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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84화 (84/250)

84화

웨이드는 도주 중인 사형수였다. 그러나 성도를 벗어날 틈을 찾지도 못하고, 추적을 피하느라 은밀한 뒷거리와 시궁창을 전전하느라고 죽는 것보다도 못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죽어 사라져도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을 목숨이었고, 찾지 않을 목숨이었다. 계약 양도 실험을 진행하던 무리들은 그런 그를 유혹해 실험에 참여하도록 했다.

긴 준비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마력이 미미한 몸에 강제로 마력을 불어넣자 이미 약해진 몸에 정신마저 약간 놓아버린 그는 이미 제가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이의 계약주라는 착각에 빠졌다. 붙잡아 놓을 필요도 없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감시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낡고 초라해 남루한 이들이 많이 드나드는 허름한 여관에 머물렀고, 누구든 만날 기회는 충분했다. 실제로 그는 아무 문제 없는 사람처럼 홀에서 낯선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도 했다. 아는 것도 없는 그는 제가 강대한 계약자와 계약한 계약주라며 떠들어댔지만 그런 허세와 허풍이야 그런 곳에 흔해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황폐화되고 재처럼 부수어진 그의 기억 속에, 잠깐 눈이 마주친 이가 있었다. 남은 그의 기억들은 대부분은 조각나 물에 번진 사진처럼 흐렸지만, 웨이드는 그 사람이 아주 인상 깊었던 게 분명했다. 그 기억만이 아주 또렷하게 콱 찍힌 듯 남아 있었으니.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행색이 깨끗했으며, 드러난 피부도 매끈했다. 체격이 곧은 사내였고, 잠깐 마주친 눈동자는 까만색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너머, 눈이 마주친 순간 남자는 입꼬리를 미끄러트리며 웃었다. 아주 잠깐 순간이 멈춘 것처럼, 웨이드는 절 바라보는 그 시선에 사로잡혔었다.

[형씨, 안녕?]

입모양으로 미루어, 웨이드는 남자가 그렇게 인사했다고 판단했다. 남자는 맥주잔을 들고 일어나, 고성방가를 지르며 싸우기 시작하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다가온다. 상 위에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웨이드의 어깨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손이 뜨겁고 단단했다. 웨이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까만 눈동자가 웨이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웃음기를 담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고 합니다. 모두 파편으로 남아 흐릿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대 몇 시간 이후 성을 빠져나가 유적으로 간 것 같다 합니다.”

“눈이 검은색이었다?”

“…첼스니티의 말로는, 오르페노스 공과 느낌이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자의 흔적은 없겠고.”

“그렇습니다.”

계약자들의 행적을 추적하는 건 불가능하다. 역소환되어 그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순간 모든 흔적은 끊어지며,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

“그자의 능력 또한 알아내지 못 했겠구나.”

“이미 시간이 지나 흔적이 사라져… 그렇습니다.”

“군나르, 네 생각은 어떠하냐.”

군나르 아스터가 고개를 들었다. 창틀에 앉은 시오한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창밖으로는 이제 제법 강해진 빗줄기가 들이치고 있었다.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젖어들었지만 시오한은 조금도 젖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해도 그는 초라해지지도, 남루해지지도 않을 사람이었다. 석고와 태양으로 빚어 절대로 닳지 않을 사람 같다.

“…웨이드가 그 계약자를 만난 게 그 때가 처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폐하.”

“어찌하여?”

“그자의 모친은 창녀였으며, 포주의 매질을 견디다 어렸을 적 도망쳐 소매치기와 구걸로 거리를 전전했습니다. 그러다 절도, 강도, 폭행 등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배운 것은 없는 자이나… 그런 자들일수록 사리에는 밝으며 약육강식의 생리에도 예민합니다.”

군나르 아스터가 말했다. 추측이나 짐작이 아니라 꼭 잘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시오한이 그를 바라보았다. 군나르 아스터가 공손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는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웨이드가 계약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가장 강대한 계약주’로 만들어주겠다는 허풍으로는 그를 꾀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의 손을 잡았을 리 없으며, 달리 속셈이 있어 잡았다 하면 공공연하게 그런 말을 떠들어대며 허풍을 떨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시기에 이미 그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강하면 밟고 서고, 약하면 짓밟힌다. 그는 지독하게 밟혔고, 밟아 보았으며 이용당하고 이용하던 자였다. 그는 마력도 없는 저가 단숨에 ‘가장 강대한 계약주’가 된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말인지 아프도록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그런 망상 따위를 믿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끝내는 본래 계획했던 계약자가 아니라 가장 강대하다고 알려진 황제의 계약자- 화이람 오르페노스를 소환하도록.

“그렇다면 그것이 그 계약자의 능력이겠지.”

착각에 빠지도록 하는 능력. 믿지 않던 것을 믿도록 하는 능력. 기억 조작, 혹은 정신 조작. 착란, 환각, 최면-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공통점이라면 사람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정신계 계약자라는 것이었다.

“찾아라.”

창을 닫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밤처럼 어두워진 하늘에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산산이 부서졌다.

“저쪽 세계를 다 뒤져서라도.”

“…외람되오나, 폐하. 오르페노스 공께는….”

군나르 아스터가 말을 흐렸다. 시오한은 밤처럼 어둑한 잿빛 하늘에서 쏟아진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물어보면 답해준다 하였다.”

“…예, 폐하.”

“비가 왔으니 이제 라날리 꽃이 만개하겠구나.”

라날리 꽃은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우기의 마지막 비가 그치면 수십 겹의 꽃잎이 겹쳐진 꽃을 피워내 온 성도를 연푸른색으로 물들였다. 딱 일주일 동안만 피어있다 천천히 흩날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라 그 시기에 성도는 성대한 축제에 접어든다. 모두가 즐거워도 에트레제만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시기이긴 하지만….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

발끝을 잔뜩 세운 발이 조심스럽게 소리 없이 걸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숨도 꾹 눌러 참고서 은밀하게 나아가는 모습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이 커다래지는 순간 커다란 손이 와락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요놈아.”

“으악!”

신은호가 와락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보면 깜짝 놀랄 정도로 과장한 굉장한 소리였다. 놀라서라도 움찔 손을 놓을 법한데, 남자는 콧방귀나 뀔 뿐이었다.

“원장님!”

“이 짜식, 또 누구랑 쌈박질 했어!”

은혜의 집 김대훈 원장, 올해로 57세가 된 그는 꾸준한 운동으로 보기에도 젊어 보였고, 기운도 좋았다. 그에게 또래보다 키도 작고 삐쩍 마른 신은호를 붙잡아 놓는 건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신은호가 아주 잠깐 발버둥을 치더니, 재빠르게 태세를 바꿔 원장의 허리로 돌진해 답삭 끌어안았다.

“원장님!”

“어어, 이것 봐라.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안 통해, 안 속아, 이놈아!”

“걔가 먼저 나보고 거지라고 했단 말이에요. 막 발랑 까졌다고 하면서 신고한다고 막 그러니까, 그리고 나는 그냥 밀었는데 걔는 발로 찼어요!”

“뭐? 어디 봐!”

우는 소리에도 고개만 젓고 있던 김대훈 원장이 신은호를 떼어놓고 허리를 숙였다. 신은호가 기다렸다는 듯 바지를 걷어 종아리를 보여주었다. 정말 파랗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심하지는 않았다. 12살 아이들이라면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마구 생겨나는 멍 중 하나였다. 김대훈 원장이 종아리를 잘싹 내리쳤다.

“괜찮구만. 하여튼 엄살.”

“아, 엄살 아니에요.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말똥구리처럼 생긴 게 막 사람을 발로 차.”

“어허.”

신은호가 입을 삐죽였다.

“걔네 엄마가 와서 뭐라 그런 거죠? 말끝마다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완전 마마걸이야.”

“아니야, 이놈아. 애들이 신은호 또 싸움했대요, 하고 떠들어 대는데 어디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지. 아주 동네 유명인사야.”

멍이 든 정강이를 살살 만져주며 김대훈 원장이 말했다. 허허 웃는 낯이었다. 김대훈 원장은 아주 오랫동안 이 곳에서 은혜의 집을 운영해 왔고, 근방의 사람들에게 평판도 좋았다. 좋은 사람이고, 좋은 일을 한다며 늘 칭찬만 했다. 인상도 성격도 수수하게 좋아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신은호도 자글자글 주름지는 거의 웃는 얼굴을 좋아했는데, 오늘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은호, 원장님한테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눈치를 보는 신은호에게 김대훈 원장이 물었다. 아직 인자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신은호는 그를 한 번 보았다가, 바닥을 보았다가, 또 다른 곳을 보는 척 흘긋 원장을 보았다가, 바닥을 보길 여러 번 반복했다. 눈을 들 때마다 매번 김대훈 원장과 눈이 마주쳤고, 신은호는 점점 더 초조하게 손가락을 잡아뜯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신은호가 이도하를 만났다는 걸 김대훈 원장이 모를 수가 없었다. 원장님, 원장님! 이도하 봤어요! 이도하 왔어요! 철딱서니 없는 다른 아이들이 이미 촉새처럼 떠들어 댔을 게 뻔했다.

보육원 생활 11년차 짬밥으로 신은호는 눈치가 빨랐다. 이럴 때 잡아떼면 약간 혼나고 말 일도 팬티 바람으로 혼날 일이 된다. 어떡하지. 신은호가 머리를 굴렸다. 이도하는 무슨 얘기를 했는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안 만난 척 하라는 말은 안 했다. 결국 신은호가 말했다.

“나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누구한테 무슨 말을 안 해?”

김대훈 원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다른 아이들이었더라면 정말 모르는가 보다, 하고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고 또 혼났겠지. 하지만 저는 그렇게 눈치가 없지 않다. 신은호가 말했다.

“이도하요.”

“신은호 신났었겠네. 은호, 그 형 좋아하잖아.”

“아닌데요! 안 좋아해요! 완전 깡패야.”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김대훈 원장이 하는 말에 신은호가 발끈 외쳤다. 좋아하기는? 너털웃음을 터트린 김대훈 원장이 물었다.

“은호야, 오즈에서 그 형 만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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