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네?”
타르트를 자르다 말고 김윤혜가 되물었다. 김윤혜가 잘라놓은 타르트를 쿡 찍어 제 입에 넣으며 이도하가 씩 웃었다.
“우르슬라를 만나야겠다고.”
“이도하씨, 저번에-”
“알아. 근데 내가 좀 유명 인사잖아.”
김윤혜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쪼르륵-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며 이도하가 말했다.
“인터뷰 한 번 해볼까 봐. 인소더블 이도하, 독일의 우르슬라 만나보고 싶어 해- 타이틀 괜찮지 않아?”
“국가를 상대로 도박을 하겠다고요?”
도박.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잃을 게 뭐가 있어서? 우르슬라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 그렇게 꽁꽁 숨기려고 드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찔러보면 뭘 하든, 뭐라도 나오겠지. 나오면 물면 되고, 아니면 뭐…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또 찾아보면 돼. 진짜 장막을 찢고 넘어가든, 가서 납치를 해 오든.”
“어쩌려고 그래요?”
“어쩔 건데. 기껏해야 또 주둥이나 털어대겠지.”
사뭇 오만한 모습으로 이도하가 말했다. 와. 김윤혜가 입을 벌렸다. 이도하를 오랫동안 봐 왔지만, 그는 스스로가 인소더블인 것을 자각하고 있기나 한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제 힘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재난 구조 일로 온 세계가 다 시끄러운 마당에 별 동요 없이 차분하다 했더니, 이제 보니까 그게 아니라 아주 오기로 분노와 짜증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미 다 글러 먹은 마당에 어디 한 번 해보자,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맞기도 했다. 세상이 이렇게 요란하게 이도하를 도마 위에 놓고 왈가왈부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뿐이었다. 그가 협조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도하를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니 김윤혜는 이도하의 도박이 아주 산뜻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본인이 괜찮다면야.
“그래요, 그럼. 한번 보자고요, 어떻게 나오는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에 이만한 게 또 없기는 했다. 인소더블과 인소더블의 만남. 단 한 번도 성사된 적 없었던 모두의 상상. 삭제할 수 있는 기록은 모두 삭제하고, 계약주가 죽었다는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말로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그렇게 해서 우르슬라의 존재조차 잊히게끔 하려고 했던 이들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우르슬라 본인은 어떻게 할지.
“타이틀은 구려요. 인터뷰하면 좀 더 자극적인 걸로 뽑아달라고 해요.”
“……”
“그리고 이도하씨, 나도 물어볼 거 있었는데.”
“아.”
그들이 굳이 늘 보던 아이라가 아니라 여기서 보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김윤혜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을 채운 것은 영상을 캡처한 조악한 화질의 사진이었다. 푸르게 화면을 가득 채운 소환진 위로 막 사라지기 직전의 이도하가 포착되어 있었다. 이도하가 요 며칠 동안 아주 질리도록 본 화면이었다. 포커스가 그에게 맞춰져 있으니, 소환진에도 맞춰져 있다고 봐도 좋았다.
이도하는 그날 밤의 일을 아직 김윤혜에게 말하지 않은 참이었다. 김윤혜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김윤혜의 성격상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알게 되면 절대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러다가 혹 위험해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영화만 봐도 진실을 캐내다가 뭘 알게 되는 인물이 가장 먼저 죽지 않던가 말이다. 이도하는 일단 모른 척 해보기로 했다.
“싸인해 줘?”
“이거 이도하씨 소환진 아니잖아요.”
“……”
이도하는 다시 한 번 사진을 확인했다. 여진 때문에 카메라맨도 중심을 잡지 못 해 휘청거리고 있었고, 화면이 움직여 대는 통에 빛으로 이루어진 소환진도 흐릿하게 죄다 번져 있었다. 귀여운 파란 해달 그림이었다고 해도 저게 너구리인지 해달인지 헷갈릴 화면을 보고 용케 그 복잡한 소환진을 분간해 냈다. 이도하는 탄식했다. ‘걸리버의 눈’. 김윤혜의 또 다른 특기를 간과했다.
“…그게.”
이걸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까 그 꼬맹이를 만나고 왔으면 좋았을걸. 아무래도 아쉬웠으나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다. 대충 둘러대도 김윤혜는 꼬치꼬치 캐물을 텐데, 이도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결국 이도하는 일단 아는 것부터 이실직고하기로 했다.
“시오한이 아니었어.”
“네?”
“날 소환한 게, 시오한이 아니었다고.”
이도하가 김윤혜의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이해하지 못한 듯 김윤혜가 인상을 쓰더니 이도하의 커피 잔을 들여다보았다.
“이거 술이에요?”
“아니야.”
김윤혜가 진지하게 물었고, 이도하는 이해했다. 이런 반응이 정상이다. 이미 계약된 계약자를 다른 사람이 소환했다는 것은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것보다 더 못 믿을 소리였다. 상식에서 좀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아주 아득히 벗어난 정도라 웬만해서는 한 번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도하도 직접 겪은 게 아니었다면 미쳤냐, 정도로 반응했을 것이다. 하물며 소환 대상이 이도하라고 하면 한 번에 믿는 게 정상이 아닌 수준이었다.
“호명도 없었고, 소환진도 다르고. 갔더니, 웬 정신 나간 사형수 하나가 기다리고 있더라.”
“……”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해해볼 테니 말해 봐라, 하는 듯 쳐다보는 김윤혜에게 이도하는 그날 밤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주 심각하게, 그리고 큰일처럼 느껴졌던 그 밤의 일은 짧게 요약되었다. 계약주인 시오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를 소환했으며, 발라리아의 반군과 현자의 탑, 그리고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가 연루된 사건이더라. 주범은 자비를 구하며 자백했고, 반군들은 다 죽었으니 사실 이제 마무리 단계라고 봐도 좋다. 와중에 이도하는 신은호 이야기는 슬쩍 빼놓았다.
질문 하나 하지 않고 잠자코 이도하의 말을 다 들은 김윤혜는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김나혜에게 가 냉수를 한 잔 받아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쾅! 하고 내려놓는 소리에 이도하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김윤혜가 이마를 짚었다.
“개미친.”
험한 말을 몇 가지 더 중얼거린 김윤혜가 말했다.
“이도하씨 말이 맞아요. 이건 아이라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요.”
“그래도 김윤혜씨 촉이 좋긴 좋다.”
얼음밖에 남지 않은 잔을 빨대로 휘저으며 이도하가 말했다. 평소와 다른 소환진 하나만 보고 바로 아이라 연구소를 나와 이도하에게 연락하다니. 이건 거의 육감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근데 왜 하필 이도하씨를 소환하려고 했대요? 너무 멍청한 짓 아니에요?”
“……?”
갑자기 기시감이 드는데… 고개를 갸웃한 이도하가 대답했다.
“모르지, 무슨 근사한 계획이 있었거나, 아주 돌아버린 새끼라서 돌아버린 짓을 했거나.”
김윤혜는 아무래도 찝찝한 것 같았다.
“이상한데. 불법실험이라면서요. 누가 실험에서 그렇게 불확실한 수를 던져요? 그거야말로 실험이 아니라 도박이지.”
“그러니까. 계획이 있었거나, 돌아버렸거나.”
그러나 당장 확인할 방법도 없다.
“일단 알고만 있어.”
아메리카노 잔을 들고 이도하가 일어섰다. 김윤혜가 물었다.
“또 소환되면 어떻게 하게요?”
“자기가 없으면 더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다…. 그 말을 한 번 믿어보고, 아니면… 아니면, 뭐.”
아니면 뭐 진짜 다 죽는 거지. 제가 죽이든, 시오한이 죽이든. 이도하가 말을 아꼈다. 이런 이도하식 ‘일단 해 보고’ 방식에 익숙한 김윤혜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면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봐야 아느냐고 한 마디 했겠으나, 이도하는 똥도 된장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 어느 것도 그에게 위협이 될 수 없는 탓에, 이도하는 눈치가 빠르면서도 남들보다 좀 무딘 감이 있다.
“조만간 소환되면 결과 알려줄 테니까 그동안 혹시라도 어디 쑤셔보지 말고 조심해, 김윤혜씨. 아는 척도 하지 말고.”
“아무도 믿지 말고요?”
이도하는 이런 소리는 하기 싫었지만, 별수 없었다.
“아무도 믿지 말고.”
나서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의아하게 절 바라보는 김윤혜에게 물었다.
“김윤혜씨, 나 생각 못했던 게 있었는데, 계약자들은 계약을 맺고 나면 계약주한테 애착을 느낀다고 했잖아.”
“그랬죠.”
“계약주들도 그런가?”
김윤혜가 눈을 깜빡였다.
“이도하씨. 세계를 넘어가는 건 계약자들이에요. 계약주들은 원래 그곳의 존재들이고. 기원으로 우리를 부르는 건 그들인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없지.”
이도하의 얼굴에 착잡함이 비추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그가 김윤혜에게 손을 흔들었다. 간다.
“어디 가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이도하가 시간을 확인했다. 잠깐 얘기했다 싶었는데 그새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아직 남아 있으려나.
“학교.”
“학교요? 지금?”
“어, 뭐 좀 찾아보러.”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홱 던진 이도하가 그대로 사라졌다. 이 난리 통에 무슨 학교. 휴학했다고 하지 않았나? 김윤혜는 날아온 것을 반사적으로 잡아챘던 손을 펼쳐보았다. 익숙한 맥주 맛 사탕이었다. 이런 게 왜 주머니에서 나와.
포장지를 까 입에 넣은 김윤혜가 가방에서 조그만 노트를 꺼냈다. 낙서와 비슷하게 생각나는 것들을 전부 끄적이던 김윤혜가 사탕을 입에 문 채로 미간을 구겼다. 불법실험, 부정 소환, 현자의 탑, 아이라, 발라리온의 반군, 러시아, 권력, 명예, 돈 따위의 단어들이 잔뜩 엉키어 있는 노트 위로 펜이 하릴없이 뱅글뱅글 돌며 원을 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데….”
사형수, 소환, 이도하, 실험체, 사형수, 소환, 이도하, 실험체. 같은 단어들을 연속으로 써내려간 김윤혜가 탁, 펜을 놓았다. 자그마한 노트 반절을 꽉 채운 단어들 중에 이도하의 이름만 이질적으로 눈에 띄었다. 잘못 끼워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