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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90화 (90/250)

90화

시오한이 부드럽게 웃었으나, 이도하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극혐 했을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있겠어.”

“사진 같은 거 없어? 아, 그림.”

“내 어릴 적 모습?”

“어.”

“있었지.”

“지금은 없어?”

시오한은 잠시 대답 없이 이도하의 머리칼만 제 손가락에 돌돌 감았다. 뭔가 대답하기 싫은 게 있을 때 그는 이렇게 딴청을 피우고는 했다. 그러다 결국 그가 답했다.

“사라졌어. 이리스티리움 재앙 때 궁이 무너지면서 불에 타서.”

“아.”

잠시 뒤 이도하가 물었다.

“복원은?”

저쪽에 갖가지 희한한 능력을 가진 특기자들이 많은 만큼 계약자를 소환해서 복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기억을 이용한 특기자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키오라이고, 그 이후로 오즈의 모습을 저쪽 세상에 재현해 내는 계약자는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아마도 그런 능력을 필요로 했던 사람이 오즈에 없어서였을 것이지, 그와 같은 특기를 가진 특기자가 없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어.”

“실패했다고?”

어째서? 이도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궁이 통째로 무너지고 많은 것들이 불타 사라졌다면 시오한의 초상화뿐 아니라 여러 귀한 것들이 사라졌을 것이다. 되돌리려는 노력이 많았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게 중 그림 한 장 복원해 낼 수 있는 계약자가 없었다는 것은 이상하게만 들렸다. 대수롭잖은 것도 아니고 황태자의 초상화이며, 여러 번 시도했다는 걸 보면 그렇게 취급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때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그래, 화이람. 그 재앙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상하고 기이한 발생이었고… 아직까지도 진상은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아.”

“…….”

18년 전. 저쪽에서는 16년 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던 그 알 수 없는 시간의 어긋남까지. 이도하는 또다시 드는 기이한 괴리감에 사로잡혔다. 저쪽, 그의 세상에서 느꼈던 것보다 좀 더 확실하고 또렷했다.

“…아쉽네.”

이도하는 복잡한 속내를 감추고 말했다. 사실 마음이야 이것저것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시오한은 18년 전의 이리스티리움 재앙을 대해 언급하는 것도, 떠올리는 것도 꺼려 하는 것 같았다. 본인 마음이 어떻든 이도하는 제가 물어보면 그가 대답해 주리란 것을 알았지만,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다.

어렵다, 진짜.

끙, 신음을 삼키며 이도하는 제 얼굴에다 베개를 푹 덮었다. 모든 걸 특기로 다 해결하려고 했던, 천지 분간 못 하던 어린이 이도하. 잔뜩 밀린 방학 숙제를 특기로 해결하지 못해 엉엉 울던 이도하. 지금 그의 기분이 딱 그랬다. 방학 숙제는 잔뜩 쌓여 있는데 그걸 풀 방법은커녕 숙제를 떠올리는 것조차 막막한 기분.

한편 시오한은 그런 이도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푹 덮은 베개 위로 삐죽 나온 머리칼을 연신 만지작거리는 시오한의 얼굴이 복잡했다.

“…화이람.”

응. 이도하가 답했다. 베개에 묻혀 소리도 발음도 잔뜩 뭉개졌다. 그냥 윽, 하고 소리만 낸 것 같았다. 뭔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느라고 반사적으로 그냥 반응한 것에 가까워 보였다. 시오한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잠깐 돌다 사라졌다. 이도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은 꼭 어린아이가 손끝을 만지작거리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망설임이 묻어났다. 이내 그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쓰게 웃고 말았다. 시오한이 베개를 뺏었다.

“달구경 가겠어?”

“엉?”

시오한이 이도하의 등 뒤로 쑥 손을 밀어 넣으며 그의 오금을 받쳐 들었다. 이도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처 반항하기도 전에 몸이 붕 떴다.

“?!”

깜짝 놀란 이도하가 얼른 시오한을 붙들었다.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시오한이 무려 그를 안아 든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쉬, 화이람. 가만히 있어.”

“시오한!”

“화이람, 쉿.”

‘강아지를 안아 들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요.’ 사실 본관이 강아지라는 어느 개 전문가의 말이 떠오른다.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요. 이도하가 지금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맙소사.

이도하는 어지간하면 남들보다 눈높이가 위에 있는 사람이었고, 올려다볼 일은 별로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는 늘 평균보다 컸다. 호리호리한 편이긴 해도 키가 그 정도이니 용맹한 초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누군가에게 안긴 적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키가 큰 남자, 그것도 이도하처럼 인상이 서늘해 보이고 실제로도 성격이 곱지는 않은 남자를 안아 들려는 정신 나간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늘 상식을 넘나드는 그의 계약주가 무려 이도하를 안아 들고 있었다. 공주님처럼 아주 곱게. 보는 사람도 없건만 이도하는 혼자서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난리가 났다. 떨어질까 봐 저도 모르게 시오한의 목을 꽉 붙든 손도 부끄럽고, 하여간 그냥 다 난리였다.

흔들림에도 아랑곳 않고 시오한은 아주 안정적으로 이도하를 안은 채 방을 나섰다. 시오한의 침전 앞에는 늘 기사들과 궁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는 그는 최대한 푹 얼굴을 숙였다. 그들도 고개를 숙일 것이지만 이도하는 그들이 절 보는 것도, 제가 그들을 보는 것도 다 피하고 싶었다.

“따르지 말아라.”

시오한이 분명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말했고, 궁인들이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이 조용히 고개만 숙였다. 예, 폐하- 하고 답하는 소리는 없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꼬집지 않았다. 과연 황제를 가장 지척에서 모시는 궁인들답게 눈치가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조금 멀어지자 이도하가 홱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의 어깨 너머로 그들이 꽤 멀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이도하가 말했다.

“도, 도약할게. 도약하자.”

“힘을 아껴야지, 화이람.”

“아, 그거 얼마나 든다고!”

그는 반항해 보았다. 그러나 특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도하는 전에 없이 기가 찬 동시에 억울해졌다. 이 인간이 지금 진심이구나. 다 해줄 것처럼 굴더니 사람 좀 안겠다고 특기를 못 쓰게 하냐! 육체적으로야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도하의 시선을 받은 시오한이 아주 만족스럽게 웃었다.

“기가 막힌다, 진짜.”

이도하가 허탈하게 말했다.

“그대와 한순간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래.”

“내가 질문을 잘못 했네.”

언제부터 예뻤냐고 물어볼 게 아니었다. 그거야 뭐 태어날 때부터 그랬겠지!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했냐.”

“쉬, 화이람. 누가 들으면 어떡해?”

“당신 쳐다보면 안 된다며? 안 그런다며?”

“난 너그러운 황제라서. 몰래 훔치는 시선까지 어찌 벌하겠어.”

“와….”

이도하는 그냥 체념했다. 황제의 뻔뻔함으로 버무린 똥고집을 무슨 수로 이기나. 체념하고 나니 좀 웃기기도 했다. 제가 이렇게 안겨 있는 꼴이며, 절 안겠다고 고집을 부려놓고 저리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시오한도 웃기고, 이전에 제가 시오한을 안았을 때가 생각나서 또 웃겼다.

이렇게 쪽팔린데 심지어 그때 저는 귀여운 병아리가 쫑쫑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었고, 심지어 시오한은 저보다 키가 좀 더 크다. 그림이 퍽 우스웠을 텐데 시오한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으니, 이제 뻔뻔함으로 그를 이겨 볼 생각은 벼려야 할 것 같다.

하여 이도하는 결국 하늘이 아주 잘 보이는 예쁜 테라스까지 시오한에게 곱게 안겨 운반되었다. 황제가 움직인다는 소리에 후다닥 달려와 준비라도 한 것처럼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은은한 조명까지 운치가 아주 그만이었다. 의자를 앞에 두고도 시오한은 굼뜨게 미적거리다 이도하를 아주 천천히 내려놓았다. 이도하가 주먹으로 시오한의 가슴을 툭, 쳤다. 아파, 화이람. 그가 가슴을 문지르며 엄살을 부렸다.

“대박이긴 하다.”

성의 높은 옥상 중간쯤 마련된 테라스는 사실 테라스처럼 보이진 않았다. 공간은 제법 넓었으나 아래가 까마득한데 난간이 하나 없었다. 지난번에 시오한이 그를 소환했던 옥상과는 또 달랐고, 그래서 풍경도 조금 달랐다. 이도하는 까맣게 아래가 보이지도 않는 성벽 가에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았다. 시오한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새까만 하늘에는 이도하의 세상에서 보는 달보다 좀 더 크고, 조금 더 창백한 것 같은 달이 떠 있었으며 아래로 드넓은 성도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몹시 예뻤다.

“성도의 밤은 언제나 아름다우니.”

“…그러게. 달이 예쁘네.”

달이 예쁘네. 그렇게 말한 이도하는 순간 혼자 손끝을 움칠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말하고 보니 떠오르는 구절이 있어서였다. 시오한이 알려나. 이도하가 그를 흘끔 바라보았다. 시오한은 시선을 멀리 주고 있었다. 빛이 닿는 그의 모든 선이 완벽했다. 길게 늘어진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이 불 때마다 반짝인다. 달보다 이 사람이 더 근사한데? 무심코 생각한 이도하가 그를 불렀다.

“시오한.”

시오한이 즉시 그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는다. 이도하도 씩 웃었다.

“달이 참 예쁘네.”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그대가 더 예뻐.”

푸하하-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무척 즐거워져, 이도하는 편안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시오한이 그를 따라 천천히 다리를 흔들었다.

저쪽은 가을을 넘어 겨울에 다가가고 있는데, 이리스티리움은 이제 완연한 여름에 접어들어 가고 있었다. 우기에 들어 아직까지는 바람이 선선했지만 공기 중에 꿉꿉한 먼지 냄새가 감돌았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안온하고 평온했으며, 마음이 편안하게 풀어졌다. 이 순간이 아주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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