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87화 (87/250)

87화

<대지진 닥친 이리스티리움… 대비 없어 피해 커>

지난 저녁, 우리 시간으로 10월 28일 오전 11시경 오즈에 대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자연재해가 없다고 알려진 오즈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인해 아이라가 계약자들을 통한 진위 파악에 나섰다. 이례적으로 벌어진 이상 현상에 우리 세계에까지 영향이 끼칠 가능성을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전문가들은 아직까지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직격타를 맞은 곳은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의 성도로, 기본적인 지진 대비는 물론 재난 이후의 처리와 관리까지, 경험이 없는 에트레제의 관료들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각국 정부는 계약자들을 통해 적극적인 구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지진으로 인한 피해로 사망자만 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우리 세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신준호 기자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내일뉴스

사망자만 천여 명에 이르러…. 사망자만 천여 명.

‘트라우마… 있지 않아요?’

‘없는데.’

‘엄마, 혹시 나 어릴 때 지진 같은 거 난 적 있어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좌시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어느 때든, 어떤 때든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

그 말을 듣고 엉엉 울었던 18살의 이도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던 제 자신.

혹시. 정말 만약에….

18년 전 이리스티리움에 닥친 대지진과 제가 무슨 관련이 있다면… 두근. 심장이 뛰는 느낌에 이도하가 지그시 제 가슴을 내리눌렀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데.

특기자들은 애초에 오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매개 삼아 계약주들이 마력으로 눌러 앉힌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계약은 생에 단 한 번뿐이고, 이도하가 계약을 맺은 건 하늘이 뒤집어져도 시오한뿐이었다. 그 이전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이도하가 오즈에 갈 수 있었을 리 없고, 그 지진과 그가 연관이 있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18년 전이라면 이도하가 6살 때이며, 또 이곳 시간대로 16년 전이라면 8살 때의 일이다. 그가 갓 특기자로 판정받았을 때였다.

“…불가능하다… 불가능.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또 이도하는 근 며칠 사이에 불가능이라고 믿었던 일이 얼마나 보란 듯이 깨어졌는지를 또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계약주인 시오한이 아닌 다른 이에 의해 소환되었고, 계약자와 계약주의 유대 따위는 없이 서로가 죽이는 것마저 보았으며 미리 특기자를 알고서 기원을 조작해내는 일까지 있었다.

정말 불가능할까?

만약에, 정말로 이 지진과 저가 연관이 있다면. 어쩌면 저가 지진이 있었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사망자만 천여 명.

순간 이도하가 핸드폰을 덮었다. 어둠 속, 눈을 찌르는 화면 속에서 새까맣게 나열되어 있던 글자들이 까맣게 사라진 시야에 점멸했다.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좋겠다. 이도하가 시트 위로 고개를 박았다. 새로 빨아 깔아놓은 것인데도 요 며칠 사람이 없었다고 먼지가 앉았는지 쿰쿰한 냄새가 났다.

[화이람.]

“어, 시오한. 나 이제-”

이제 자려고. 시트에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푸른빛이 번쩍하더니 따뜻하고 단단한 팔이 이도하를 감싸 안았다. 풍성한 옷자락이 휘감기는 게 느껴졌다. 이도하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서늘한 향, 단단한 어깨, 뺨에 닿는 차가운 머리카락, 누군지는 찰나에 이미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채 상황 파악이 안 돼 이도하는 얼떨떨하게 눈을 떴다. 그를 품에 아주 꼭 안았다가 떼어낸 시오한이 달큼하게 웃었다.

“미안해.”

“…어?”

이게 뭐야. 방금 그게 소환이었어? 이도하는 어안이 벙벙해 눈만 깜빡이다 시오한의 볼을 쿡 찔러보았다. 진짜네? 이도하에게 볼이 쿡 찔린 채로 시오한이 깊이 웃었다. 찔린 볼이 보조개처럼 파였다.

“참을 수가 없어서.”

이도하의 입에 떨어질 듯 말 듯 달랑달랑 매달린 사탕을 빼낸 시오한이 입을 맞추었다.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정말 단숨에 혀가 밀려들어 왔다. 빨지도 않고 사탕을 한동안 물고만 있어 씁쓸한 정도로 입 안에 층층이 쌓인 단맛을 한 겹씩 벗겨내 문질렀다. 아찔할 정도로 달았다.

뒷머리를 한 손에 감싸 안은 커다란 손이 내려가 뒷목을 따뜻하게 감쌌다. 뺨을 감싼 손이 볼을 살살 문지른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끌어안았다. 등에 찬란하게 펼쳐졌을 차가운 금발이 손바닥에 감기듯 달라붙었다. 물기 어린 소리가 났다. 시오한이 좀 더 그를 밀어붙였다. 발이 엇갈리고 다리 사이로 시오한의 허벅지가 꽉 들어찼다. 무겁게 눌리는 느낌에 이도하가 신음하며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다.

입 안에 달큼하게 감돌던 단맛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둘은 입술을 떼어냈다. 이도하가 모인 숨을 짧게 뱉어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게 꼭 숨이 가쁜 것 같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손끝까지 열기가 꽉 찬 것이… 이건 몸이 달았다고 봐야 맞겠다. 이도하는 안온한 빛깔의 눈동자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시오한.”

“뭘?”

시오한이 되물었다. 애정으로 꽉 찬 눈동자가 다정하게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당신 나 사찰하지. 목소리만 들리는 거 아니지?”

“아.”

시오한이 맥주 사탕을 물었다. 뺨 한쪽이 불룩해졌다. 그 모습이 또 기묘하게 잘 어울렸다.

“내가 때를 잘 맞추었어?”

“기가 막히게.”

시오한이 눈꼬리를 휘었다.

“그럼 칭찬해 주나?”

입술 사이로 번들거리는 하얀 막대만 삐죽 나왔다가, 들어왔다가 한다. 이도하가 그 사탕을 잡아 빼 던져버리고 그를 제게로 당겼다. 시오한이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가 먼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방금 전까지 사탕을 빨던 입이라 정말 지독하게 달았다. 고개를 틀어가며 내키는 대로, 원하는 만큼 실컷 입을 맞춘 이도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달라붙어 있던 입술이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

“맛있다.”

시오한이 말했다. 단 숨결이 그대로 따뜻하게 전해졌다. 그가 손을 뻗었다. 손끝부터 미끄러지듯 타고 올라와, 제 허벅지 위에 올려진 이도하의 손을 잡더니 등 뒤로 당긴다. 매끈하게 뻗은 등 선을 따라 조금 미끄러져,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확인해야지, 화이람.”

“…….”

“꼬리가 있나 없나.”

시오한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이도하는 더 물러설 곳도 없는 벽에 다다랐다. 그의 뒷목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척추를 따라, 움푹 파인 등을 손끝으로 누르며 주욱 미끄러져 내렸다. 이도하가 움칠 손끝을 퉁겼다.

“나도 확인해 볼 거거든.”

척추가 끝나는 곳, 손끝이 아슬아슬한 곳에 멈춰 섰다. 정말로 확인하듯 꾹꾹 눌러보기까지 한다. 이도하가 흡, 숨을 참았다. 따뜻하게 절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에 못 박혀 그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데 순간 덜컥,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녀 둘이 들어왔다.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시오한을 바짝 당겼다. 시오한이 벽을 짚고 완전히 이도하 위로 포개졌다. 오천 미터 밖에서 봐도 저기 우리의 황제가 있구나! 했을 게 분명한데 하녀 둘은 시오한을 보지도 못한 것처럼 지나갔다. 심지어 거리가 매우 아슬아슬해 거의 스칠 정도였다. 두 하녀는 안쪽의 작은 소파로 곧장 직진했다. 누구도 시오한을 보았더라면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까, 보았더라면.

“아, 종아리 너무 아파. 다리 다 터지겠네. 인간적으로 천궁 진짜 너무 큰 거 아니야? 누가 무식하게 궁을 그렇게 크게 지어?”

“이 정도면 자전거 하나 줬으면 좋겠다.”

“진짜 예쁘기만 하지 비효율 끝판왕.”

“안 예뻤으면 진즉에 누가 부숴도 부쉈지, 열 받아서.”

“얘, 솔직히 궁에 폐하가 계시는데 뭔들 예쁘니?”

“그건 그렇다. 폐하 한 번 뵙고 나면 세상이 너무….”

한 하녀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고, 곧 둘은 깔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예쁜 폐하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건 꿈에라도 모르는 태도였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머리에 편안하게 뺨을 기댄 채로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와 벽 사이에 갇힌 이도하는 숨조차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넓디넓고 어디든 대체로 확 트여 있는 궁의 곳곳에 잘 보이지 않게 자리한 하녀들의 휴게실이었다. 작은 소파와 차, 주전부리 등이 있어 하녀들이 시시때때로 이곳에서 쉬어 가고는 했다. 그러나 하녀들의 휴게실이 아니라 제 집 안방이라고 해도 시오한이 있다면 그곳의 주인은 시오한인 것이다. 더더군다나 시오한이 그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면 민망이고 뭐고 까마득해지는 미래에 눈앞도 깜깜해졌어야 맞다.

물론 시오한은 남의 안방을 차지하지 않고, 그곳에서 그의 계약자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지도 않겠으며 날벼락과도 같은 상황을 마주한 신하나 백성을 벌하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이건 그에게 정말 색다른 상황이었다. 시오한은 평생 누군가를 피해 숨어본 적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에도 숨바꼭질을 하면 감히 황태자를 이겨 먹을 수 없으니, 그는 고귀한 투명인간이 되기 일쑤였다.

시오한이 고개를 숙여 이도하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얇은 귓바퀴에 입술이 스치자 이도하가 움칠! 놀랐다. 시오한이 속삭였다.

‘숨 쉬어, 화이람.’

이도하가 그를 안은 팔에 꽉 힘을 주었다. 시오한은 그런 그의 뺨 위로 입술을 눌렀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떼듯이 소리 없이 전진하며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입술을 겹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