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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85화 (85/250)

85화

“…….”

신은호가 꾹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을 하면 엉엉 울어버릴까 봐 그러는 모습이었다. 꼭 이도하의 말 때문만은 아니라, 김대훈 원장이 이리 다정하게 물으니 무서움과 서러움이 북받쳐 목이 콱 막혔다.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차올랐다. 툭 건드리면 와르르 쏟아질 기세였다. 김대훈 원장은 재촉하는 대신 작게 한숨만 내쉬더니 신은호를 안아주었다. 더 안 묻겠다는 태도였다.

“이놈아, 원장님이 언제 너 혼내든? 걱정돼서 그러지. 네가 하도 천방지축으로 노니까.”

고집인지 오기인지,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고 애쓰던 신은호는 조그만 강아지처럼 끼잉- 하고 신음을 내뱉더니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김대훈 원장을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뭉개고 끅끅거리며 아주 서럽게 울었다. 김대훈 원장이 그런 신은호의 등을 토닥였다.

“왜, 무서운 일 있었어? 무슨 일이기에 우리 천하무적 신은호가 이렇게 울어?”

“모리온이, 모리온이요, 원장님….”

울음소리로 잔뜩 뭉개진 소리를 김대훈 원장은 능숙하게 알아들었다. 그는 익히 신은호의 계약주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응, 모리온. 모리온이 왜. 그가 친근하고 다정하게 맞장구를 쳐 주자 신은호는 더 서럽고 두려워져 뚫린 둑처럼 모든 걸 쏟아내게 되었다.

모리온이요- 아주 나쁜 짓을 했나 봐요. 모리온은 안 그랬는데, 진짜 안 그랬는데, 만날 연구만 했는데 황제한테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막 빌었어요.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요, 황제가 모리온을 죽이려고 했어요, 원장님. 모리온 죽으면 어떡해요? 모리온이 진짜 벌 받으면 어떡해요, 원장님.

김대훈 원장은 신은호가 서럽게 울며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차분히그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등을 쓸어 주었다. 마침내 울음이 좀 잦아진 신은호가 거세게 딸꾹질을 하게 된 뒤에야 그가 말했다.

“은호야, 그래서 원장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아무한테도 들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은호가 가진 특기는 아주 귀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은호를 모리온하고 떼어 놓을지도 모른다고.”

“어떡해요, 원장님, 어떡해요?”

“괜찮아, 괜찮아. 오늘 그 형이 만나서 뭐라고 했어?”

울먹거리며 연신 딸꾹질을 하던 신은호는 한바탕 다 쏟아내고 나자 아차 싶었다. 이도하랑 약속했는데. 신은호가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김대훈 원장의 품은 크고 따뜻했고, 나쁜 일도 다 해결될 것처럼 믿음직스러웠다. 신은호가 그를 좀 더 끌어안았다.

“어… 아니, 그냥, 신기하다고, 나 같은 계약자는 처음 본다고 그러고… 맥주 사탕도 줬어요.”

버벅거리며 신은호가 말했다. 거짓말을 즉석에서 지어내려니 잘 되지 않았다. 죄책감이 콕콕 가슴을 찔렀다. 김대훈 원장이 그런 신은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으, 죄송해요 원장님! 신은호가 속으로 말했다. 그러나 신은호에게는 모리온이 좀 더 중요했다. 사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알려 줬어, 은호야?”

대답은 않고, 김대훈 원장의 품으로 더 파고들며 신은호가 고개만 끄덕였다. 읏샤- 신은호를 번쩍 안아 든 김대훈 원장이 아이들 침실로 가 그를 침대 위에 앉혀주었다. 가는 길에 두루마리 휴지를 챙겨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벅벅 닦아주었다. 닦는다기보다 문지른다고 해야 더 옳은 거친 손길에 신은호는 훌쩍거리면서도 김대훈 원장을 밀어내며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씩 웃으며 신은호의 머리칼을 잔뜩 헤집어 놓은 김대훈 원장이 아이를 눕혔다.

“못생겨진 것 봐라. 원래도 못생겼는데 큰일 났네. 원장님 옷에 콧물 다 묻히고.”

“뻥 치지 마요. 모리온이 나 예쁘댔거든요. 그리고 모리온은 거짓말 안 해요.”

“아이구, 자식새끼 키워봐야 소용없다더니 참나. 원장님도 원장님이 제일 좋아요, 하는 친구 찾아가야겠다.”

“근데 나 왜 누워요? 자요?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이불을 챙겨 덮으면서도 신은호가 물었다.

“원래 사람이 힘든 일이 있으면 밤이 아니라도 좀 자야 하는 거야. 너는 인마, 학교도 안 가고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고 이렇게 눈물 콧물 다 뺐으니 오늘은 좀 일찍 자도 돼. 아니면 공부하든가?”

“잘게요, 잘게요. 자요, 불 꺼주세요.”

그럴 줄 알았다며 일어나는 김대훈 원장을 신은호가 붙잡았다.

“원장님, 모리온 진짜 안 죽겠죠? 죽는 거 아니죠?”

“그 형이 약속했다며. 은호도 알지? 그 형 엄청 대단한 형인 거. 약속했으니 꼭 지킬 거야.”

“대단하긴… 순 깡팬데….”

입술을 비죽 내민 신은호가 투덜거렸다. 사실 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고, 오늘은 특히나 더 실감했다. 특기를 많이 훔쳐본 건 아니지만 이도하의 것은 정말로 대단했다. 제가 훔친 것은 정말 새 발의 피만큼도 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일어난 쓰나미를 막던 그 어마어마한 광경 속,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도시 위로 전체를 덮어버렸던 그 바다보다도 엄청났다. 티브이에서 주구장창 나왔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던 그 모습을 실제로 마주한 것처럼 숨이 막혔었다. 그러나 신은호는 지금 그냥 심술이 나 있었다.

“인마, 깡패가 뭐야, 깡패가. 몇천만 명을 구한 사람한테. 너도 그 형 좋다며?”

“내가 언제요? 기억 안 나요. 이것 봐요, 꿀밤 맞아서 혹 났다고요.”

흥, 신은호가 머리끝까지 이불을 올렸다.

“잘 자라, 은호야.”

김대훈 원장은 웃으며 볼록하게 솟아오른 이불을 몇 번 토닥여 주고 방을 나섰다. 그는 낡은 복도를 걸어, 긴 창문 너머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이 보이는 놀이터를 지나, 오고 가는 아이들과 몇 번의 인사를 나누며 현관에 가까운 자신의 방에 도착했다. 저물어가는 햇볕이 쏟아져 방이 온통 붉은빛이었다. 조금 열어놓은 창문으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도 흘러들어 왔다.

컴퓨터 앞에 앉은 그가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무언가를 쓰려는 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몇 번 두드려본 그가 손을 오므렸다. 한동안 김대훈 원장은 아주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화면 보호기가 켜진 모니터를 의미 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그는 곧 몇 통의 메일을 확인한 후에 메일함을 모두 비웠다. 핸드폰에 온 메시지도 확인하고 남김없이 지운다.

“선수를 쳐야지….”

그가 전화를 걸었다. 짧은 신호음 끝에 찰칵,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어, 나 기자 하나만 소개시켜 주라.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특종 하나 준다고 해.”

십여 년을 써 눈에 띄게 낡은 책상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그래, 대박감이라고.”

***

“생년월일… 이런 건 날짜 개념이 다르잖아. 그래도 생일을 챙기긴 하지 않아? 특히 당신은. 이미 지났나?”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는데, 내가 태어난 날을 그대가 특별하게 여겨 준다면 그건 또 좋을 것 같긴 하네.

“언젠데?”

-겨울의 12일이야.

“그럼 다가오고 있는 거 아니야?”

손가락으로 오즈의 날짜를 세어본 이도하가 말했다. 그러나 오즈는 날짜를 세는 법이 이곳와 묘하게 비슷하면서도 달라 헷갈렸다.

-지난날보다 다가올 날이 더 멀지.

아깝네. 겨울 태생이라니 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이도하는 어느 계절이 시오한에게 가장 어울리는지 잠시 생각해 보다 그만두었다. 그 얼굴이면 뭔들이지.

몸무게… 이건 안다. 키에 비해 가벼움. 키는 저보다 반 뼘 정도 크고. 혈액형도 넘기고. 가장 기억에 남은 여행… 황제가 여행을 해 본 적이 있으려나. 가장 기억에 남는 광고…, 광고 같은 걸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그런 건 저도 없다. 가장 잘 입는 옷 스타일, 보나 마나 정복일 것이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 죽죽 화면을 내리던 이도하가 잠시 멈칫했다.

이건 나중에 한 번 불러 보라고 해야지.

어디 노래까지 잘하나 한번 보자. 그리고 또… 가장 최근에 받은 선물. 선물?

“가장 최근에 받은 선물은?”

-선물이라고 하면 글쎄… 그대겠지?

“…와.”

안 봐도 알겠다. 저런 말을 하면서 눈도 깜짝 안 했을 것이다. 이도하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마구 내리쳤다. 먼지가 미친 듯이 피어올랐으나 그는 매트리스가 힘겹게 끼익끼익 소리를 내고서야 멈추었다. 이도하가 상기된 얼굴로 후, 심호흡을 했다. 시오한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은 이도하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질문지를 읽어 내려갔다. 넘기고, 넘기고, 넘기고… 쓸데없는 질문이 왜 이렇게 많아. 화면을 마구 넘기던 이도하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침에 제일 먼저 하는 건?”

-하고 싶은 거?

“하는 거, 하는 거!”

이도하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고 싶은 거’라는 말에 왜 마음이 급해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오한이 삼삼하게 대답했다.

-세수.

“평범하네.”

-평범하지.

하기야. 그럼 아침에 일어나서 달리 세수하고 씻고 하는 것 외에 뭘 하겠나. 저만 해도 그런데. 황제라고 별반 다를 리는 없다. 그러면서도 새삼 이런 일로 공감하게 되는 게 조금 우스워 이도하가 웃음을 흘렸다. 평범하네요- 의외란 얼굴로 누군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듣는 건 대체로 제가 하는 일이었는데.

“잠버릇?”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으니 그대가 봐 줘도 괜찮을 것 같아.

“참 꾸준하다.”

-인내 또한 황제의 미덕이거든.

진짜 말이나 못하면. 혀를 내두른 이도하는 질문지를 쭉 내렸다. 별 시답잖은 질문들이 한가득이었는데, 그가 지금 필요한 게 그런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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