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시오한.”
“그렇다면 바로 잡아.”
시오한이 말했다. 이에 눌려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져 쓸어주며 그가 잔잔히 웃었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대는 할 수 있어.”
단정한 손가락이 이도하의 뺨을 쓸었다.
“그대만 할 수 있어.”
알지? 시오한이 눈웃음 지었다. 화이람. 그가 불렀다. 화이람. 거듭 부르는 그의 손을 잡아 이도하가 제 오른쪽 눈을 덮었다. 화이람, 그렇게 새겨진 이름이 그의 손바닥 안에 온전히 담기도록. 반쪽은 어둠, 다른 반쪽엔 시오한이 보였다. 보이지 않는 반쪽보다도 시오한이 더 또렷했다. 이도하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쉬었다. 그가 시오한의 손을 꽉 쥐었다. 이도하가 문득 물었다.
“시오한.”
“응, 화이람.”
“내가 갑자기 아저씨가 되면 어떡할래.”
“그렇다면 나이 든 그대를 보겠지.”
“아니, 진짜 막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이도 빠질까?”
난데없는 질문인데 받아치는 변죽도 좋다. 과연 시오한이었다. 이가 웬 말이야.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풉 웃었다. 그런데 물어보는 시오한은 사뭇 진지해 보였고, 그래서 이도하도 아주 잠깐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가 대답했다.
“그건 틀니 하면 돼.”
“그럼 여전히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을 테니, 내가 해 줘야지.”
“아, 또 밥이야? 당신 한국 사람이야?”
“잘 먹어야 그대를 오래 볼 수 있잖아.”
“이것도 좀 생각해 줄래?”
얼굴 말이야, 얼굴. 이도하가 제 얼굴 앞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게 왜?”
시오한이 물었다. 정말 저는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빙그레 웃었다.
“그대는 할아버지가 돼도 귀여울 거야.”
“…인정.”
“그대가 귀엽다는 걸?”
“미친. 당신 대단하다고. 내가 실언했으니까 이제 귀엽다는 하지 말자.”
“그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늘 옳지.”
“제발, 좀.”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시오한의 손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건 예상치 못했는지 시오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여운 건 이런 거지. 이도하가 쪽쪽, 여러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시오한이 허리를 숙이더니 은근히 얼굴을 가까이했다. 푸하하- 이도하가 웃어 재끼며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내가 요만한 꼬맹이가 되면 어쩔래. 나 그때 진짜 막장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나도 쥐어박고 싶을 정도로.”
신은호 정도면 귀여운 축에 속하지. 무심코 생각한 이도하는 잠시 그 이름에 걸리고 말았다. 아, 신은호. 제 계약주를 건드리면 너도 죽여 버리겠다며 엉엉 울던 꼬맹이.
“사랑으로 키울게.”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는 조금 걸쩍지근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모리온의 일이야 시오한이 당장은 무엇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잠시 미뤄두어도 될 것 같았다. 그가 본 암군은 유능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모리온은 오히려 안전할 것이다.
“사랑으로 될 수준이 아닐 텐데.”
이도하는 좀 아득하게 말했다. 천지 분간 못 했던 이도하…. 일반적인 조그만 꼬맹이가 떼를 쓰고 성질을 부려 봐야 피곤하고 짜증 날 뿐 제압할 수 있지만, 꼬맹이 이도하는 그 성질이 단순한 투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대에 대한 평가가 너무 박한걸. 지금 그대를 봐.”
“내가 왜?”
“어린 그대는 아주 착하고 다정할 거야. 그대는 무엇도 해치지 않았을 거고, 옳은 일만 하고 싶었을 거야.”
“…아니, 딱히….”
그냥 앞뒤 분간 못하고 제가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아는 망종이었을 뿐인데.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시오한이 워낙에 확신에 차 있어 그러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 정성껏 저를 포장해 주는데 저가 아니라고 빡빡 우기는 것도 이상했다. 떨떠름해하는 이도하를 보며 시오한이 아이를 어르듯 웃었다.
“세상이 그대를 담기에 버거워했을 뿐이지. 하지만 화이람, 이리스티리움은 광활하고 거대하며, 나는 황제이니 그대가 무엇을 해도 다 괜찮아.”
“…정말 피의 실드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그저 그대가 어여뻐 어쩔 줄 모를걸.”
“큰일 날 느낌인데. 이 나이까지 계속 천지 분간을 못 하는 망종이 될 수도 있겠어.”
이도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말 객관적으로, 제가 망종까지는 아니어도 감당이 좀 어려운 사고뭉치였다는 것은 인정했다. 제 자신이라도 예뻐하겠다고는 말 못 한다. 예뻐하기는커녕 아주 불 맴매를 듬뿍 날렸을 게 분명하다.
“…그냥 이대로 둘까?”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이 말없이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냥 이대로 살까. 내가 지금 24살인지 35살인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냥 그래왔던 것처럼 모르는 척 살까.”
“그대가 그러고 싶다면.”
이대로 살 자신은 있었다. 이대로 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시간이 더 뒤엉키지 않는다고 하면 그럴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떤데.”
그러나 그런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아온 것처럼, 다시 또 시간이 엉킨다고 하면 그게 바로 이도하가 모르는 채로 살아갈 문제였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내가 당신을 잊을 수도 있잖아.”
도대체 언제 어떻게 뒤엉켜 버렸는지도 모르는 시간이 다시 풀어질 수는 있는 건지, 풀어낸다면, 그 시간이 온전할지. 이도하는 자신 없었다.
2001년에 16살이었던 이도하. 그리고 2003년에 8살이었던 이도하. 2019년에 24살인 이도하.
사실은 지금 제가 몇 살인지조차 알 수 없어진 지금, 만약 이 뒤엉킨 시간들이 풀리게 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 혹은, 아주 잘라 내버린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시간이 남게 될까.
24살 초가을, 당신을 만난 나는.
“내가 잊지 않아,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그대의 웃음, 목소리, 온기… 절대로 잊지 않을게.”
“…….”
“그러니 그대는 다시 내게 와 주기만 해. 그러면 돼.”
“…안 올 도리가 있겠어. 서른 번씩이나 불러대는데.”
짐짓 투덜대면서도 이도하는 시오한을 끌어안았다.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이 시간이 사라진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잊는다면, 꼭 다시 불러, 시오한.”
“응.”
“내가 좀 옹고집이거든. 나이 들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는 진짜 말도 못 했어. 그래도 또 그렇게 계속 불러주라.”
포기하면 안 돼. 시오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이도하가 말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를게, 화이람.”
“…아무리 그래도 설마 내가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이도하가 웃었다. 그래도 좋다. 시오한이라면 능히 그럴 것이다. 그러면 저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고집에 밀려 응답하고 말겠지. 그렇다면 되었다. 이도하는 제가 또다시 제게만 하찮고 뻔뻔한 이 황제를 좋아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다. 잔뜩 털을 세운 고양이 옆에 가만히 앉아 그저 기다리는 것처럼 그는 저를 데리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 먹자, 할 것이고 그러면 저는 또 어리둥절하게 밥이나 먹을 것이다.
“…시오한.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성도 밖의 그 오래된 유적에, 소환진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잖아.”
“그 여인의 소환진일지도 모르겠네.”
천 년 전 이름 없는 왕국의 유적. 천 년 전의 계약주와 계약했을지도 모르는, 시간에 간섭하는 인소더블.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였다.
“지금 확인해 보고 싶어.”
“응.”
이도하의 눈에 섬광이 번뜩인 순간, 다시 주변이 바뀌었다. 까마득한 성벽 밑으로 달랑거리던 발아래에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바닥이 닿았다. 찬란한 성도의 불빛들도, 달도 사라지고 한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아주 새까맣기만 했다. 차가운 석벽에서 흘러나오는 싸늘한 공기, 습한 먼지 냄새- 이도하가 사형수 웨이드에게 소환되었던 그 지하 감옥이었다.
“불을 밝히지 마, 화이람.”
허공에 불을 태우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왜?”
“천 년 동안 빛이 들지 않았던 곳이야. 만일을 위해서라도 그대로 두는 게 좋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도, 이도하는 시오한이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잠깐 고민한 이도하는 곧 수긍했다. 본래 범죄 현장도 일단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보존하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한 치 앞이나 겨우 보이는 깜깜한 어둠은 천천히 익숙해졌다. 그나마도 아주 어두웠지만, 적어도 코앞에 있는 시오한과 부딪치지 않을 정도가 돼서야 이도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굴러다니는 먼지뿐, 돌아다니는 벌레도 없었다.
잘 보니 석벽마저 그을린 것처럼 새까만 색이라 위압적이고 음흉했다. 중심에 선 그들을 기준으로 양옆에 긴 복도가 뻗어 있었다. 그 복도에 무엇이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무너졌을 한쪽 끝에서 밤공기가 불어와 맴돌다 간다. 웅- 귓바퀴를 맴도는 것 같은 조용한 울림이 그 바람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도하는 무릎을 굽혀 바닥을 쓸어보았다. 어두운 것도 그렇지만 돌이 반듯하지 않고 거칠어 그냥 봐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만져보면, 손끝에 미세하게 걸리는 홈이 있었다. 이도하는 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쭉 따라가 보았다. 중간에 끊어지고 뭉개진 곳이 더러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는 와중에 또 다른 선과 만나고 만난다. 착각이 아니었다.
이건 분명 소환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