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네 계약주 안 죽게 해줄 테니까 말해 봐.”
이도하가 물었다.
“꼬맹이, 너 특기가 뭐야?”
“…약속해, 그럼.”
“뭐?”
“약속하라고. 모리온 안 죽게 해준다고 했잖아.”
신은호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이도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도하는 누군가의 ‘계약주’를 죽이는 일이 어째선지 마음에 걸려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 말이었는데, 사실 그 문제를 결정하는 건 황제인 시오한이고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더라도 모리온이 죄를 지은 건 분명했다.
그리고 이도하는 황제인 시오한이 하는 일에 그런 식으로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눈앞의 신은호를 바라보았다. 12살이라지만 10살에 더 가까워 보일 정도로 체격도 작고 마른 신은호.
절 방패막이로 썼던 놈도 계약주라고…. 이도하는 입이 썼다.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래도 이도하를 소환해냈던 건 명백한 오판이었지만, 어쨌든 다 털어놓겠다고 자백해 나섰으니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지 않을까.
“…진짜 희한한 꼬맹이네.”
맥주 맛 사탕이 좀 허무해 한 말이었는데, 당장 신은호의 얼굴이 다시 울먹울먹하게 변했다.
“구라지? 너 뻥친 거지? 모리온 죽이려는 거지?”
이도하가 한숨을 삼켰다. 역시 그는 아이와는 영 인연이 아니었다.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 해, 약속, 자.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 찍어.”
이도하가 손을 내밀었다. 킁, 신은호가 코를 먹으며 손을 잡았다. 저보다 두 마디는 작은 손이 야무지게 제 손을 붙들고 있는 걸 보고 있으니 이도하는 참 착잡했다. 도장에 복사, 스캔에 사인까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한 신은호가 이내 웅얼거리듯 말했다.
“도둑질.”
이도하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도둑질이라고. 나는 내가 느낀 특기를 조금 훔쳐다가 쓸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며 신은호는 이도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헐… 훔치면? 계속 쓸 수 있어? 네 거 돼?”
“아니야! 그냥 잠깐. 훔친 정도만 쓸 수 있는 거라고!”
신은호가 바락 외쳤다. 또 울먹울먹한 게 무척 억울한 눈치였는데, 그런 특기라면 과연 그럴 만도 하겠다 싶었다. 제 특기를 남이 쓰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 당장 이도하만 해도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었다.
진짜 별의별 특기가 다 있구나. 이도하는 새삼 실감했다. 그런데 특기명이 왜 저래.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도둑질. 곱씹던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없이는 아무것도 진행될 수 없다던 모리온. 다른 계약주의 계약자를 ‘훔쳐내는’ 소환. 모리온의 계약자인 신은호. 그런데 신은호의 특기가 ‘도둑질’. 이 연관성이 우연일 것 같지는 않다.
“꼬맹이, 너 오즈 가서 뭐 했어?”
“…….”
신은호가 불퉁하게 쳐다보기만 한다. 말하기 싫은 눈치였다. 이도하가 이제 멀쩡한 제 이마를 문지르며 돌멩이를 두둥실 띄워 올렸다. 손톱만 한 돌멩이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자 신은호가 황급히 제 이마를 막았다.
“아무것도 안 했어!”
“진짜?”
“진짜야, 씨. 속고만 살았냐? 모리온은 만날 연구하느라고 바빴단 말이야. 특히 요즘에는 엄청 바빠 가지고 밥도 안 먹어서 내가 차려준 적도 많다고. 그것도 안 먹었지만.”
말하면서 신은호는 점점 시든 풀꽃처럼 시무룩해졌다. 꾹 입을 다물었던 신은호는 짧은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와락 이도하의 무릎을 붙잡았다.
“야, 모리온은 진짜 만날 연구만 했어. 이상한 짓 안 했다니까. 만날 햇빛도 잘 안 들어오는 그 연구실에 처박혀 있느라고 살도 엄청 빠지고 얼굴도 새하얘지고. 근데 나쁜 짓을 언제 해. 진짜야, 진짜 나쁜 짓은 한 개도 안 했어. 내가 만날 옆에서 봤어. 내가 다 말해 줄 수 있어. 모리온은 그냥 나쁜 놈들한테 속은 거야, 응?”
“…….”
12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매달려 오니 이도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신은호가 구체적으로 뭔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제 모리온이 나 소환 못 해? 모리온 못 만나?”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이걸.
“…아니야.”
“진짜지?”
“꼬맹이 계약한 지 얼마나 됐어.”
“그건 왜?”
“대답이나 해, 짜식아.”
“씨. 한 2년?”
“2년?”
길게 잡아야 6개월쯤을 생각하고 있던 이도하는 놀랐다. 그럼 그 불법 실험이 무려 2년 동안이나 진행되고 있었다는 뜻인가? 게다가 그 말은 이 전투적인 꼬맹이가 고작 10살 때 계약자가 되었다는 말이었다.
“2년이나 됐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텐데. 모든 특기자가 아이라에 등록되지는 않지만 모든 계약자가 아이라에 등록될 수밖에 없는 건 마력도 마력이지만, 무엇보다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환에 응하건 말건 그건 계약자의 자유지만 백 미터 밖에서도 눈에 띄는 소환진은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는 것이고, 그 소환진이 언제 펼쳐질지는 다른 세상의 소환주밖에 모른다.
첫 소환 당시 소파에 늘어져 티브이를 보고 있던 이도하는 가족들한테 가장 먼저 목격 당했고, 두 번째는 학교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전교생한테 들켰으며, 세 번째로는 극장에서 새파란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는 바람에 쫓겨났다. 그 이상은 더 거론할 필요도 없었다. 그때쯤에 이도하는 이미 이를 갈며 어디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하며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이건 모든 계약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애로사항이었다. 정해진 시간대에만 소환하는 걸로 계약주와 타협을 보는 계약자들도 있지만 그것도 들쭉날쭉한 시차로 인해 완벽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어떻게 하면 이 애로사항을 한 번 해결해 볼까 하며 온갖 기상천외한 잔머리들을 굴린다.
신은호가 쭉 입을 내밀었다. 짜증 나고 속상한 얼굴로 신은호 잡은 이도하의 무릎 위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야 난 만날 혼자 있으니까.”
“…….”
이건 또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신은호는 학교를 째고 피씨방에 있었다.
“…인마, 너 학교 안 가냐?”
“아, 학교 같은 거 안 가도 되거든? 원장님이 난 학교 안 가도 괜찮다고 했어.”
“무슨 원… 그 은혜의 집?”
이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이렇게 빤할 리가.
“그 원장이 너 계약자인 거 알아?”
신은호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입술을 조물거리는 게 당황하고 초조한 것 같았다. 이도하의 청바지를 손톱으로 벅벅 긁던 신은호가 결국 실토했다.
“너… 원장님한테 말하면 안 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단 말이야.”
“…환장하겠다, 진짜.”
제발, 제발 제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어라. 이도하는 두 손으로 끙,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뭘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복잡하게 꼬이는 이도하의 속도 모르고 신은호가 재촉했다.
“야, 말 안 할 거지?”
“형. 형, 짜식아, 형.”
“아저씨겠지.”
한 마디도 안 진다.
“…야, 꼬맹이. 그 원장이 때리거나 그러진 않지?”
“뭐? 미쳤어? 우리 원장님 존나 착해. 넌 줄 아냐? 악!”
기어이 또 딱밤을 얻어맞은 신은호가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래. 제발 존나 착했으면 좋겠다. 처음부터 외면했다면 모를까, 발을 들이밀었으니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이름을 불러주었더니 와서 꽃이 되었다…. 국어 시간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시가 생각났다. 신은호가 꽃은 아니고 돌멩이와 더 비슷하지만 어쨌든. 힘이 다 빠져 이도하는 마른손에 얼굴을 묻었다.
“…야, 근데 이거 진짜 진짜 비밀이야. 말하면 안 돼?”
이마를 살살 문지르며 불만 가득하게 이도하를 노려보던 신은호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
“뭐를.”
“내 특기 말이야! 너 말하면, 말하면 진짜 내가 막 악플 엄청 달 거라고. 또… 경… 에이 씨.”
생각나는 가장 그럴듯한 협박이 ‘경찰에 신고한다’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 봐도 남의 특기를 도둑질해 놓고 경찰에 신고한다는 게 영 헛소리인 것이다. 신은호가 초조하게 이도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너, 너 어차피 특기 존나 막… 막 개쩔잖아. 내가 훔친 건 바다에 혓바닥 한 번 담근 정도란 말이야. 진짜 요만큼, 요마아아안큼이잖아! 말하면 안 된다? 아무한테도?”
진짜 이 대책 없는 꼬맹이를 어째야 되냐. 이도하가 참 막막하게 절 보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신은호가 그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이도하가 그 손가락을 탁 낚아챘다. 신은호가 놀라 펄쩍 뛰었다.
“말 안 하면 뭐 해주게?”
이도하가 물었다. 신은호가 입을 딱 벌렸다.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야, 존나 치사 빤스. 와! 어른이 이러기냐?”
“이놈, 저놈, 하면서 이럴 때만 어른이지. 이렇게 하자.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 너도 그 원장한테 얘기하지 마.”
어른은 이러지.
“아 뭘?”
“나랑 무슨 얘기 했는지. 오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말 안 했다고 해라 제발.”
“안 했어, 누가 마마보인 줄 아냐?”
신은호는 한껏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픽 웃은 이도하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야, 그럼 약속. 입 다물기?”
“원장님이 물어보면 어떡해?”
“거짓말해, 짜식아.”
“어어, 야!”
이도하는 그냥 늘어진 신은호의 새끼손가락에 제 것을 냅다 걸고 몇 번 흔든 뒤 놓아주었다.
-화이람.
“?”
“이 깡패야!”
신은호가 씩씩거렸다. 분명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여기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으나, 너무 또렷해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발밑을 보았다. 그러나 푸른 소환진은 없었다. 가끔 이렇게 그가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전에도 몇 번 착각한 적이 있는 이도하는 그냥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꼬맹이, 핸드폰 있어?”
“없어.”
“뒤져서 나오면 딱밤 두 대다.”
“너 진짜 경찰에 신고한다!”
-화이람.
뒷주머니에서 우리 아이 핸드폰을 찾아내 제 번호로 전화를 거는데 또 목소리가 들린다. 모기 소리처럼 귓가에 웅웅거렸다. 미간을 구기며 이도하가 또 고개를 털었다.
“꼬맹이 다시 학교로 데려다줄 테니까 일단 집에 가라.”
“야, 모리온은?”
-화이람.
그러나 또다시 들린 소리는 너무 선명해,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응?”
“모리온은?”
“어?”
“왜 이래?”
신은호의 핸드폰과 제 핸드폰을 들고 발신 번호를 확인하던 이도하가 다시 발밑을 확인했다. 그러나 눈을 여러 번 깜빡여도 소환진은 없었다. 환청이래도 이렇게 여러 번이나 들린 적은 없었다. 진짜 미쳤나? 이도하가 멍하니 생각하는데, 때맞춰 앞에 있던 신은호가 어이없는 얼굴로 제 머리 옆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후다닥 저쪽으로 달아난다.
“시오한?”
설마, 하면서도 혹시나 해서 못 미덥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화답이 있었다. 웃음소리였다. 익숙하고 나직한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이도하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불신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신은호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안녕, 화이람.
“…헐.”
“야… 너 진짜 왜 그래?”
경악한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시오한, 당신이야?”
-응. 나야, 화이람.
진짜 대답했어. 미친. 이도하의 손에서 핸드폰 두 개가 뚝 떨어졌다. 으아악! 신은호가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