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86화 (86/250)

86화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

“오, 왜?”

-좋은 추억이 많아서. 그대는?

“겨울.”

-흐음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눈앞에선 안 보여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가 선하게 그려진다.

“당신 생일이라서는 아니고, 연말을 좋아해.”

-아, 기대했는데.

“여태까지는 그랬고, 이제는 당신이 태어난 계절이라서.”

-…….

으, 이도하가 한 차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씩 웃으며 말했다.

“당신 흉내 좀 내 봤다.”

-그럼 나는 그대더러 요망하다고 하면 될까?

음, 다음 질문. 이도하가 화면을 내렸다.

“좋아하는 과일…?”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진짜? 왜?”

-무른 느낌이 싫어서. 향은 좋아해.

신기하네….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아예 안 먹어?”

-그렇지는 않지. 잔소리가 심해지거든.

음. 이도하는 잠시 의미 없이 화면을 몇 번 위아래로 흔들었다. 호불호는 있는데, 그저 있을 뿐이라….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것만 연달아 물으니 우스웠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시오한이 웃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른 것들은 전부 세계가 달라 물어보기에 영 애로사항이 있는 것들뿐이고, 유치한 질문이래도 보다 보니 이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할 만했다. 이도하는 생전 이런 것들을 누군가에게 물어본 적도, 궁금해한 적도 없었는데 하다 보니 시시콜콜한 재미가 있었다.

-글쎄… 지금까지는 정원의 꽃들이 가장 좋았는데 이제 라날리가 되지 않을까 싶어.

“왜?”

-그대와 같이 볼 예정이라.

“…….”

이럴 때는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도하는 괜히 가렵지도 않은 손목을 긁적였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잔뜩 뭉쳐놓은 이불을 끌어안으며 이도하가 물었다.

“좋아하는 동물은… 고양이랬지.”

시오한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왜 웃나 싶었지만 이도하는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좋아하는 색?”

-푸른색.

“…음.”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그는 소리 없이 끌어안은 이불을 주무르며 잔뜩 괴롭혔다. 검은색이라고 할 줄 알았다. 검은색이라니. 검은색이라니! 미친 이도하. 수치심에 이도하가 몸을 뒤트는 순간 부욱!! 단말마를 내며 이불이 뜯어졌다. 안에서 보송보송한 솜이 처량하게 굴러 나왔다. 이도하는 허망하게 이불을 바라보다, 그냥 뜯긴 대로 이불을 대충 뭉쳐 얼굴을 묻었다.

-화이람?

“어, 아냐. 그냥. 나도 좋아해, 파란색. 좋아하지.”

이도하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횡설수설했다.

-졸려?

시오한이 물었다. 졸리지는 않았지만 이도하는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30분. 졸려야 할 시간이기는 했다. 그러나 휴학계도 냈겠다, 당분간 학교 갈 일도 없고 이도하는 사실상 그냥 백수였다. 그것도 돈 많은 백수. 평생 그를 애로 볼 부모님은 호텔로 모셨겠다, 늦게 자는 게 아니라 날밤을 새운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백수 좋네. 이도하는 마음 편하게 뒤척거리며 몸도 좀 더 편하게 했다. 팔을 괴고 옆으로 누우니 어두컴컴한 방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 안도 밖도 고요했다. 주택가라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도 없다. 아무 소리도 없이 정말로 조용하기만 했다. 밖에서 스며든 빛이 달빛인지 무슨 빛인지 모르겠다. 이도하는 거의 평생을 봐 온 제 방을 낯설게 응시했다. 부드러운 이불에 묻힌 감각이 어느 날을 떠올리게 했다.

“…아니. 당신이 여기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잠깐 하는 중이었어.”

-…한 번 불러 봐.

“뭐, 당신을?”

-응.

“부르면 당장 나타날 것처럼 말하네.”

-그대이니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는 정말로 설득력이 있었다.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도 아니라 그가 그렇게 말하니 별일도 아니고 그냥 하면 되는 일 같이 들린다. 이도하는 잠시 혹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아서. 진짜 될까 봐 무섭다. 큰일 난다.”

-아쉽네.

“내일 보면 꼬리가 달렸는지 안 달렸는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다.”

-꼬리?

“내 세상에 당신 같이 요망한 사람은 꼬리가 아홉 개 달렸다는 말이 있거든.”

시오한이 웃었다.

-화이람, 내 엉덩이를 확인해 보겠다는 거야?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이도하가 말문을 잃었다. 물 밖으로 나온 잉어처럼 입만 뻐끔거린 그가 간신히 말했다.

“…왜 말이 그렇게 되냐.”

-그럼 달리 무슨 말일까?

“당신 진짜… 보기보다… 보기보다….”

-보기보다?

“…좀 엉큼한 구석이 있다…?”

-하하.

시원한 웃음소리에 도리어 민망해진 건 이도하였다. 엉큼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엉뚱한 욕심을 품고 있거나 음흉하다. 분명 단어의 뜻은 맞는데 시오한에게 갖다 대자니 참 안 어울린다. 사실 그의 얼굴이라면 뭘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도하는 제가 늘 보는 시오한의 얼굴을 떠올리다 고개를 흔들었다. 어우.

“시오한. 소환은 일종의 기원이라고 했잖아. 소원 같은 거.”

-그랬지.

“당신은 날 소환할 때 뭘 기원했어?”

-기적.

시오한은 묘하게 의뭉스럽게 구는 때가 있으니 이도하는 이번에도 그가 은근히 답을 피하거나 말을 돌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즉답이 돌아왔다. 평온한 어조였다.

“기적이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갑자기 그건 왜?

“만약에 내가 계약주고, 당신이 계약자라고 하면 나는 뭘 기원해야 당신을 소환하게 될까 싶어서.”

근데 그러면 유도 계약인가. 이도하가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가 그러는 와중, 시오한은 잠시 대답이 없다가 말했다.

-…화이람, 그건 ‘나’를 소환하고 싶다는 말이지?

“그럼 당신 말고 내가 달리 누굴 소환해. 당신 아니면 싫은데.”

중얼거리듯 말한 이도하가 손을 까닥였다. 방 안에 푸른빛이 차오르더니 바닥에 소환진이 그려졌다. 물그림자처럼 흔들리는 것이, 진짜는 아니고 이도하가 환상으로 그려낸 것이었다. 그 위에 시오한이 서 있었다. 빛으로 그려진 모습이 흐릿했다. 저가 시오한을 소환한다는 발상이 재미있어 해 본 것인데, 안 보느니만 못하게 뿌연 형상을 보고 있으니 괜히 했다 싶었다.

“시오한?”

대답이 없어, 이도하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그러나 잠시 기다려 봐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집무 중이라고 했으니 누가 보고를 하러 왔거나, 여하튼 바쁜 모양이다. 저나 일 없는 백수다. 이도하는 물 아래 잠긴 그림자처럼 푸르게 일렁이는 시오한의 환상을 하릴없이 응시하며 조금 더 기다렸다. 그래도 부르는 목소리가 없자 그는 그냥 잠이나 자야겠다 싶었다. 이도하가 만들어 놓은 환상이 흩어졌다.

“…….”

눈을 감아도 잠이 올 생각을 안 한다. 말똥말똥한 정신에 결국 얼마 못 가 눈을 뜬 이도하는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다, 아예 베개를 잡아 빼 가슴 아래 깔고 엎드렸다. 어둠 속에서 핸드폰 스크린 불빛이 환하게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책상 위에 대충 던져놓은 맥주 맛 사탕이 스르륵 날아와 그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개봉된 포장지는 알아서 쓰레기통으로 쏙 들어갔다. 이도하는 낮에 스크랩 해 둔 기사란을 다시 열었다.

<지진, 태풍 등 자연재해 없다고 알려진 오즈에 재난- 피해자 수십만 명으로 추산돼>

<이리스티리움 지진, 피해자 계속해서 늘어나>

<이리스티리움 대지진, 원인은 무엇 때문?>

<세계적으로 껑충 뛴 신규 계약자들… 원인은 이리스티리움 대지진?>

<이리스티리움 재앙, 흡사할 뿐 지진 아니야…>

비슷비슷한 제목으로 뜬 기사들은 모두 이미 보라색으로 읽음 처리가 되었다. 이도하가 죽죽 화면을 내렸다. 당시에 기사가 얼마나 우후죽순으로 쏟아졌는지 다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제목이 수십 개였다. 꼭지만 달고 내용도 없이 가장 많은 기사들이 쏟아진 것은 오즈에 재앙이 닥쳤다고 계약자들이 일시에 소식을 전한 날이었다.

2003년 10월 28일.

이 정도면 인터넷 뉴스뿐만이 아니라 삼사 메인 뉴스에도 대문짝만하게 걸렸을 사건이다.

그런데 왜 저는 몰랐을까.

이건 단순히 계약자, 오즈, 이런 일들에 관심을 끄고 살았다고 해서 몰랐을 수 있는 일이 아닌데. 2003년이면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의 일이니 제가 8살 때였다. 기억하지 못할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언제요?’

‘…18년 전이요. 모르시나요?

18년 전이 아니라 16년 전. 유세오의 계약자인 이리나 소버스는 분명 18년 전이라고 했는데, 2년이나 차이가 난다. 하루 이틀의 시차가 오락가락하는 두 세계가 어느 새에 그만큼이나 벌어졌을까. 언제부터? 그것 때문인지, 기사마다 표시된 날짜는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이도하는 몇 번이나 이 기사란을 새로고침 했었다. 뭐가 잘못 표시된 건 아닐까 했지만 기사가 한두 개도 아니었고, 몇 번을 새로고침 해도 날짜는 똑같았다. 꺼림칙한데. 이도하가 기사 하나를 눌렀다. 지진이 나고 가장 초기에 뜬 기사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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