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리, 당신 스스로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끼익- 그네가 멈추었다. 발뒤꿈치가 흙바닥을 긁어 자국을 만들었다.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나 브라운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
‘미안해요, 도와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도하는 우두커니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두 줄로 자국이 난 흙바닥만 멍하니 응시하면서. 그는 혼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끼익- 낡고 녹슨 그네 소리가 났다.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시오한이 앉아 있었다. 그의 세상에, 신은호의 학교에, 낡은 그네에.
꿈이구나.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
‘응, 화이람.’
여느 때처럼 그는 웃으며 답했다.
‘…정말 우리가 만난 적, 없어?’
‘그런 적은 없어.’
‘거짓말.’
거짓말. 그 말에 시오한은 여전히 웃기만 한다. 아무 말도 않고. 하지만 당신 말이 맞아. 이도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저는 그와의 계약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고, 그는 제게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가 제게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이쪽이 더 이치에 맞고, 합리적으로 보였다. 그냥 이대로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런가 보다, 하고 내버려 두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을까. 애초에 무언가를 잊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다 괜찮아,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제 꿈이라 제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었다. 이도하는 그넷줄에 머리를 기대며 시오한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녹슨 쇠에서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다 괜찮아.’
이도하는 눈을 떴다. 누군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허리 즈음에 얇은 이불이 덮여 있었고 저는 엎드린 채 푹신한 베개를 베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았는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진짜 잤네. 이도하가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눈앞은 가물가물하지만 머리는 아주 개운했다.
시오한은 그의 옆에 앉아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굽혀 그 위에 서류를 올려놓은 채 들여다보고 있다. 왕관도 없었고, 이도하에게는 정복보다 더 익숙한 침의 차림이었다. 정복도 물론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며 거의 성스럽다시피 하지만, 편안해 보이기야 침의가 제일이었다.
이도하는 엎드린 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표정이 없는 시오한은 정말로 사람이라기보다는 조각 같았다. 눈을 깜빡이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이도하에게는 참 낯선 모습이었는데, 그는 또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생겼냐….
시오한은 한참이나 집중하여 서류를 보더니 그 위에 무언가를 적었다.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언뜻 봐도 가벼운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단단한 받침도 아니고 무릎 위에 대고 쓰려니 종이가 이리저리 구겨져 불편해 보였고, 그의 손에도 잉크가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이도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도하는 갑자기 가슴이 찡, 하고 아려왔다. 그 순간 시오한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살아있는 조각상에 신이 후, 하고 생명을 불어 넣은 순간처럼 부드럽게 표정이 풀렸다.
“화이람. 일어났어?”
“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어.”
“그대가 여기 있으니까.”
시오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며 보고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바깥은 어느새 해가 거의 다 진 밤이었다. 이도하는 그제야 제가 누운 반대편으로 꽤 많은 서류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나도 아깝거든.”
이도하는 잠깐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곧 알아차렸다. 잠들기 전 자라는 소리에 제가 아깝다- 했던 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생각나네.”
따지고 보면 고작 몇 달 전인데 아주 옛날 같다. 돌이켜 보면 이게 그들 사이에 역사가 꽤 깊은 침대였다. 바닥 없는 힘을 펑펑 쓸 줄이나 알지 절약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이도하가 사치스럽게 시오한의 마력을 펑펑 날려 먹었고, 시오한도 인내라고는 없이 죽지 않을 만큼만 회복돼도 이도하를 소환하느라 침대 신세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때였다.
“그때 당신 걸을 수 있었지?”
“아, 억울한걸. 그때 난 정말 쇠약했어, 화이람. 숟가락도 못 들었잖아.”
시오한이 손을 까딱여 보였다. 그건 그렇지. 이도하도 수긍했다. 숟가락이 무겁다는 말은 좀처럼 잊기 힘든 말이었다. 시오한을 올려다보고 있던 이도하는 문득 장난기가 솟았다.
“당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예뻤나?”
시오한은 당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 술 더 떠 고개를 기울였다. 머리칼이 한쪽으로 치우쳐 쏟아졌다.
“내가 예뻐?”
“거울 보면서 예쁘다고 생각한 적 있다, 없다.”
“어떨 것 같아?”
“아, 질문에 질문 금지.”
“없다.”
“와.”
이도하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건 진짜 거짓말이다.”
“진심인데. 그대가 믿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 건지.”
시오한이 눈으로 웃었다.
“아, 오케이. 거울 보면서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 있다, 없다.”
“거울을 보면서 특별히 감상을 가져본 적이 없어.”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모름지기 사람이란 거울 앞에서 전지적 본인 시점으로 보게 되기 마련인데. 그러면 평범한 부분도 마음에 안 차게 보일 때도 있지만, 또 때에 따라서 좀 괜찮은가, 싶은 때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조명이 좋은 화장실이라던가, 뭐 아무튼. 이도하는 제 것이든 남의 것이든 외모에 별 감상을 가지지 않고 담백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시오한을 만나고는 아무래도 그런 자체 평가를 좀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그대는? 거울을 보면서 잘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없다?”
“…….”
그런 와중에 이런 질문을 들으니 답을 하기가 참 민망하다. 이도하의 말투를 따라 하며 시오한이 누운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황금빛 머리칼이 차르르 쏟아져 이도하의 얼굴을 간질였다. 저 얼굴로 이렇게 쳐다보면서 저런 질문을 하는 게 옳지 않다. 아주 불합리하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얼굴을 밀어내며 답했다.
“있다, 있다있다.”
“옳은 판단이야.”
“당신 진짜 팔불출 같아.”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을 잡아 쪽, 입을 맞추었다.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를 당겨 손 말고 입을 갖다 대었다. 몇 번의 입맞춤 끝에 시오한이 물었다.
“뭘 좀 먹겠어?”
“아니,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뭘 자꾸 쉴 새 없이 먹이려고 해. 살찌워서 잡아먹으려고 그러냐.”
“잡아먹는 건 지금도 할 수 있는데?”
시오한이 태연히 말했고, 이도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시오한의 몸을 슥 훑어보았다. 각 잡힌 정복이 아니라 편안하게 하늘거리는 침의라 부분부분 몸의 실루엣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오즈의 기이한 섭리로 그는 이도하가 들기에 어렵지도 않을 만큼 가볍지만 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밀어도 이게 뭐 벽인가 싶을 정도였고…. 그러고 보니 그는 제 힘도 조절할 수 있다.
“…그건 그렇지.”
이게 또 말이 되네. 바다도 가를 수 있고 지구도 돌릴 수 있으며 하여간 거의 모든 게 가능한 대단한 인소더블 이도하는 떨떠름하게 수긍하고 말았다. 인소더블이고 뭐고 시오한 앞에서는 헬스장 한 번 안 가본 24살 이도하였다. 그는 조금 공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진짜 천지 분간을 못 했는데, 그때 당신을 만났으면 진짜 싸웠을 수도 있겠다.”
“그대가 천지 분간을 못 해?”
표현이 우스웠는지 시오한이 웃음을 흘렸다.
“뭐든 특기로 해결하려고 해서 그렇게 혼이 났는데, 방학 숙제가 밀린 적이 있거든. 그건 특기로 해결이 안 되잖아. 열 받아서 엉엉 울다가 결국 다 못 해서 또 혼났지.”
그러니 이렇게 제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시오한을 그 나이에 만났더라면 자존심이 상하고 기분도 상해 또 엉엉 울었을지도 모른다.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엄청 썼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게 되니 즐거워져, 이도하는 아예 팔을 괴고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자세를 취했다.
“일주일 동안 특기 쓰지 말기, 그런 벌을 받은 적도 있는데 한 시간도 못 참았어.”
“뭘 했기에?”
“만화 영화를 보다가 어린 마음에 감명을 너무 깊이 받아서.”
무슨 만화였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안 나는데, 집이 아주 작살이 난 건 똑똑히 기억했다. 혼자서 악당까지 만들어 매직포니 하이퍼빔이니 하는 멋들어진 광선을 날려대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주택이었으니 망정이지, 아파트였더라면 아마 옆집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결혼하면서 받았던 고가의 나전칠기 장은 땔감이 되었고, 아버지가 야심차게 마련했던 끝내주는 사양의 컴퓨터 두 대도 명을 다 해 이도하는 정말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다. 훌쩍훌쩍 울면서 손을 들고 있다가 팔이 아프다고 또 특기를 써 또 혼이 나고….
“학교에서 웬 놈이랑 싸우다가 특기로 나무 위에 올려놔서 또 혼나고, 화장실을 온통 수영장으로 만들었다가 혼나고, 겨울에 벚꽃 다 피게 했다가 또 혼나고… 악당 때려잡겠다고 뛰어나가다 또 혼나고, 하여간 제정신은 아니었지.”
내가 제일 센데, 내 맘대로 하면 그게 뭐. 그렇게 대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었다. 그럼 너 혼자 살아! 이도하는 집에서 쫓겨났고, 천지 분간 못하는 어린이 이도하는 정말 저 혼자 살 수 있다고 오기를 부리다 일주일 뒤에 또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는 그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같이 엉엉 울었다. 그러고 나서야 좀 얌전해졌던 것 같다.
“당신은?”
“나?”
“당신은 한 번도 혼난 적 없었을 것 같다.”
“재미없는 어린이였지.”
시오한이 말했다. 별로 할 얘기도 없는 것 같았다. 문득 그가 웃었다.
“그러니 그대를 만났다면 아주 좋아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