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미친, 뭐야. 당신 어딘데? 뭐야 이거? 내 목소리 들려?
“나는 집무실에 있고, 이유는 나도 모르고, 아마도 맹약의 힘이지 않을까 싶은 중이며, 그대 목소리도 아주 잘 들려.”
시오한이 하나하나 꼬박 답했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아니 시발. 무슨 전화도 아니고, 아, 젠장. 꼬맹이, 너한테 옮았잖아.
머릿속에 울리는 제 계약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오한은 창틀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전 날, 날이 아주 좋았던 어느 때에 그의 계약자가, 화이람이 앉아있던 그 자리였다. 바깥엔 솜털 같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드넓은 성도의 전경은 흐린 먹구름 아래 뿌옇게 잠겨 있다.
시오한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먼지 냄새가 섞인 물기 가득한 송기가, 비로소 물속에 들어온 마른 아가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그의 폐부를 적셨다. 다시 천천히 속눈썹 아래로 드러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생기로 반짝 차올라 있었다. 그가 물었다.
“꼬맹이?”
-그 쪼끄만 애 있잖아. 모리온인지 모링가인지를 계약주로 둔. 아, 그래그래 알았어, 모리온. 와, 이거 진짜 뭔데?
“아. 그 조그만 계약자.”
시오한이 말했다.
-와, 이건 진짜….
연신 감탄하는 목소리에, 시오한은 한쪽 무릎 위에 삐딱하게 턱을 괴고 제 계약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큰일인데… 시오한은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더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아무래도 힘들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보고 싶은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조그만 아이와 엮이니 또 마냥 냉담하게 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다정해서.
큰일이다, 정말. 시오한이 눈을 감았다.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한 힘을 가진 그의 계약자는 때때로 사소한 것에 취약했다. 이를테면, 요리라든가. 늘 무심한 듯 행동해도 결국 다정한 속은 어찌하지 못해 지금처럼 어린 계약자를 무시하지 못하고… 시오한은 본능처럼 깨달은 공명을 좀처럼 인지하질 못 해서 입 밖으로 내뱉는 소리가 죄 시오한의 머릿속으로 쏟아지고 있는 것도 그렇다. 어린아이와 마음에도 없이 유치하게 실랑이를 해대는 소리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그대가 먼저 한 거야, 화이람. 기억나지 않아?”
-이 쥐똥만 한 게, 물어 준다니까? 좀 조용히 좀 해 봐, 제발 좀. 뭐? 내가 언제?
“그대가 다시 그대의 세계로 튕겨졌을 때 말이야.”
‘-시오한!’
환청은 시오한의 오래된 고질병이었다. 해서 그는 곧바로 절 부른 목소리가 그런 헛된 소리가 아닌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그대가 먼저 날 불렀어.”
-내가 그랬다고?
그렇게 그대는 또 날 구원해내고 말지. 뿌연 안개 틈으로 연노란 빛이 물들듯 눈을 감은 시오한의 입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정신이 없어 보이네, 화이람.”
-아니 이 꼬맹이가 자꾸 시끄럽게… 진짜 정신 사납네. 잠깐만 기다려 봐.
그의 계약자는 상황을 정리해 보려는 것 같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전부 시오한에게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시오한은 기꺼이 기다렸다. 기다리는 건 그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지금이야 감을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지만 그의 계약자도 곧, 말이 달리는 법을 배우듯 본능처럼 시오한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을 제대로 깨닫게 될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니 금방 알게 될 테고, 그때까지는 이렇게나마 그의 세계를, 그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잠시 후 그가 다시 시오한을 불렀다.
-시오한?
“응, 화이람.”
-진짜 당신이야?
“정말 나야.
감탄하는 목소리가 생생하다. 꿈꾸는 줄, 하는 것은 아마 혼자 중얼거린 혼잣말이었을 것이다. 속엣말을 숨길 수 없게 되는 취했을 때의 그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이것도 맹약, 아니 맹약….
이것도 혼잣말일까. 즐거운 낯의 시오한이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진짜… 늘 때를 잘 맞추네.
“내가?”
-나도 몰랐는데,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그가 말했다.
-당신이 엄청 보고 싶었네, 나.
“…화이람.”
이러면 정말 참을 수가 없는데. 시오한의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지금 부르지는 말고. 때가 영 아니라.
“방금 전에는 내가 때를 잘 맞췄다고 했잖아.”
-거길 갈 때는 아니야. 나 오늘 좀 바빠.
“너무한걸.”
잠깐 투정 부린 시오한이 물었다.
“그러면 내가 무슨 때를 잘 맞췄지?”
-아, 캐묻네.
“그대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그래.”
-그냥. 좀 도망가고 싶고, 누가 필요하고, 그런 때 말이야.
“…….”
퉁명스럽고 부끄러운 것과는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의 계약자는 때때로 또 이렇게 솔직해, 시오한을 흔들어 놓고는 한다. 정말 너무하네. 시오한이 혼자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하면서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쓴 미소를 입가에 달고서, 시오한이 물었다.
“화이람. 잘 지내고 있어?”
-…갑자기?
“늘 그대에게 묻고 싶었거든. 지금 어때…. 잘 지내? 그런 것들을 말이야.”
-…뭐, 그렇지. 무슨 일이 있겠어. 잘 지내고 있지. 다 괜찮아. 당신은 혹시 지병 같은 거 없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시오한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아주 건강해.”
-하긴, 당신은 황제니까 정기 검진 같은 것도 할 거고… 아픈 데도 없고?
“없지?”
-몸은 좀 어때?
시오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 몸은 그대가 걱정하는 만큼 괜찮아.”
-…보통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냐.
“나는 해 줬으면 좋겠는걸.”
-참나.
“그대가 나를 아주 많이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는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고민하는 걸까. 제 계약자는 감정 변화가 크지는 않았다. 늘 호수처럼 잔잔하다가, 이따금씩 분수의 물줄기가 놀듯 통통 튀고는 한다. 매번, 어김없이 시오한을 흠뻑 젖게 만들면서.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아 숨통이 트인 와중에도 답답했다. 시오한은 감은 시야 속, 깜깜한 어둠 저 너머로 손을 쭉 뻗어 그에게까지 닿는 상상을 해 보았다.
-…아냐, 걱정 많이 하고 있으니 얼른 쾌차하시겠네.
하지도 않은 말을 얼버무린 그가 말했다.
“마음이 전해지도록 해 줘.”
덧붙인 한 마디에 기어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물었다.
-아, 예. 아무렴요. 이거 뭐, 생각이 들리는 거야, 아니면 말을 해야 하는 거야? 계속 이렇게 혼자 중얼거려야 되면 미친놈으로 보이기 딱인데?
“그대는 지금 날 사기꾼이라고 생각했지.”
-…진짜 거짓말 안 한다던 사람 어디 있냐. 난 당신 생각 안 들리거든.
“억울해, 화이람. 농담과는 구분해 줘야지.”
-말이나 못하면.
그가 투덜거렸다. 눈을 감은 시오한의 입술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혹시나 그 조그만 계약자가 그대를 괴롭히거든 말해. 내가 혼내줄 테니.”
-안 그래도 내 계약주가 더 세다고 으름장을 놨거든.
“이곳에서는 내가 가장 강대하다고 얼마든지 자랑해도 돼. 내 화이람에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뻔뻔하고 웃기냐.
한바탕 웃은 그가 말했다.
-그 꼬맹이는 방금 집에 보냈어. 완전 치와와 같은 꼬맹이더라.
치와와가 무엇이냐 하면, 당신 머리통만큼 작은데 그 조그만 몸에 찬 것이라고는 분노밖에 없어 늘 화를 내는 연약한 개라고 그가 부연 설명을 더했다.
-부모가 없더라, 그 꼬맹이.
“부모가 없어?”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딱해하는 목소리였다.
-계약한 지 2년이나 됐는데 그 애가 사는 보육원 원장 말고는 아무도 애가 계약자인 걸 아는 사람이 없대. 내가 보기에는 그럼 둘 중 하나거든. 원장이 진짜 천사거나, 쓰레기거나.
“그대의 생각은?”
-쓰레기지.
안타깝지만, 세상에 천사는 드물고 쓰레기는 흔하게 다양하니까.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라에서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12살짜리 계약자를 혼자 알고 있는 새끼가 애 마력을 어떻게 했겠어.
“그래, 불행히도 흔한 경우네…. 보호자가 없이 세상에 던져진 아이는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니.”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시오한의 얼굴은 서늘하기만 했다. 동정심이라고는 엿볼 수 없었다. 제위에 오르기 위해 태어나 잘리고 벼려져 황제가 된 그에게 그런 건 없는 부분이었다.
-계약주라는 새끼까지 그런 애를 이용이나 하고… 자백한다더니. 했어?
“했지, 자백.”
자백하겠다던 그 말처럼 모리온은 정말 모든 걸 털어놓았다. 마치 다 초연한 것처럼 담백한 태도였고, 쓸데없는 실랑이나 간 보기 따위의 줄다리기는 없었다. 그러나 시오한은 그게 정말 남자가 초연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리하게 머리를 쓴 투쟁이라는 것을 알았다.
-뭐래?
“아이를 먼저 만났으니 그대도 생각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시오한이 말했다.
“들려줘.”
-그 애 특기가 도둑질이래. 엄청 직관적인 이름인 걸 보면 본인이 지은 것 같은데, 사실 그게 제일 확실하긴 하거든.
“독특한 힘이네.”
-그러니까. 그때 그 바늘, 그것도 내 힘을 훔쳐 쓴 거였어.
시오한이 가볍게 웃었다. 종이비행기만도 못하게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바늘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의 계약자가 가지고 있는 힘을 ‘훔쳐 썼다’기 보다 힘이 좀 ‘묻었다’고 해야 맞는 수준이었다. 그의 계약자라면 그 바늘 하나로도 이 에트레제를 모래성처럼 무너트릴 수 있으니, 그 조그만 계약자가 훔쳐 썼다는 힘은 고양이가 물을 마시다가 수염에 튄 정도로 봐도 과하겠다.
“그렇구나.”
어쨌든 그런 감상과는 별개로 시오한이 대답했다.
-기억해? 내가 당신에게 그랬잖아. 날 ‘훔치려’ 했다고. 홧김에 한 말이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 애 특기가 도둑질이라면 비단 특기를 훔치는 것에 국한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어. 게다가 그 애 계약주가 연구원이잖아. 만약 소환진에 손을 봐서 그 애의 특기를 ‘소환’에도 적용될 수 있도록 한 거라면, 자기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고 했던 것도 이해가 가지. 그놈 본인이 아니라, 그 애가 있어야 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