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맞아.”
-맞아?
“그대의 말대로야. 그래서 그대를… 소환했을 때 제 계약자가 옆에 있어야 했던 거지.
-이거 진짜 쓰레기 새끼 아니야.
“똑똑하다. 누구의 계약자이기에 이리 똑똑하지?”
-…당신,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어? 아니면 이거 입으로 주절주절 안 해도 되는 건가? 좀 혼란스럽다, 갑자기.
어이없어하며 쳐다볼 얼굴이 빤하게 그려졌다. 날렵하게 모양이 잘 빠진 눈썹이 조금 삐딱하게 올라가고, 쌍꺼풀이 옅으나 시원하게 트인 눈매는 꼬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데도 아주 서늘하고 차가워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깜빡이지도 않고 쳐다보는데, 그럴 때면 그 유난히 까만 눈동자에 제 얼굴이 고스란히 담기고는 했다.
“계약 양도야.”
-양도? 절도가 아니고?
“절도라… 단어야 의도나 듣는 사람이 느끼기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니까.”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미 계약이 파기된 계약자나 계약주가 또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그리고 마음이 맞지 않는 계약자나 계약주가 새로운 상대를 만들 수 있도록 하려 했다지.”
-지랄도 창의적이다. 입이 삐뚤어져서 그냥 솔직히 계약자 팔아먹으며 개같이 돈 벌고 싶었다고는 못하는 모양이지. 꼴에 양심이라도 챙기고 싶나.
하여간에 그런 새끼들 치고 말 못 하는 놈들은 없다며 연이어 비아냥거린다. 감정이 닿지 않아도 환멸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의도랑 결과가 늘 같을 수는 없지. 이익이 연관되어 있다면 더더욱.”
-그 계약주 놈이 죽고… 애가 오즈에 가지 못하면 더 이상 그런 소환을 할 수 없는 건가?
“그들이 연구한 건 그 조그만 계약자의 힘을 소환진에 담아 ‘소환’과 ‘계약’을 훔쳐내는 방법이었는데, 그 애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동안에만 가능했다고 하니… 그대의 말이 옳아.”
모리온이 죽으면 계약은 파기되며, 한 번 계약이 파기된 계약자는 영영 다시 계약할 방법도, 이 세계에 발 디딜 방법도 없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죽일 수밖에 없겠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화이람, 아이가 가엾어서 그래?”
시오한이 물었다.
-…애가 아무것도 몰라, 시오한. 이 새끼 저 새끼 하며 욕을 그렇게 해대다가도 자기 계약주 이름만 나오면 울려고 하더라. 원장도, 계약주도 다 좋은 사람이래.
시오한이 툭, 창틀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내리깐 눈동자가 속눈썹에 가리어져 잘 보이지 않았다. 낯빛이 창밖, 어두운 구름으로 꽉 찬 먹먹한 하늘과 비슷했다.
-그 계약주를 죽여서 정말 다 뿌리 뽑을 수 있나.
“이리스티리움에서는 그럴 수 있어.”
-…하긴.
“화이람. 그대의 영향력을 확인해 보고 싶다면 시험해 봐도 좋아.”
시오한이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살려놓겠다고?
“화이람. 나는 이 소환에 연관된 것은 그게 무엇이든 남겨놓을 생각이 없어. 황제로서도… 사사롭게도. 이 연구원의 목숨은 감히 그대를 소환한 대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뿐, 중요한 것은 아니야. 숨이 붙어있다 해도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없으며… 죽는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도 않아.”
겨우 이 하잘것없는 목숨이 사라진들, 혹은 사라지지 않은들 무엇이 달라질까. 무감각한 눈동자가 문득 웃었다.
“다만 그리하여 그대가 나를 생각해 준다면, 그것으로 가치가 있겠지?”
-…감동 받을 말이긴 한데, 왜 생색 같지.
“맞아, 생색이야.”
웃음소리가 들렸다.
“알아줘, 화이람. 나는 이렇게 그대를 생각하고 있으니, 이게 내 마음이야.”
-당신처럼 뻔뻔한 사람은 진짜 처음 본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시오한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좀 더 웃음 지었다.
-당신은 당신 해야 될 일을 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 마음은 알겠으니까.
“화이람. 나는 그대가 이 일에… 너무 마음을 쏟지 않았으면 해.”
-…그럼 시간만 좀 줘. 지금은 도대체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12년밖에 안 산 게 왜 이렇게 팔자가 사납냐…. 일단 지금은… 가만있어 봐, 근데 이건 끊을 수 있는 거야? 나 말하는 거 당신이 계속 다 듣는 거야? 당신 말하는 것도 전부?
다소 가라앉은 기색으로 중얼거리던 그가 혼란스럽게 말을 쏟아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깨우치질 못한다. 아마 한동안은 내내 이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가 허둥대는 소리에 결국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와, 웃냐? 웃어? 나도 당신 말 다 듣는다고.
“난 괜찮아.”
-내가 안 괜찮지! 정신 사나워 죽겠네.
“이런, 상처인데.”
-입에 침이나 발라라.
시오한이 공명을 깨우친 것은 사슴이 태어나 네 발이 달렸다는 걸 깨닫고 일어서, 걷다가 금세 달리는 것과 같았다. 만약 그의 계약자가 계속 공명을 깨우치지 못해 나중에 설명해 달라고 해도 시오한은 좋은 선생님은 돼주지 못할 테였다. 알려주지 못해서이기도 하고,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해서.
부슬부슬 흩날리던 빗줄기는 점점 강해져 이제 시오한의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근 1년 동안 실험은 여러 번 진행되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처음에는 소환조차 하지 못 했고, 모리온이 가담한 뒤 소환이 가능하게 되었어도 계약까지는 맺을 수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토록 은밀하게 숨을 수 있었다.
이 세계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계약자들. 그 계약자들의 특성을 이용해 이 시도에 관계된 자들은 모든 흔적을 지웠다.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시오한은 저 역시 이번 일을 인지하는 것이 꽤 늦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은밀하고 치밀했다.
이리스티리움에 국적을 둔 이들 태반은 그들의 황제인 시오한이 계약을 맺어 계약주가 되었다는 것 정도만 알지, 그의 계약자는 알지 못한다. 대외적으로 발표한 적도, 그를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럼 사형수인 웨이드는 어떻게 그의 계약자를 알고 소환해냈을까. 단순히 가장 강대한 계약자를 기원했을까.
시오한이 입술을 비틀었다. 고작 그런 기원으로는 그를 소환해낼 수 없다. 아니… 그의 힘을 생각하면 사실 누구에게도 소환되어서는 안 되는 이였다. 섭리로 따지자면, 그게 섭리지. 시오한이 서늘한 시선을 내리깔았다. 빗물에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 어리석은 사형수에게, 기적을 소환해내도록 했다고 해야 맞겠지.
반군도, 현자의 탑도, 저쪽의 깡패들도 아닌 다른 누군가. 이 이익에 얽혀 있지 않은 제3자가. 환계와 오즈, 두 세상 모두에서 판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시오한과 그의 계약자, 두 사람이 모두 이 일을 알도록. 하지만 왜 그랬을까. 유도 계약, 계약 양도. 섭리에 어긋나는 일을 바로잡고자 하는 정의로운 마음에? 무감각한 시오한의 얼굴 위로 서늘한 비소가 떠올랐다.
“군나르.”
시오한이 호명했다. 언제나처럼, 집무실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군나르 아스터가 조용히 나타나 시오한의 앞에 부복했다.
“폐하께서 짐작하셨던 대로 이미 계약된 계약자들을 소환한 실험이 근 일주일 사이 다발적으로 있었습니다. 소환까지는 모두 성공했으나 계약에는 실패했고, 실험 사실을 숨기기 위해 소환된 계약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모두 전투에 적합하지 않거나 힘이 미약한 계약자들이었습니다.”
군나르가 보고했다. 암군은 서면으로 보고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계약자를 소환하도록 한 실험체들 역시 사형수, 어린아이, 병든 이 등 다양했으며, 마력이 미미해 이치대로라면 계약주가 될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계약을 양도하는 실험과 더불어 인위적으로 마력을 부어 계약주를 만드는 실험 또한 진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 역시 실험 이후 모두 죽여 입을 막았으며, 시신은 아직 수색 중에 있습니다.”
시오한은 손바닥을 적시고 고이기 시작하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문이나 지시는 없었다. 담담하게 보고를 이어가던 군나르가 잠시 멈추었다. 그가 신중히 말을 골랐다.
“또한 연구원 그웬달을 심문한 결과… 오르페노스 공을 소환한 사형수가 사전에 소환하도록 지시받은 계약자는 마커스라는 용병의 계약자라고 합니다. 어째서 오르페노스 공을 소환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며, 이는 연구원 모리온의 자백과도 일치합니다. 그동안 시행해 온 실험에서 그들이 택한 계약자들은 전반적으로 힘이 미약한 이들이었으니, 폐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는 사형수 웨이드의 독단이 분명합니다. 하여 시신과 정황, 주변의 흔적을 모두 읽어낸 결과….”
군나르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사형수 웨이드가 성 밖의 유적으로 이동하기 전, 누군가를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주르륵, 시오한의 손바닥에 모여 있던 빗물이 그의 무릎으로 떨어졌다. 질 좋은 정복에 스며들지 못한 물이 방울방울 흩어져 굴러떨어졌다.
“계약자로 추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