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더 벌어지지 않겠지?”
이도하가 문득 물었다.
“무엇이?”
“시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2년이나 틀어졌잖아. 오늘 하루, 내일 하루로 보면 하루 이틀밖에 차이나지 않는데 그게 쌓여서 그렇게 된 건가.”
그런 거라면 언젠가 이 시간이 쌓여 더 벌어질지도 몰랐다. 2년이야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3년, 4년, 10년, 만약 그 이상이 되면? 그때는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도하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당신은 알고 있었어?”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이 고개를 저었다.
“몰랐어.”
그런데 시오한이 그렇게 말하니, 이도하는 또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오즈와 저쪽을 왔다 갔다 하는 계약자가 저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아무도 그 틀어짐을 알지 못했을까? 특별히 예리하지 않아도 누구나 눈치챌 만한 시간차였다. 더구나 이리스티리움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재앙을 기점으로 벌어진 차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이도하는 번뜩 무언가를 떠올렸다.
되돌아가는 태엽. 시간에 간섭하는 특기를 가진 인소더블.
“우르슬라.”
“우르슬라?”
시오한이 되물었다. 이도하는 거듭 맹약에 대해 물어놓고도 시오한에게 우르슬라를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김윤혜와 과장 좀 보태서 백 번 정도 얘기해 보았지만, 시오한은 오즈의 사람이며 계약주였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올라.”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널리 알려진 우르슬라의 계약명이었다.
계약자들의 계약명 또한 어지간해서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저쪽의 물건들이 오즈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계약명 역시 오즈의 이름이기에 어차피 누군들 들어도 오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소더블로서 가장 처음으로 계약자가 된 우르슬라는 뭐든지 예외였다. 첫 인소더블 계약이라는 충격에다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노출되었으니 결국 한둘쯤은 기억하는 사람이 생겼고, 이도하도 그중 하나였다.
“들어본 적 있어?”
잠시 생각해 본 시오한은 곧 고개를 저었다.
“누구이기에?”
“다른 나라의 또 다른 인소더블. 그 여자의 특기가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야. 그리고 당신이 본 그 천 년 전의 고서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기록이 저쪽에도 있었는데 그게 그 여자의 기록이었어.”
“그 여인이 천 년 전의 이곳에 와서 썼다는 말이야?”
시오한이 물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글씨체가 달라. 근데 그건 맹약에 대한 기록이었잖아, 시오한.”
얼핏 미간을 구긴 이도하가 말했다. 우르슬라의 일을 생각하면 정신이 없어지고 헷갈리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시오한은 생각에 빠진 이도하의 얼굴을 잘 담아두려는 사람처럼 찬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인이 맹약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구나, 화이람. 그 기록은 그녀의 맹약자가 남긴 기록이라고. 하지만 그러면 그 여인은 천 년 전의 계약주와 계약을 했다는 말이 되는데.”
“그래서 맹약을 만들어냈다면?”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에게 향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묻는 것과 비슷했다. 김윤혜도 그렇게 물었었다. 그런데 시오한이 말했다.
“천 년의 간극을 맹약이 어찌 메울 수 있기에?”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우르슬라가 천 년 전의 소환주와 계약을 했다는 가정부터 틀렸나?
“아씨, 들어봐, 시오한. 두서없어도 일단 아는 거 다 말해볼 테니까.”
“응.”
머리를 헤집은 이도하가 아주 양반다리를 하고 시오한을 마주 보았다. 까마득하게 높은 성벽 바닥에 아슬아슬하게 앉은 그들 위로 휘영청 달이 떠 있었다.
“우르슬라가 처음 계약자가 된 게 2001년이야. 나는 16살이라 인소더블 판정을 받기도 전이었고, 또 한 명의 인소더블인 해밀턴 블랙은 그때나 지금이나 있는 듯 없는 듯 살았으니… 사실상 우르슬라가 유일한 인소더블이었어. 지금이야 나까지 해서 깨졌지만 인소더블은 계약자가 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던 때였는데 그런 때에, 유일한 인소더블이 계약자가 된 거야. 당신은 저쪽의 생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잖아. 그 여자의 나라가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
시오한이 조금 미간을 좁혔다. 이도하는 그가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다 그런 것이라 여겨 말을 이었다.
“놀라운 건, 당신이 내 계약주라는 건 지구 반대편의 개똥도 아는데 그 여자의 계약주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라. 엘하시온이라는 이름만 알려져 있대. 뭘 하는 사람인지, 우르슬라와 계약을 해서 뭘 했는지, 계약주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아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죄 카더라 하는 헛소문뿐이지. 우리가 인소더블 계약자를 보유하고 있다- 떠들어 대며 세상이 곧 다른 시대를 맞이할 것처럼 설레발을 치더니 언젠가부터 그 여자를 누구에게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다고. 내가 18살이 돼서 인소더블 판정을 받은 후로는 그 여자를 봤다는 소리조차 없어. 그때가 지금처럼 매체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는 걸 감안해도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뭔가 켕기는 게 있으니 그렇게 숨기는 거 아니겠어?”
시오한 더러 들어보라고 늘어놓은 소리지만 정작 그동안에 이도하의 머리에도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런데 천 년 전의 오즈라면 땡잡은 거 아닌가? 천 년이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우르슬라의 능력도 보여줄 수 있고, 지금껏 모르던 오즈에 대해 더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니 독일이 오히려 계약과 관련된 부분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였을 수도 있었다. 이게 숨길 이유가 되나? 너무 엄청난 일이라 독식해 놨다가 나중에 공개하려고 했던 건가? 지금은 뭔가 틀어졌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도하는 답에 근접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시오한이 말했다.
“화이람, 이상한데.”
“그래, 이상하다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그대의 세계는 2019년이 아니야?”
“맞아.”
“헌데 어찌 그대가 2001년에 16살일 수가 있지? 그대는 지금 24살이잖아.”
“…어?”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뒤통수를 아주 세게 후려 맞은 것 같은 충격이 그를 덮쳤다. 머리가 얼얼해지고, 핏기가 싹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손발이 싸늘해졌다.
이곳에서는 18년 전, 저쪽에서는 16년 전. 2003년 10월 28일. 이리스티리움 대재앙. 제가 지금 24살이니, 8살이었던 때.
2001년. 우르슬라가 계약자가 되었던 해. 제가 16살이었던 해….
이도하가 제 입매를 감싸 안았다. 명치를 세게 눌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2001년에 우르슬라가 계약자가 되었던 소식이 알려지던 날을 이도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긴급 속보로 뉴스에 떴다고 했다. 16살, 중학교 3학년이었던 이도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서야 그 사실을 확인했다.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고, 컴퓨터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여름날이었고, 아주 더웠다… 집에 들어오는 그를 맞으며 그의 어머니가 말했었다. 도하야, 독일의 그 인소더블 있잖아, 우르슬라. 계약자가 됐대….
2001년.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현재 24살인 이도하가 6살이어야 했던 나이.
분명 저는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독일의 인소더블로 잘 알려져 있던 우르슬라 발터가 계약자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오늘 오전 10시경, 지난 16일 밤 소환주의 부름을 받아 소환되었던 우르슬라가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쳤다고 발표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낡은 티브이 화면, 회색 정장을 입고 있던 리포터, 그 뒤로 비춰지던 베를린의 풍경, 후덥지근했던 여름날의 공기, 제가 입고 있던 교복 바지 속에 찬 열기. 그 모든 걸 분명하게 기억하는데.
시간이.
시간이 완전히 엉켰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르슬라. 자그마한 체구에 짧은 갈색 머리, 푸른 눈에 안경을 쓰고 가운을 입고 있던 여자. 반복되는 뉴스 화면 속에서 담담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짧게나마 웃던 모습.
“정신 차려, 화이람.”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목을 잡았다. 서늘한 피부 위로 따뜻한 체온이 그를 확 감싸 안았다. 이도하가 혼란스럽게 그를 보았다.
“난 그때 분명히 16살이었어, 시오한.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고.”
“화이람.”
이도하는 혹시 이것조차도 제 기억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이리스티리움 재앙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건 제 기억만의 문제일 수 있지만, 이건 아니었다. 전 세계가 그 해를 기억하고 있었고, 모든 자료와 그 당시의 뉴스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2001년에 독일의 우르슬라 발터가 인소더블로서는 최초로 계약자가 되었다고. 이건 기억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문제였다.
“무려 10년이야. 10년이 엉망으로 엉켜 있는데 아무도 몰라. 계산까지 해 보면서도 나도 몰랐어!”
“화이람, 세계의 오류는 세계 안에서 인식할 수 없어. 세계 밖에서조차 쉽지 않아.”
뻔한데도 인식하지 못하며, 눈에 보이는데도 보지 못하게 되고, 아는데도 잊게 된다. 이도하는 문득 공포에 사로잡혔다. 생전 경험해 본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뻔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나마 겨우 했다. 이런 오류조차도 인식할 수 없다면 뭐가 더 얼마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까마득하고 깜깜한 발밑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숨을 들썩이는 이도하의 목에 시오한이 손을 갖다 대었다. 쇄골 위로 손바닥을 덮고, 지그시 눌렀다.
“더 있을지도 몰라.”
1년, 2년, 했던 사소한 차이가 사실은 10년이 될까봐. 아주 잠깐 두려워했던 가정이 사실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