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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88화 (88/250)

88화

이도하가 눈을 크게 뜨고 시오한을 보았다. 눈을 마주한 채로 웃으며 시오한이 혀를 문질렀다. 이도하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가 옆을 곁눈질했다.

하녀 둘은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이제 주전부리를 까먹고 있었다. 순간 시오한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등골이 주뼛 섰다. 이도하는 다시 황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매가 휘어지며 여지없이 웃는다. 시오한이 느릿하게 그의 입술을 핥았다. 허리를 잡아당기며, 단단한 허벅지가 더 깊이 들어왔다.

이도하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러나 조금도 밀리지 않는다.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대로는 시오한의 혀를 깨물게 될 것 같아 그는 오히려 입을 벌렸다. 턱이 바르르 떨렸다. 참느라고 잔뜩 힘이 들어간 손이 시오한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 순간 주변이 바뀌었다. 시오한이 털썩, 침상 위로 떨어졌다. 황금색 머리칼이 촤륵- 펼쳐졌다. 이도하가 꾹 눌러놓았던 숨을 토해내며 다시 정신없이 시오한의 입술을 찾았다. 시오한이 그를 감아 당겼다. 입맞춤이라고 해서는 썩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행위가 한동안 이어졌다. 입술을 빨고 서로의 혀를 비볐다. 헐렁한 티셔츠 아래 맨살 위로 시오한의 손이 닿자 이도하가 신음했다. 뜨거워서 데일 것 같았다. 살갗이 꼭 점막 같다.

그때 침대 가에 있던 협탁 하나가 쾅! 터져나가며 박살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시오한의 입술을 물고 있던 이도하가 끙, 인상을 쓰며 힘을 내리눌렀다. 시오한이 손이 살살 그의 등을 매만지며 척추를 덧그렸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 푸른 섬광이 어렴풋이 감돌고 있었다.

“그때도 당신이었구나.”

대답 없이 시오한은 웃기만 했다. 이전에 이도하는 정원에서도 한 번 등을 날려 먹은 적이 있었다. 난생처음 특기가 미친 듯이 날뛰어 이러다 정말 사고 치는 거 아닌가 싶은 순간 힘이 가라앉았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시오한이 이도하의 힘을 가라앉힌 것이었다.

“건물이라도 하나 해 먹는 거 아닌가 했더니… 읏.”

“그럴 일은 없어.”

시오한이 이도하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도 상관없고.”

“황제의 계약자가 그래도 궁을 박살 내면 안 되잖아.”

“돼.”

이도하가 까딱 눈썹을 들었다. 시오한의 손끝이 가슴 위로 스치는 순간 그가 이를 악물었다. 눈이 마주친 시오한의 얼굴은 산책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손이 그토록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머리 위로는 여느 때와 같으니 이도하만 기가 막혔다. 닿을 듯 말듯 묘하게 비껴 나가는 손길에 이도하가 눈가를 일그러트리다, 그 손을 확 잡아챘다. 얇은 티셔츠 아래로 시오한의 손을 그러쥔 채 잠시 숨을 고른 이도하가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제 세상에서는 제가 뭘 해도 옥신각신 난리인데.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을 꽉 쥐었다. 그가 시오한의 가슴 위로 툭, 머리를 떨어트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당신이 날 소환할 때 기적을 기원했다고 했잖아.”

“응.”

“사실 당신이 내 기적인 게 아닌가, 내가 당신이 날 소환하도록 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

시오한의 가슴이 들썩였다. 웃는 모양이다. 이도하는 말하고 보니 시오한이 듣기에 좀 어이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소환을 거부해대다가 결국 피까지 다 쏟아 내게 만들어 놓고는 사실 내가 바랬어, 하니 이만하면 궁이 아니라 양심이 박살 난 수준 아닌가. 이도하도 낄낄 웃었다.

말을 하고 보니 참 이상했지만 이도하는 정말 진심이기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오한이 아니었더라도 제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언젠가 벌어질 일들인 것 같았으니. 시오한이 없었더라도 지진은 닥쳤을 테고, 안온하고 삼삼했던 제 하루하루들도 결국 지금처럼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제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저도 알고 있었으면서도 부린 고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없었더라도. 그가 없었더라면.

“고마워.”

이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커다란 손이 이도하의 뒷머리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고마워, 화이람.”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땀이 조금 배어 나온 이마에 다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며 시오한이 말했다.

“내게 와 줘서.”

“…….”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웃었다. 으으으- 부르르 몸을 떨며 시오한의 옆으로 풀썩 엎어졌다. 몸에 힘을 다 빼고 아주 늘어졌다. 시오한도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그런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하도 비비고 만져댄 탓에 옷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집무실이라더니.”

“집무실에는 서류도 많고, 보는 눈도 많고.”

보는 눈은 아까도 있었는데.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홧홧해진다. 어우. 이도하가 이불 위로 얼굴을 문질렀다. 시오한의 손이 그의 이마를 받쳐 들었다. 이도하가 물었다.

“뭐라고 하고 나왔는데?”

“무엇보다도 중한 일이 있다 하며.”

“진짜 뻔뻔하다.”

시오한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까딱였다. 이도하도 장단을 맞추기로 했다.

“물론 중요하긴 하지. 엄청 중요해.”

이도하가 몸을 뒤척이다 아예 시오한의 팔 위에 머리를 대었다. 시오한은 끝이 말려 허리가 드러난 티셔츠를 정리해 주었다.

“병아리가 아니네?”

이도하의 바지를 눈짓하며 시오한이 물었다. 옆에 흰색 줄이 들어가고 발목에 밴딩이 된 평범한 트레이닝 복이었다.

“그건 추워서 이제 못 입어.”

“귀여웠는데.”

“지금은 안 귀엽고?”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원래 계약주랑 좀 닮아간다는데, 나도 이제 한 뻔뻔한다 이거야.

“아무렴, 귀엽고말고.”

“대답하지는 말아주라. 모른 척해줘.”

“모른 척할 수가 없는걸.”

“그만, 그만.”

더 무슨 말을 할지 두렵다. 이도하는 그냥 시오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만 드러난 시오한이 곱게 웃었다. 말이나 못하면… 예쁘지나 말지… 이 사람이 있는데 궁에서 뭔들 예쁘겠냐며 꺄르륵 웃던 하녀들이 떠올랐다. 아마 이 궁의 모든 사용인들을 대변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기적 맞잖아. 툴툴대며 이도하는 그냥 눈을 감았다.

“자, 화이람. 그대의 세상은 밤이잖아.”

“아깝게.”

“난 늘 여기 있는걸.”

“당신 집무는.”

“그게 뭐지?”

“진짜 황제다. 찐이야, 찐.”

입술을 꾸물거리며 스멀스멀 웃은 이도하가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시오한이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전혀 졸리지 않았는데, 그러고 있으니 정말 살살 잠이 오기 시작했다.

“…시오한.”

이도하가 문득 말했다.

“응.”

“18년 전에, 이곳에서 지진이 있었다고 했잖아.”

“…맞아.”

“기억해?”

“기억해.”

“몇 살이었어, 당신?”

“8살.”

“…나도 8살이었는데. 내 세상에서는 16년 전이더라고.”

“차이가 좀 나네.”

“그러니까.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어….”

“그대의 세상과 내 세상이 많이 엇갈렸나 봐.”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러게. 그러면 안 되는데.”

시오한이 좀 더 이도하를 보듬어 안았다. 이도하는 정말로 잠에 빠져들고 있었고, 말은 거의 잠꼬대에 가까웠다. 이도하는 제가 상상을 하는 건지, 눈만 감은 채로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하늘이 보였다. 부서진 천장처럼 조각나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네. 나 참. 그가 픽 웃었다.

“나는 그게 기억이 안 나, 시오한. 전혀 몰랐어.”

“괜찮아.”

“…당신은 뭘 기억해?”

가만히 이도하의 머리칼을 매만지던 시오한이 조금 뒤에 답했다.

“…무서웠어.”

그것뿐이야.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오한, 나는-”

“그만 자, 화이람. 아무 생각 말고… 좋은 꿈만 꿔.”

이도하가 픽 웃었다. 그의 세상에서야 당연히 한밤중이지만 여기는 이렇게 날이 훤한데 자꾸 자란다. 그런데 또 진짜 잠이 살살 오는 걸 보면 기분 좋은 낮잠에 들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의 말마따나, 좋은 꿈만 꾸면서. 이도하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의 언저리쯤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말해줘요.’

그 언저리에서 이도하는 낮에 신은호를 돌려보내고 난 후 나눈 통화가 떠올렸다. 한나 브라운. 그 여자였다.

‘나한테 트라우마가 있지 않냐고 했던 거 기억합니까? 난 없다고 했지만, 당신 말이 맞아요. 있어.’

‘리, 난 정말 잘 몰라요. 내 특기는 기억을 엿보는 게 아니에요….’

전화를 통해 듣는 한나 브라운의 목소리는 여전히 말라빠진 잡초처럼 맥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보고 말을 하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 사정이 나아 보였다.

‘뭐든 상관없어요. 그냥 그것만 알려줘요.’

‘……’

‘나한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이 있는지.’

한나 브라운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안 봐도 우물쭈물 하고 있는 게 훤히 그러져 이도하는 기다렸다.

‘나는 그런 건 잘 몰라요. 다만 캘리포니아 지진 때 당신 반응이… 일반적으로 트라우마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 흡사해서, 그래서 그렇게 물었던 거예요. 혹시 많이 힘들면….’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알아야만 해서 묻는 겁니다.’

이도하가 말했다.

‘…정말 중요한 거, 잊어버리면 안 될 걸 잊어버린 게 아닐까. 그게 무서워서요.’

‘…리, 내가 아는 건….’

한나 브라운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정신, 기억, 그런 것들은 원래도 건드리기가 힘든 부분인데… 당신처럼 염력 계통의 능력을 다방면으로 활용하는 특기자들은 더 건드리기 어려워요. 포괄적으로 보면 그 특기도 엄연히 정신 계통이라… 특기가 강하면 강할수록 방어도 강하다고 하거든요. 본인이 몰라도.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도하는 신은호의 학교 운동장에 있는 그네에 앉아 의자를 흔들며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학교에도, 운동장에도 아무도 없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만약에 인소더블인 당신이 어떤 시기의 기억을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정도라면… 그러니까, 돌이키고 되짚어봐도 어색하고 이상한 걸 느끼기 어렵다면….’

끼익- 끼익- 낡은 그네가 녹슨 소리를 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리, 당신 스스로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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