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이번에는 유달리 많네요, 도하군.”
이도하는 막 수조에서 나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에너젠의 김기현 소장이 직접 가운을 건네고 있었다. 웃을 때마다 광대가 볼록 솟는 얼굴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주름이 얼마 없었다. 하회탈을 참 많이 닮은 얼굴이 오늘도 만면에 웃음을 담고, 그러나 또 아주 은근히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데 이도하는 이 사람이 웃는 걸 보면 매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폐하께서 도하군 힘을 크게 쓰시는가 봐요?”
“…뭐.”
크게 쓰기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룻밤 동안 참 다사다난했으니 마력이 유달리 많을 수밖에 없었다. 두루뭉술하게 대꾸하며 이도하는 김기현 소장이 내미는 가운을 받아 둘렀다. 독일에서 자문을 얻어 더 많은 마력을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이번에는 퍽 자신 있어 했는데, 그럼에도 이도하는 또 냉탕이 온탕으로 변하는 과부하를 겪어야 했다. 인소더블이 매개하는 마력을 다 감당하지도 못한다는 뜻이니 자랑할 일은 아닌데 이제는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기술의 부족함을 자책하는 대신에 이도하를 엄청나게 대단한 쪽으로 추켜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았다. 이래나 저래나 이도하는 별로 달갑지도 않았다. 방금 이 수조에 쏟아 넣은 마력이 사실 절반이나 간신히 넘는 정도라는 걸 알아도 저렇게 은근하게 웃을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래봐야 결국 저만 귀찮아질 일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오늘은 갈 데가 있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요.”
탈의실이 코앞인데 굳이 따라나서며 김기현 소장이 말했다.
오즈에서 다시 돌아온 후 이도하는 다시 구조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만 하루가 좀 더 지나있는 동안 유세오의 말처럼 전 세계적으로 뭐가 맞고 뭐가 틀렸니 하며 키보드 배틀을 뜨고 있었으며 언론은 박 터지는 싸움에 더 신이 나서 장구를 치고 불쏘시개를 밀어 넣고 있었다.
세상이 그렇게 한 발짝 멀리서 열을 내는 동안에도 구조 활동은 착실히 진행되어 거의 마무리되고 있던 차라 단장인 케이시 윌리엄스는 이드로 철수 명령을 내렸다. 예정된 절차였지만 또 매우 시끄러웠고, 케이시 윌리엄스는 할 말이 매우 많은 것 같았지만 그저 이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수고 많았고, 당신들 다 영웅이에요.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리고 이도하는 국제도약이 인정된 특기자의 힘을 빌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휴학 신청서를 넣었다. 집 주위로 워낙 취재진이 난리를 쳐 대고 있어 이도하는 부모님도 호텔로 모셨다. 아이라에서 귀빈용 숙소를 내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그러고 나니 에너젠에서 이번에는 제발 빨리 좀 와라, 하고 곱고 정중한 말로 닦달을 해 대 그렇게 한 참이었다. 다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마력 한 방울이라도 흩어질까 안달을 한다.
“뭘요?”
“책임이니 뭐니, 지금 시끄럽잖아요. 원래 세상이 그래요. 못한 것만 기억하고 잘한 건 금방금방 잊어버려. 사람들이 참 고마운 줄 모르지.”
“…금방 익숙해지니까요.”
이도하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별로 길게 대화를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생각하면 돼. 에너젠에서도 각별히 신경 쓰고 있으니까 혹시나 도하군이 피해를 입을 상황은 없을 거예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얘기해요.”
김기현 소장이 이도하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웃는 얼굴도, 토닥이는 따뜻한 손도 꼭 할아버지처럼 친근한데… 이도하는 얼굴과는 달리 주름진 손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요.”
되묻듯,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도하군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줘야지요.”
“…….”
아이라와 에너젠. 모든 특기자들이 계약자는 아니지만, 모든 계약자들은 특기자다. 아이라와 계약자들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였고… 계약자들의 마력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에너젠 또한 마찬가지다. 이도하가 눈을 들어 김기현 소장을 바라보았다. 꼭 따뜻한 것처럼 웃는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의심할 여지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이도하가 제 손을 잡은 김기현 소장의 손을 덮었다.
“…네. 무슨 일이 생기면요.”
대답하며, 손을 빼낸 이도하가 탈의실로 들어섰다.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긴 이도하는 잠깐 고민하다가 그냥 바로 도약을 하기로 했다. 에너젠에서는 한껏 그의 편의를 배려해 에너젠의 건물 앞에 포진하고 있는 기자들을 뚫고 지나갈 수 있도록 리무진도, 경호원도 모두 지원해 주겠지만 그러면 도착하는 곳까지 따라올 테였고, 무엇보다 지금 이도하가 그런 그림을 보여줬다가는 또 여기저기에서 굉장한 관심을 보여줄 테였다. 이도하는 김기현 소장의 말처럼 그런 것들에 ‘마음을 쓰지는’ 않았지만 괜히 더 욕먹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도하는 흘긋대는 시선을 무시하고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구간마다 씨씨티비가 검은 눈동자를 반질거리며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담배를 피는 테라스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주머니에 꽂아놓은 핸드폰이 쉬지 않고 진동해댔다. 받아야 할 연락도 있어 아주 꺼놓을 수가 없는지라 몇몇 인물만 알람을 울리도록 해놨는데도 이 모양이다. 그러니 핸드폰은 아무리 충전을 해도 그만 죽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테라스로 나서는 즉시 도약한 이도하가 주변을 확인했다. 양옆으로 온갖 낮고 낡은 회색 담이 선 좁은 골목에는 담배 꽁초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초등학교 앞인데 웬 담배가 이렇게 많아. 얼굴을 구긴 이도하가 주머니에서 꺼낸 모자를 눌러쓰며 죽어라고 진동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김똘’이 떠 있다.
“어, 김윤혜씨.”
-이도하씨 어디예요?
“나 잠깐 볼일 보러. 왜.”
-볼일 언제 끝나는데요? 할 얘기 있어요.
“몰라. 끝나면 내가 아이라로 갈게.”
-아이라로 오지 마요.
골목을 벗어나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김윤혜는 집돌이였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외출도 잘 안하고 집에서 모든 평화를 찾는다. 김윤혜와 저가 할 얘기라면 결국 일 얘기일 텐데 굳이 아이라로 오지 말라는 건 김윤혜답지 않았다. 다른 데서 봐요, 도 아니고 굳이 아이라로 ‘오지 말라….’
“갑자기 왜?”
다시 걸음을 옮기며 이도하가 여상하게 물었다. 정오를 지나 막 오후로 넘어가는 동네는 한적했다. 이름이 다 헤진 키가 낮은 아파트, 오래된 빌라 건물, 낡은 간판, 불량식품과 잡다한 장난감들을 잔뜩 내놓은 문방구, 선녀가 아니라 요괴에 더 가까워 보이는 벽화 위로 온갖 낙서가 뒤덮인 학교 담벼락이 정겹다. 유유히 흐르는 것 같은 공기 중에 먼지 냄새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동네 자체가 나이 든 노인 같았다.
-사람이 촉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게 다 빅 데이턴데 나만큼 똑똑한 사람이면 촉도 꽤 정확하다고 봐야겠죠.
아직 김윤혜에게 소환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은 이도하는 뜨끔했다. 그러나 재빨리 생각해 봐도 김윤혜에게 그날 밤의 얘길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유세오는 아무것도 모르고, 설마하니 이도하가 지금 찾아가려는 그 꼬맹이가 김윤혜를 만났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라로 오지 말라는 게 영 심상찮다. 진짜 뭘 알고 이러는 건가. 이도하는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어, 김윤혜씨 똑똑하지. 촉이 뭐래?”
-촉이 이도하씨 좀 털어 보래요.
김윤혜가 태연하게 장단을 맞췄다. 담벼락을 따라 걸어 운동장이 썰렁하게 빈 초등학교 입구에 도착한 이도하는 낡은 나무 명패 앞에 섰다. 은송 초등학교. 겨우 두 층뿐인 학교는 크기도 아담했다. 운동장에 그네와 요즘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정글짐과 시소도 있었다.
“굳이 아이라 밖에서? 나 안 그래도 지금 탈탈 털리고 있는데 뭐가 털 게 또 있어서. 사람들이 내가 초등학교 때 몇 학년 몇 반 몇 번이었는지까지 알더라, 나도 기억 안 나는데. 인터넷 찾아봐.”
-이도하씨,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요.
“내가 싸이코패스냐?”
-댓글 봐요?
“안 봐도 여기저기서 들려줘.”
이도하는 잠시 핸드폰을 떼고 시간을 확인했다. 2시 19분. 하교 시간이 30분이라고 했으니 곧 끝날 시간이었다. 이도하는 돌아와서야 그 계약자 꼬맹이에게 나이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계약자니 찾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생전 있는 줄도 몰랐던 계약자 커뮤니티까지 다 뒤져도 흔적조차 없었다.
한국인 계약자라고 해 봐야 고작 200여명에 불과했다. 이도하가 알기로 그 중에 초등학생 계약자는 없었다. 한국이 아니라 어딜 뒤져도 18세 미만의 계약자는 없다. 18세도 불과 몇 년 전에 경신된 역대 최연소 계약자의 나이였다.
오즈가 선별적으로 미성년자들을 골라내는 양심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 미만으로는 소환을 감당할 능력이 여물지 못하는 나이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계약주의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무도 그 꼬맹이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초등학생 계약자라고 하면 이도하나 오한울의 경우처럼 개인정보 보호 따위 없이 알려 질 수밖에 없을 텐데도. 또 제가 세상에 너무 무심했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쯤 되면 그 꼬맹이는 아이라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도하는 약간의 불법과 특기가 가미된 짧은 우여곡절 끝에 아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서은호. 12살. 은송 초등학교 5학년 2반. 소재지 은광동 은혜의 집.
그 짧은 신상 한 줄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계약자라는 사실, 계약주 모리온, 그리고 그날 밤의 일까지 종합하면 안 봐도 12년 짧은 인생의 굉장한 우여곡절이 짐작된다. 이도하는 벌써 머리가 아팠다.
“뭐라고?”
잠깐 핸드폰을 떨어트린 사이 김윤혜가 하는 말을 듣지 못한 이도하가 다시 물었다.
-이도하씨 잘못 아니라고요.
“…….”
이도하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화면에 분명 ‘김똘’이라고 적혀있다. 김 똘똘이, 김 또라이. 김윤혜가 맞는데. 이도하는 좀 떨떠름해 하다가, 대답했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