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이도하는 아까 전의 그 한적한 골목으로 돌아왔다. 키가 낮고 낡은 회색 담벼락, 초라하게 굴러다니는 담배꽁초들. 빠른 걸음으로 성큼 골목을 벗어난 이도하가 주춤 물러서며 얼른 뒤춤에 구겨놓은 모자를 꺼내 썼다.
학교가 끝난 지 벌써 거의 한 시간이 지났다. 종이 치자마자 탱탱볼처럼 즉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이 학교에 남아 있으리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확인이나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도하가 맥주 맛 사탕을 샀던 문방구에 아이들이 방앗간 참새들처럼 옹기종기 몰려 있었다.
머리를 모은 채 뭔가를 탐구하고 있던 아이들이 인기척에 슬쩍 고개를 들더니 이도하를 몹시 수상쩍게 바라보며 경계했다. 키가 훌쩍 큰 남자가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도하는 주변을 둘러보다 가게 구석의 CCTV를 발견했다. 음. 이도하는 잠시 고민했지만, 요즘같이 흉흉한 세상이 이런 행색이라면 맥주 맛 사탕은커녕 피자 치킨으로도 안 넘어올 게 분명하다. 아, 정말 싫은데. 이도하는 망설이다 훌렁 모자를 벗었다. 연신 흘긋거리던 아이가 즉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도하다!”
엥?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더니 우와! 와! 등등의 감탄사와 함께 단숨에 몰려들었다. 이도하다! 진짜 이도하다! 와 대박! 이도하야! 대박 간지! 우와! 존잘! 가지각색으로 들이민 우리 아이 휴대폰으로 찰칵찰칵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댄다. 와중에 뒤돌아 깜찍한 얼굴로 셀카를 찍는 아이들도 있었다. 요즘 애들은 진짜 빠르구나. 수치와 쪽팔림을 인내하며 이도하가 맥주 맛 사탕을 내밀었다.
“꼬맹이들, 너네 다 여기 초등학교 다니지?”
“꼬맹이 아닌데요!”
“맞아요! 방과 후 컴퓨터 수업 있어서 이제 끝난 거예요. 이제 학원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수학이고 하나는 영어예요!”
“형, 형, 특기 한 번 보여주면 안 돼요?”
“우리 엄마가 형 완전 영웅이랬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싸가지가 없어 가지고 자꾸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막 뉴스 보면서 욕해요.”
“야, 욕하면 안 되잖아.”
“싸가지 없는 사람들한테는 욕해도 돼, 멍청아.”
“형, 우리 아빠랑 큰아빠도 특기자예요!”
음. 영어 학원과 수학학원에 다니는 구나. 아빠가 특기자고.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티엠아이에 이도하는 정신이 혼란했다. 이도하는 어린아이들과는 영 인연이 없었다. 그는 7살 미만의 아이가 말을 제대로 하는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이도하가 지그시 미소 지으며 맥주 맛 사탕을 내밀었다.
“신은호라고 아는 사람? 5학년 2반.”
그러나 말이 끝나자마자 이도하는 제 실책을 깨달았다. 신은호는 5학년인데, 이 애들은 연령대가 너무 어려 보였다. 전부 10살 미만의 아이들 같다. 아무리 학교가 자그맣고 전교생이 얼마 없어도 다른 학년까지 알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10살 미만의 아이들은 이도하가 내민 맥주 맛 사탕을 아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거 안 줘도 얘기해 주는데.”
“뇌물이다, 뇌물.”
“아, 엄마가 불량식품 먹지 말라고 했는데.”
“…아는 사람?”
이도하를 또랑또랑하게 쳐다보던 여자아이가 반짝 손을 들었다.
“저 알아요! 그 발랑 까진 오빠!”
“……”
이도하의 얼굴이 모호해졌다. 아이의 옆에 있던 친구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5학년인데 너 어떻게 알아?”
“그 오빠 저번에 문방구 아저씨랑 졸라 싸웠잖아. 엄마랑 학원 가다가 봤는데 고아원에서 커서 그렇다고 그러던데. 만날 거기서 뭐 훔친대.”
“우리 오빠가 그 오빠랑 친한데 전화해서 물어볼까요?”
과연 맥주 맛 사탕 없이도 아이들은 아주 적극적이었다.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너도 나도 핸드폰을 들고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거의 경쟁에 가까웠다. 이도하가 당황스러워 이거 말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오빠가 신은호와 친하다던 아이가 반짝 외쳤다.
“그 오빠 피씨방이래요! 수업 쨌대요!”
“아, 소머리 피씨방? 나 거기 어딘지 아는데. 거기 형이랑도 완전 친해.”
“구라치지 마, 거기 형 대학생이거든?”
“진짜야!”
“가까워요, 저기로 가면 돼요. 데려다줄까요? 1분이면 가요.”
“나 지금 피씨방 갈 건데.”
소머리 피씨방. 알바생이 대학생. 걸어서 1분. 물어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티엠아이에 이도하는 감사를 표하고 맥주 맛 사탕도 뿌렸다. 필요 없다던 아이들은 어쨌든 사탕을 기쁘게 받아 행복하게 빨며 아주 당연한 듯 피씨방까지 이도하를 인도했다.
1분은 아니고 걸어서 5분쯤 되는 거리에 있는 소머리 피씨방까지 가는 동안 동네 여지저기에 퍼져 있던 아이들이 행렬에 참가하기 시작했고, 이도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것처럼 난감하기만 했다. 다음에 다시 올까, 하는 생각도 할 때쯤에는 이미 피씨방에 도착해 있었다.
이도하보다 앞서서 문도 열어주고 신은호를 찾으러 들어간 아이들이 낡은 피씨방 가장 구석에 있던 신은호를 검거했을 때, 그는 게임도 아니고 열심히 인터넷을 하던 중이었다.
‘ㅇㄷㅎ 본 적 있는데 인성 쓰레기임 ㅇㅇ’
기사에 악플을 달고 있었다. 난데없이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한테 붙잡힌 신은호는 당황하다 이도하를 보고는 얼어붙었다.
“와, 이 오빠 진짜 발랑 까졌다. 이거 신고해요!”
아까의 그 여자아이였다. 얼어붙었던 신은호가 쌍심지를 켰다.
“뭐야, 너 나 알아?”
“모르는데.”
“근데 뭐, 시발. 안 꺼져?”
“이거 봐요, 막 욕해요! 악!”
신은호가 여자아이를 팍 밀쳤다. 그런데 밀린 아이도 지지 않았다. 스위치를 켠 것처럼 또랑또랑한 눈이 사납게 변하더니 신은호의 종아리를 걷어차는 게 아닌가. 신은호는 나이에 비해 키도 덩치도 작았고, 여자아이는 신은호와 키가 비슷했다. 본격적인 싸움이 나면 신은호가 잔뜩 얻어맞을 것 같다. 요즘 애들은 정말 남다르구나. 정말 본격적인 싸움이 날 기세라 이도하가 얼른 끼어들어 신은호를 붙잡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친구들. 그럼 안녕.”
그리고 곧바로 도약했다. 미리 봐두었던 은송 초등학교 뒷산 중턱의 한적한 공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신은호가 이도하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시발, 너 나 스토킹했냐?!”
이도하가 눈썹을 들었다. 그리고 불시에 동그란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악! 또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씩씩거리며 이도하를 노려보고 있던 신은호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엊그제 태어난 게 자꾸 욕을 하고 있어. 내가 너보다 10살이 많은데 너?”
“에이 씨, 존나 좋겠다 늙어서! 나이 먹은 게 뭐 자랑이라고 유세야!”
“오, 유세란 단어도 알아?”
“누가 병신인 줄 아냐?!”
“똘똘하네.”
“지랄 진짜.”
이도하가 혀를 내둘렀다. 이런 전투적인 꼬맹이는 처음 본다.
“꼬맹이, 너 왜 계약한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주변에 어른 없어?”
“말했든 말든 지가 뭔 상관.”
“씁-”
이도하가 다시 손을 들었다. 반사적으로 이마를 부여잡은 신은호가 불만에 찬 얼굴로 북- 이를 갈았다.
“내 맘이다 왜!”
이도하는 깊은 숨을 들이쉬며 잠시 평화를 도모했다. 이대로는 한나절 동안 씨름만 하게 생겼다. 그리고 그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도하는 떨어진 낙엽 몇 개를 치워낸 뒤 벤치를 다리 사이에 끼고 앉았다.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약간의 충격 요법이 필요해 보였다. 그가 제 앞을 두드렸다.
“꼬맹이, 이리 와서 좀 앉아 봐라.”
“아씨, 왜? 이거 납치야. 경찰에 신고한다!”
이도하는 그냥 특기로 신은호를 들어 올려 제 앞에 앉혔다. 이 정도 일에는 이명이나 섬광도 없으니 난데없이 허공을 붕 날아와 앉혀진 신은호가 입을 떡 벌렸다.
“너 오즈에서 내가 살려준 거다. 기억나지?”
“……”
“네 계약주, 모링가? 그 사람도-”
“모리온이거든?!”
입을 꾹 다물었던 신은호가 빽 소리를 질렀다. 얼굴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게 이건 정말 화가 난 것 같다.
“그래, 모리온. 네 계약주도 지금 감옥 가 있을 텐데 그 나라 황제가 누구게.”
“……”
“내 계약주거든.”
12살 먹은 초등학생 앞에서 네 계약주보다 내 계약주가 더 세다고 자랑하는 꼴이다. 수치심을 참느라 잠깐 먼 산에 시선을 주었던 이도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잡아먹을 듯이 이도하를 노려보면서, 신은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너, 너, 너-”
“어… 야.”
“모리온한테 무슨 짓 하면 너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이도하를 노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주변에 널브러진 돌멩이들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바닥에 있던 돌멩이가 팍 튀어 올라 이도하의 머리를 냅다 들이받았다. 널린 돌멩이 중 가장 작은 것이었으나 좀 아프기는 했다.
아. 이도하가 머리를 문질렀다. 그리고 끝이었다. 부르르 떨던 돌멩이들도 멈추었고, 달아올랐던 섬광도 가라앉았다. 신은호는 백 미터 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와중에도 뚝뚝 울며 이도하를 노려보는 건 잊지 않는다.
“…이거….”
이도하는 종합적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무엇보다 더 황당한 게 있었다. 이도하의 머리를 때리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던 돌멩이가 붕 떠올라 이도하의 손바닥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신은호는 이제 몹시 억울한 것처럼 흐끅거리기 시작했다. 이도하가 손 안에 손톱만 한 돌멩이를 굴려보았다. 다른 건 너무 커서 들어 올리지 못한 것 같은데….
특기에도 결이라는 게 있었다. 특기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오묘하고 느낌적인 것인데, 특기도 지문처럼 사람마다 고유하게 결이 달라 남의 특기를 겪거나 특기가 맞부딪치면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도하는 신은호가 쓴 특기에서 아주 익숙한 결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밤에도 신은호는 시오한이 이도하의 힘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얼음바늘을 움직였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건 분명 이도하 제 특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