 했어.”

이도하가 말했다. 우르슬라가 천 년 전의 계약주와 계약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떠올렸어야 했는데. 가볍게 옛날이야기처럼 흘려들었던 그 얘기가 이렇게 불쑥 다시 고개를 들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시오한과 눈이 마주친 이도하는 그가 묘하게 절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의아해진 이도하는 그를 향해 물었다.

“왜?”

“계약주가 죽었다고?”

“일단은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안 믿었는데, 이제 보니 진짜인 것 같아.”

“…그럴 수 없을 텐데.”

“뭐가?”

“그 여인의 특기가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라고 했잖아.”

시오한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의 계약주가 죽을 수 있지?”

“…그거야.”

이도하가 말을 흐렸다. 처음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죽었다고 했을 때 모두가 그렇게 물었다. 우르슬라의 특기가 시간을 다루는 힘이며, 또 인소더블인데 어쩌다가 계약주가 죽었대? 병으로 죽었나? 불치병이었나? 그런데 시오한이 물으니 전혀 다르게 들렸다.

“화이람, 만약 내게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 눈동자가 빛을 품은 듯 선명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죽을 수 있을까?”

“……”

이도하는 문득, 그저 빛이 없을 뿐인 이 어둠이 밀도를 가지고 아주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빈틈없이 아주 꽉 차, 그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고.

“나라면, 화이람. 세계가 다 으스러진다 해도 그대를 죽도록 두지 않아.”

시오한이 말했다. 여전히 평소와 같이 부드럽고 달큼한 말투였다.

“그대를 몇 번이고 죽여서라도.”

“…‘되돌아가는 태엽.’”

묵묵히 서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꽉 잠기고 갈라져 있었다.

“그거였구나.”

태엽. 하나로 맞물린 수십, 수백, 혹은 수천 개의 톱니바퀴. 시간에 간섭하는 힘. 어쩌면 우르슬라는 세계를 아주 복잡하고 정교하게 맞물린 태엽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 여자가 시간을 되돌린 거야.”

천 년 전의 세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세계와 동시에 맞닿아 있는 우르슬라가 끊임없이 어느 한 시간을 되돌리고 또 되돌렸다면…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그 시간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다면.

끼릭- 비틀어진 쇳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손톱이 칠판을 긁어내리는 것처럼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기괴한 소리. 응당 맞물려 돌아가야 할 것들이 억지로 붙잡혀 위태롭게 흔들리며… 부서질 것처럼.

“화이람.”

따뜻한 것이 손에 닿았다. 이도하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시오한이 그의 앞에 다가와 손을 감쌌다. 저도 모르게 숨도 쉬지 못하고 있던 이도하가 헉, 숨을 토해냈다. 이도하는 가쁜 숨을 내쉬며 멍하니 시오한을 보다, 시선을 내려 제 손을 감싼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감쌌다기보다는, 꼭 절 붙잡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단단하게 잡고 있지만, 딱 아프지 않을 정도였다.

거짓말.

이도하는 문득 깨달았다.

“…당신 말이 맞아, 시오한.”

이도하가 말했다.

“내 힘이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었다면, 당신은 못 죽어.”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나라도 그랬을 거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시간을 되돌렸겠어.”

세상에 제가 최고인 줄 알던 어린이 이도하는 자라 퍽 정상적으로 사고하게 되었지만, 사람은 근본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도하는 여전히 제 좋을 대로 제 좋은 것만 하는 이도하였다. 만약 시오한이 죽는다고 하면, 이도하는 그를 죽도록 놔두지 않을 테였다. 그가 좋든 싫든, 세계가 부서지든 말든.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못하겠지. 행여나 나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 이렇게 붙잡으면서도, 그 순간에조차 고작 손목 하나 아프게 못 하는 당신은.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이건 안 되지. 역지사지 좆 까라 그래.”

이도하가 험악하게 말했다.

“들여다 봐, 화이람.”

“뭐? 뭘?”

시오한이 시선을 돌렸다. 이도하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흐릿하게 바닥이 보였다.

“시리스가 그림자의 흔적을 읽는 걸 보았잖아.”

이도하는 믿을 수 없어 시오한을 보았다.

“당신 지금… 나보고 천 년 전의 기억을 읽으라고?”

“그대밖에 할 수 없어.”

할 수 있다. 할 수 있지만, 할 수 없었다. 암군 사령관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인 시리스도 고작 며칠의 정보를 읽는 게 최선이었다. 일이십 년도 아니고 무려 천 년이다. 이도하도 생전 써본 적 없었던 힘을 써야 할 수준이었다. 바다를 갈라냈던 힘도 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힘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오즈에서 그가 사용하는 모든 힘은 시오한의 마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도하가 잡힌 손을 빼냈다.

“미쳤어? 당신 큰일 나.”

“화이람.”

“안 한다고!”

이도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쩌렁쩌렁 목소리가 동공에 울렸다.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국제법이고 뭐고 차라리 그냥 그 여자한테 쳐들어가서 물어보고 말지. 그러면 돼.”

“믿을 수 있겠어?”

시오한이 다시 이도하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옅은 숨이 느껴졌다. 시오한이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따뜻한 눈동자가 보였다. 이도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화이람, 그렇게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채로 지내지 말아. 그대만 괴로워져.”

세계 안에서는 인식할 수 없는 오류. 그 오류를 인식했던 순간 제가 느낀 두려움을 시오한이 알아챈 것이다. 망할 계약. 망할 맹약. 이도하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헤집었다.

“시오한, 그건 그냥-”

“나는 그대를 소환한 계약주야, 화이람.”

“…알지.”

“그대를 소환함으로써 이미 증명을 다 했으며,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이고, 제1기사이기도 하지.”

꼭 이도하가 웃는 것처럼, 시오한이 씩 웃었다.

“내가 제일 세.”

“……”

이도하의 얼굴을 본 그가 낮게 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말했듯, 나는 그대를 아주 오래오래 볼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아. 마력 조절은 그대보다 내가 한 수 위야.”

사실 세 수쯤 위지. 시오한은 농담했지만,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았잖아. 갑자기 왜 이래?”

불만 같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냥, 속에서 툭 나온 말이 그랬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도하도 말해놓고 속으로 흠칫 놀라고 있었다.

“화이람, 그건 정말 오해야.”

시오한이 태어나서 그런 희한한 말은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이도하를 보더니 말했다.

“나는 모든 시간의 그대를 사랑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그대를 가장 사랑해.”

“…뭐?”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이 불의의 기습에 이도하는 거의 혀를 씹을 뻔했다. 불현듯 속이 확 달아올랐다. 지금 뭘 들었지? 시오한은 고개를 숙여 그런 이도하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래서 그래.”

아니 지금… 놀랍지는 않은데 그래도… 진짜 이러는 게 어디 있냐. 이도하는 그냥 말문이 턱 막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속이 울컥해서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 차례 마른세수를 한 뒤에야 간신히 한숨이나마 내뱉었다. 과연 계약주다. 말 듣게 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다.

“…그래, 당신이 제일 세다.”

이도하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깊게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감았다. 우우웅- 주변의 공기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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