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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77화 (77/250)

77화

방송에 찍힌 소환 장면 때문에 세간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소환 당시 발생한 여진을 못 느꼈다, 리스트 빌딩이 붕괴 위험에 닥친 걸 몰랐다, 구조 요청을 못 들은 거다, 별로 옹호 같지도 않은 옹호를 하며 싸워대는데 사실 그가 그 모든 걸 다 알고도 소환에 응했다고 하면 뭐라고 할지 이도하는 조금 궁금했다.

두 아이의 아빠. 퇴근하고 아이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의 사진.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 편부모 가정. 아르바이트로 학비 충당해 성적이 좋고 교우관계가 좋았던. 죽은 두 사람의 사연들을 연이어 보도하는 걸 보면 이도하는 저걸 지금 저 보라고 저러는 건가 싶었다. 이번 일로 죽은 사람이 백 명도 넘는데 왜 그 두 사람만 굳이? 슬픔과 눈물과 안타까움을 쥐어짜내려나 싶고… 그냥 그랬다.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가 모든 사람들을 다 구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는 사고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런 데서 겪을 죄책감과 책임감의 문제는 제가 마음먹으면 세상 반대편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12살에 이미 다 겪었다.

물론 정말 싸이코패스가 아니기는 한지라 마음이 쓰이기는 해, 김윤혜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이도하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 마침 정말 궁금한 것도 있었다.

“우르슬라가 어떻게 됐는지 되게 궁금한데, 김윤혜씨.”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연결하며 이도하는 시계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는 길에 보았던 문방구로 향했다.

-그게, 이상해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김윤혜는 별다른 말없이 바로 답했다. 앞뒤를 다 자른 뜬금없는 말에 이도하가 의아해 물었다.

“뭐가?”

-전부 다요.

“전부 다?”

-그때 이도하씨 가고 나서 곧바로 독일 지부에 전화를 걸었었거든요. 처음부터 스크랩, 그 메모요. 그 이야기를 한 건 아니고 인소더블인 이도하씨 계약 관련해서 우르슬라의 사례로 참고사항이 좀 있을까 물어봤었어요.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도하씨와 우르슬라는 특기 성질도 다르고 여러모로 다른 게 많아 그런 건 없을 것 같다 그러더라고요.

“바로?”

아직도 이런 걸 파는 구나. 익숙한 과자들이 잔뜩 진열된 평상 위에서 맥주 맛 사탕을 골라낸 이도하가 물었다. 역사상 기록된 인소더블은 현재까지 이도하를 포함해서 넷이지만, 그 중 계약자가 된 건 이도하 이전까지 독일의 우르슬라가 유일했다.

우르슬라 한 명으로 인해 독일은 오일머니도 우스운 최초의 마력국 타이틀까지 만들어냈으니 인소더블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런데 우르슬라가 은퇴했다는 지금 인소더블에 대한 자료에 관심조차 안 보인다는 건 이상했다.

-이도하씨가 처음에 계약하고 나서 아이라가 진짜 곡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바빴었거든요. 변수나 변이 사항이 없도록 상황 통제하고 자료 수집하고, 각국 지부에서는 자료제공 요청 들어오고 연구원 파견한다고 난리고, 독일도 다르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눈치였다고요.

이도하는 계산대로 가 맥주 맛 사탕을 한 움큼 내려놓았다. 조그만 티비에 집중하고 있던 주인이 대충 보고는 이천 원, 한다. 이도하는 지갑에서 이천 원을 꺼내 내려놓고 사탕을 쓸어 주머니에 넣었다. 뉴스가 틀어진 화면에는 흔들리는 카메라 화면 속에 사라지는 이도하의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다. 모자를 좀 더 깊게 눌러쓴 이도하가 문방구를 나섰다.

-한 번 떠 볼까 싶어서 이도하씨 계약에 특이점이 발견돼서 그런다고 했어요.

“무슨 특이점?”

-계약주의 부름 없이 이도하씨 스스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요. 이도하씨 특기 관련해서도 애매한 부분이니까 걸어볼 만하죠. 이도하씨 그 이후로 그거 또 안 했죠?

음. 이도하는 잠시 망설였다. 다들 그렇지만 담당 연구원인 김윤혜와 그의 대화는 사소한 듯해도 전부 연구의 일환이라 봐도 좋았다. 오랜 습관으로 이도하는 김윤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한 번.”

-왜요? 자꾸 하지 마요,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요. 이도하씨 도박하는 성격 아니잖아요.

도박. 확실히 안 좋아하고, 그래서 못 한다. 그래도 하게 되더라. 이도하가 쓰게 웃었다. 도박인지 도전인지 모르겠지만. 때맞춰 학교에 종이 친다. 이도하는 잠시 이어폰의 스피커를 막았다. 그 야시장처럼 조용히 소란스럽던 학교가 노골적으로 시끄러워졌다.

이도하는 모자를 눌러쓴 제 행색이 영 수상해 보인다는 걸 알았다. 잠시 고민한 그는 모자를 벗고 산책하듯이 어슬렁 걸어 시소 위에 걸터앉았다. 슬쩍 경비실을 보았지만 뭘 하는지 그를 알아보는 기색은 없었다.

“알아, 알아. 안 해. 그래서. 그랬더니 뭐래.”

-자료 보내주면 한 번 보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대요.

김윤혜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도하도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도 세상에 한 끗 한다는 사람들은 다 모아놓았다는 아이라의 연구원인데 속내가 이렇게 투명할 수가.

-꼭 말투가 그렇더라고요. 알고 싶은데, 선뜻 나서기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도저히 무시하지는 못하겠고, 그런데 또 여러 말 하고 싶지는 않고.

“뭐, 썸이냐.”

-안달난 개새끼 같았다고요.

“…….”

이도하가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은 먹었을 시간인데.

“단 거라도 먹으면서 일해라, 김윤혜씨.”

-지금 초콜릿 케이크 먹고 있어요.

“어, 그래. 혼자서도 잘 하지 김윤혜씨….”

현관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가방을 휘둘러대며 우다다다 여기저기로 산개해 뛰어나오는 게 꼭 탱탱볼 한 박스 떨어트린 것 같다. 하나하나 유심히 바라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딴말 말고요.

“어, 그래서.”

-일단 자료 보내겠다고 하고 끊은 다음에 우르슬라 자료를 전부 뒤져봤거든요.

탱탱볼 몇이 이쪽으로 굴러온다. 그리고 개중에 이도하가 찾는 서은호는 없었다. 이도하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몸을 좀 숨겨야 되나. 그러나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초등학교 운동장에 숨을 곳이라고는 없었다.

-자료가 없어요.

김윤혜가 말했다. 이도하가 반문했다.

“뭐?”

-우르슬라가 계약자가 된 게 2001년이에요. 그 때 독일에서는 대대적으로 인소더블 계약을 발표하고 우르슬라가 얼마나 많은 마력을 매개할 수 있는지 떠들어 댔어요. 이도하씨도 기억하죠?

기억한다. 당시 이도하는 16살이었고, 인소더블 판정을 받기 전이었다. 티비에 연일 보도되었고,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선임님이나 선배님들한테 듣기로는 그렇게 떠들어 댄 것치고 독일에서 자료 공유에 엄청나게 비협조적이었대요. 아이라는 각국 지부라고 해도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료 제공 의무가 있어요. 강제적인 수단까지 동원해 가면서 압박이 들어오니까 독일 지부에서 공개한 게 우르슬라의 연구 일지였대요. 우르슬라는 아이라의 연구원이었기 때문에 소환되어서 일어난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도하는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통통 튀어온 아이들은 시소에 모자를 눌러쓴 체격 좋은 남자가 앉아있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주위를 피했다. 여전히 서은호는 없었고, 계속해서 밀려 나오는 아이들 중에도 서은호는 없었다.

-그때 제공된 자료들은 한국에도 남아있는데, 고작 2년 치뿐이에요. 2년 뒤에 우르슬라의 기록은 전부 기밀 취급되어 어디에도 공유되지 않았어요.

“다른 나라들은 가만히 있었고? 처음에 압박 주고 난리도 아니었다며.”

-또 다른 인소더블이 나타났잖아요.

“…….”

또 다른 인소더블.

이도하.

2년 뒤는 16살이었던 이도하가 18살이 되어 인소더블 판정을 받은 해였다.

우연인가. 아니, 순서를 바꿔야했다.

“…내가 인소더블로 밝혀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숨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숨길 수 있었던 거구나.”

이도하의 얼굴이 낮게 가라앉았다.

“왜? 그렇게까지 숨겨야 할 이유가 뭐가 있어서?”

-이도하씨, 우르슬라가 소환되어서 뭘 했는지 아는 거 있어요? 들어본 적은요?

“…너무 많은데.”

말 그대로, 우르슬라가 소환되어서 뭘 했는지에 대한 소문은 너무 많아 뭐가 진짜고 가짠지 분별이 힘들 정도였다. 계약주가 어린아이라는 소문은 제법 초기에 퍼졌지만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었고, 오즈에서 우르슬라를 봤다, 뭘 하더라, 연구원이라고 거기서도 연구한다더라, 떠들어 대는 사람은 많은데 확인할 길은 없었다.

오즈에서는 그 무엇도 들고 올 수 없으니, 믿을 수 있는 것은 계약자들의 입뿐인 것이다. 공인된 우르슬라의 특기가 ‘되돌아가는 태엽’, 시간에 간섭하는 특기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더했다. 다들 알아서 적당히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믿었다.

-그러니까요. 뜬소문과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증언들이 너무 많아요. 그런데, 이도하씨. 정작 우르슬라가 소환된 초기의 기록을 보면 다른 계약자에 대해서도, 이리스티리움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는 오즈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가 않아요.

“우르슬라를 소환한 계약주가 어느 나라 사람인데?”

-몰라요.

“…….”

-그때도 독일에서 자료를 제공할 때 우르슬라의 기록에 손을 댄 거라는 주장은 많았대요. 근데 지금 보니 어떻게 다들 의심만 하고 넘어갈 수 있는지가 나는 더 의심스럽거든요. 계약주의 나라를 특정할 만한 사실도, 시간대를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사실도 아무것도 없어요. 계약주의 이름이 엘하시온이라는 것과, 우르슬라의 죽은 동생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 말고는. 그런데 당시에 활동했던 계약자들 중에 엘하시온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어요.

김윤혜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낡은 그네가 끼익, 끼익, 녹슨 소리를 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정오를 넘긴 햇볕 속에 떠돌았다. 이제 현관에서 나오는 아이들도 드문드문하다.

-이도하씨. 오르페노스 황제가 오즈에서 보았다던 맹약의 기록이 천 년 전의 것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우르슬라의 계약주, 그 천 년 전의 사람이었던 거 아닐까요?

‘되돌아가는 태엽’. 우르슬라의 특기가 시간에 간섭하는 힘이기 때문에, 천 년 전에 존재한 계약주의 부름에 우르슬라가 응답하고 만 것이라면. 그리고 우르슬라는 그 사실을 모르다가… 나중에야 깨달았다면.

-그래서 맹약을 생각해내야만 했던 거 아닐까요?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 영원히 지켜질 약속.

‘천 년 전의 이름 없는 왕국의 유적이야.’

깜깜한 어둠 속에서 손끝에 닿았던 파인 자국.

‘그곳에 무엇이 있었어?’

‘소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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