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깜깜한 어둠속에서 손 끝에 닿았던 파인 자국.
‘그 곳에 무엇이 있었어?’
‘소환진.’
“…….”
이도하가 입매를 감싸 안았다. 만약 그 천 년 전의 유적에 있던 게 정말 소환진이고, 그게 우르슬라의 소환진이라면 우르슬라가 한 건 결국 맹약이었다는 소리다. 이도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우르슬라의 계약주는 죽었다고 했는데. 그럼 도대체 맹약이 무슨 의미가….
도대체 둘은 어떻게 된 거지. 죽은 건 맞는 건가?
이제 현관에서 나오는 아이는 셋 내지는 둘이 전부였다. 거의 다 나온 것 같았다. 시선만 현관에 둔 채 생각에 잠겨 있던 이도하가 말했다.
“김윤혜씨, 그럼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죽었다고 주장한 계약자들은?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죽었다고 한 건 독일이 아니라 당시 활동하던 계약자들이야. 결국 독일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계약주가 천 년 전의 사람이었다면 누가 그걸 목격해?”
-죽었다고 나서서 가장 먼저 이야기한 사람이 누군지는 아무도 몰라요. 왜 죽었는지조차 아무도 모르잖아요. 어느 순간 다들 죽었다고 입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때서야 독일도 마지못하게 인정했어요.
“…자작극이라고?”
우르슬라가 더 이상 거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독일이 그럴듯하게 주도한 자작극. 그러나 정말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천 년 전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게 정말 그렇게까지 은폐할 일인지 이도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김윤혜가 말했다.
-…이도하씨, 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요. 그렇게 손을 대고도 어쩔 수 없이 공유했던 계약 초기의 자료들을 제외하면, 독일은 그 이후의 자료들을 전부 기밀 처리했어요. 관심이 멀어지도록 했고, 숨긴다는 사실조차도 숨기려 했다고요.
김윤혜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러면 나는 그 스크랩을 도대체 어떻게 본 걸까요?
“…….”
‘맹약’이라는 단어를 거론했던 그 메모. 그 스크랩은 분명 독일이 우르슬라에 관해 모든 것을 은폐하기 시작한 이후에 적은 것이 분명했다. 우르슬라의 이름은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지만 독일에서 그 스크랩이 우르슬라의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 수가 있을까.
‘사소한 호기심과 잠깐의 번뜩임에서 위대한 발견이 온다’. 굳이 낙서 쪼가리 하나까지 전부 데이터화 하는 의도에 맞게, 스크랩은 국가를 불문하고 아이라 소속의 연구원이라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갔다.
‘스크랩’이라고 부르는 아이라 연구원들의 낙서들은 정말 별처럼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독일이 그토록 숨기려고 작정을 한 우르슬라의 스크랩을, 그게 우르슬라의 스크랩인 줄도 몰랐던 김윤혜, 또 다른 인소더블의 담당 연구원인 그녀가 보았다는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절묘하게 우연을 가장한 누군가의 의도라고 봐야 좋을까.
더 이상 현관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없음을 확인한 이도하가 일어섰다.
“김윤혜씨, 지금 어디라고 했지?”
-언니 카페요.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이도하는 잠시 까맣게 꺼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던 남자가 움직이자 신나게 정글짐을 탐험하던 아이들이 흠칫 놀라며 경계했다. 학교는 분명 끝났는데 신은호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로 샜거나, 아직 안에 남아 있든가 둘 중 하나겠지만 오늘은 그냥 가야겠다. 어차피 어린이 신은호는 내일도 모레도 학교에 나올 테니 오늘만 날은 아니었다.
이도하는 모자를 눌러쓰고 학교 밖으로 나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서 도약했다. 곧바로 사람이 얼마 없는 오르막의 새하얀 카페 앞에 그는 서 있었다. 문에 클로즈 사인이 걸려 있다. 이도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서 종이접기를 하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가 이도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도하, 오랜만이네?”
김윤혜의 언니, 김나혜였다.
“안녕하세요.”
김나혜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도하는 실물이야.”
“진짜 오랜만이네요, 누나.”
누나라고 부를 때마다 저렇게 뿌듯한 얼굴을 한 게 한두 번도 아니긴 한데 퍽 오랜만에 보니 참 민망했다. 이도하는 그냥 슬쩍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소파에 김윤혜가 앉아 있었다. 딸기 스무디가 반쯤 남아 있었고, 케이크 부스러기만 남은 접시가 두 개 포개져 있었다. 핸드폰을 보고 있던 김윤혜는 드르륵-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었다.
“뭐하고 있었어요? 시끄럽던데.”
김윤혜가 핸드폰을 흔들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냐.”
“아뇨, 그냥 인사.”
“우리 사이에 정답게 인사는 무슨.”
김윤혜가 까딱 눈썹만 들어올렸다. 그건 그렇죠. 그런 뜻이었다.
“그래서, 김윤혜씨 말은 누군가 일부러 김윤혜씨가 그 스크랩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우연은 길에서 동전이나 줍는 게 우연이거든요.”
이건 또 어디서 누구한테 들어본 소린데. 우연 같은 건 안 믿는 편이라던 시오한이 생각나 이도하는 잠깐 쓰게 웃었다.
“왜?”
간단한 질문이었다. 간단하고, 사실은 하나뿐인 질문. 모든 일에 반드시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지는 않다. 세상에는 그냥,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훨씬 더 많다. 이도하는 쭉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근래에 제 주위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왜?
“생각해 보자고. 누가 일부러 보여준 거라면, 김윤혜씨한테 뭘 바라서 그걸 보여줬을까.”
김윤혜는 천성이 연구원이었다. 어설프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참지 못 했다. 사실 아이라의 연구원들이 대체로 다 그랬다. 그런 걸 봤다면 김윤혜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김윤혜는 그 외에 맹약 대한 전례가 없었다고 했다. 결국 이도하가 시오한과 맹약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스크랩이었다. 여태까지 아무도 맹약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도하는 시오한과 계약을 맺었고, 김윤혜는 스크랩을 보았기 때문에 그 계약을 맹약이라고 특정 지을 수 있었다. 해서 처음부터 관심을 가졌고… 김윤혜의 입가가 떨렸다. 오싹 소름이 돋는 표정이었다. 이도하도 다르지 않았다. 이도하는 김윤혜와 달랐다.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고 하면 이도하는 오, 그거 신기하네, 하고 말았을 사람이었다. 그들 간의 계약에 관심을 가지지도, 시오한에게 물어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도하씨가 맹약을 하게 될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요, 그럼.”
“…….”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서른세 번이 넘게 소환되면서도 이도하는 단 한 번도 제가 계약자가 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던 그 순간, 발밑에 붉은색 소환진이 펼쳐지던 그 순간까지도. 이도하 스스로도 그런데 도대체 누가 맹약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아니야.”
김윤혜의 시선에, 이도하가 말했다.
“이도하씨. 당사자가 아니라면-”
“시오한은 아니야.”
닿지 않는 두 세계라고 하지만, 이도하는 간밤에 두 세계가 얼마나 서로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체감한 바였다. 만약 김윤혜가 스크랩을 보도록 한 게 오즈에 있는 시오한이라고 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니다. 시오한일 리가 없었다. 이건 ‘그럴 리 없다’는 부정과는 달랐다.
‘화이람, 그대와 내가 만난 적은 없어.’
비록 그게 거짓말이었다고 할지라도. 시오한일 수는 없었다.
“시오한도 너와 다르지 않아. 오즈에도 맹약에 대해 남은 기록이라고는 그 노트밖에 없었다고.”
“더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잖아요. 그것밖에 없다고 하니 그렇구나, 했겠죠, 이도하씨는. 이도하씨를 이용해서 황제가 맹약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면요?”
“김윤혜씨.”
이도하도 이게 합리적인 추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도하는 좀 화가 났다.
“맹약에 뭐가 있는데? 시오한과 내가 맹약의 당사자야. 알아낸다고 한들 뭐?”
“그러니까요. 맹약에 뭐가 있는지를 모르니까. 이도하씨 오즈에 가서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이도하씨가 그랬잖아요, 매번 놀고먹기만 하다 온다고. 정말 황제가 이도하씨한테 바라는 게 그게 전부라면,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이도하씨를 소환한 이유가 맹약에 있어야만 하는 게 타당하잖아요.”
김윤혜는 그래서 맹약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다. ‘그’ 이도하를 소환해 놓고 고작 곁에 두는 게 전부라면, 연구자인 김윤혜가 보기에 낭비도 그런 낭비가 없기 때문에.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이도하씨는 이제 다 상관없는 것 같지만, 나는 아니란 말이에요.”
“그 망할 연구?”
김윤혜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놀랍게도, 서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도하씨가 걱정돼서요.”
“…….”
눈동자가 반질반질하게 반짝이는 게, 눈물이 차오른 것 같았으나 김윤혜는 고집스럽게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모양새가 그렇게 눈물이 찔끔 났다는 것조차 분하고 자존심 상해하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매만졌다.
“윤혜야.”
“그렇게 부르지 마요.”
“반칙은 네가 먼저 했다.”
연구원 대 특기자로. 개인적인 친분이나 감정 빼고 담백하게.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썩 잘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그런 게 있기는 했다.
“시오한이라고 치자. 날 이용해서 맹약에 대해 알아냈다고 쳐. 나는 그래도 상관없어.”
“…와.”
김윤혜는 기가 막힌 것 같았지만, 이도하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게 그게 눈곱 정도만큼 귀여워 보였다. 때때로 김윤혜가 12살에 대학을 졸업한 천재 말고 그냥 19살로 보일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내가 보고 겪은 시오한이 그래.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 안 일어나.”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네.”
“커 봐라. 알게 된다.”
“어이없어.”
김윤혜는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었다. 이도하도 달리 이해시킬 방법은 없었다. 그 사이에 김나혜가 이도하의 앞으로 아메리카노와 딸기가 올라간 예쁜 타르트를 놓아주었다. 이도하를 보며 세상 다정하게 웃은 그녀는 쌓인 케이크 그릇을 가져가며 김윤혜에게 잔소리를 좀 하고 다시 카운터로 사라졌다. 이도하가 먼저 말했다.
“초점을 잘못 잡은 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삐딱선을 타지. 중요한 건 맹약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맹약에 누가 연관되어 있냐, 하는 걸 수도 있다고. 우르슬라 말이야. 연구원으로서 좀 객관적으로 생각해 봐, 김윤혜씨. 우리가 왜 우르슬라를 뒤지게 됐는데? 그것도 그 스크랩을 봤기 때문이잖아.”
“…맞는 말이네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니면 이도하씨가 우르슬라를 보길 바랐나?”
김윤혜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이도하가 타르트를 김윤혜 앞으로 밀어놓았다. 김똘. 김 똘똘이, 김 또라이. 세상 똑똑한 듯 굴어도 아직 애다. 먹는 건 절대 사양하지 않는 김윤혜의 포크 끝에서 부서지는 타르트를 보던 이도하는 그 말에 문득 깨달았다.
“…우르슬라를 만나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