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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74화 (74/250)

74화

혼란하다. 이도하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남자를 바늘꽂이로 만들 것 같았던 바늘들이 씻은 듯 사라졌다. 원래부터 그런 건 없었던 것처럼 허공이 말끔했다. 엉엉 울다 욕을 하다, 또 울던 아이가 거의 통곡을 터트리며 남자를 끌어안았다.

“…….”

시오한이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하게 돋았던 섬광이 흩어지며 다시 황금색 눈동자가 돌아왔다. 기묘한 힘의 우위였다. 마력을 제공하는 건 시오한이며, 그 마력으로 특기를 운용하는 건 이도하인데, 다시 또 그 힘을 공유하여 시오한이 쓰는 힘을 이도하 저가 제한하고 있으니.

당장 마력을 조절하여 이도하가 특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는 시오한은 전혀 그럴 기미는 없었다. 이리스티리움의 제1기사인 그는 원한다면 얼음으로 된 저 가느다란 바늘 하나로도 눈 깜짝할 새에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도하는 막을 수 없을 텐데도.

“그대를 소환했어, 화이람. 내 앞에서.”

“알아, 아는데.”

“저자가 그 연구원인 거야.”

이도하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한 끗 차이로 목숨을 건진 남자는 주저앉은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붙잡았으며, 나머지 하나는 추적 중. 남자가 그 나머지 하나였다.

“다- 전부 말하겠습니다.”

“모리온!”

아이를 밀어낸 남자가 엎드렸다.

“그웬달, 조셉… 그들보다도, 제가 주도한 연구입니다. 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진행하지 못합니다. 전부 고하겠습니다. 저쪽에서 원했던 것도, 하려던 것도, 뭘 하고자 하는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전부. 그러니….”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지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창백하고 입술이 파랗게 질린 얼굴, 마른 몸, 그럼에도 눈빛만은 형형하다.

“감히 자비를 청합니다.”

남자가 땅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하도 울어 도무지 진정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던 아이가 눈치를 보더니, 그를 따라 엎드렸다. 살려주세요- 헐떡거리느라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이 그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에서 새어 나왔다. 이도하를 물어뜯으려 하며 특기를 치워내던 격렬한 분노는 사라지고 아이는 이제 그저 두려워 떨고 있었다.

“…와.”

그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건 뭐지. 누가 악역인 그림인가, 이게. 저런 거래를 하자고 이도하를 소환해내면서 곁에 아이를 두었다면 속이 뻔하지 않나. 아이를 방패막이로 쓰는 속이 구역질이 났지만 어쨌든 그건 반드시 통할 가능성이 큰 수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자는 버젓이 이도하를 소환해냄으로서 제 말에 거짓이 없음과 함께 능력도, 쓸모도 전부 증명해낸 뒤였다. 긴말을 할 필요가 없는 아주 빠르고 효율적인 도박이며, 어차피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신세라면 객관적으로 충분히 목숨을 걸어볼 만한 수다. 객관적으로는 그랬다.

“화이람을 소환해낸 값으로 고작 그 머릿속에 든 것을 걸겠다….”

시오한이 말했다. 이도하가 순간 놀라 그의 팔을 잡았다.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 내리면서도 서릿발 같은 시선이 남자에게로 내리꽂혔다.

“지나치게 값어치를 높게 매기는구나. 네 신념도, 네 미래도, 네 목숨, 네 시체까지 모두 다 걸어도 감히 한 끗조차 채우지 못할 터인데.”

시오한이 냉소했다. 이도하는 머리끝이 주뼛 서는 분노를 느꼈다. 살갗이 저렸다.

“시오한.”

“지금 내게 비는 저 입이 없어도 머릿속에 든 것을 파내는 건 어렵지 않아. 거짓을 가려내야 할 필요도 없으니 더 확실하기까지 하지. 감히 그대를 소환해 낸 대가가 되지 못해. 그 어떤 것도, 그 대가가 될 수 없어.”

“잠깐만, 시오한.”

암군은 전원이 계약주였다. 방첩과 추적, 진압, 심문에 특화된 계약자들이 포진해 있다. 그중에 죽은 사람의 머릿속을 뒤져내는 계약자가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그 외에도 쉽사리 상상해내기 힘든 특기를 가진 계약자들이 얼마나 더 있는지 몰랐다. 그가 분노를 감수하며 굳이 살려둘 이유는 없는 것이다. 설령 그런 방법 따위가 없었더라도 시오한은 남자를 저며 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시오한, 아까와는 달라.”

“다르지 않아.”

“소환하기는 했는데, 그게- 나도 좀 돌아버리기도 했었고, 처음부터 다 불려고 부른 것 같다고. 게다가 정보를 그냥 뽑아내 추려야 하는 거랑 알아서 정리해 털어놓는 건 다르잖아. 진짜 중요한 걸 놓칠 수도 있는 거 아냐?”

이도하는 제가 하는 말이 맞는 말인지, 제가 왜 그를 막아서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 채로 일단 떠들었다. 시오한이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엎드린 남자와 조그만 아이, 그를 막아선 이도하 자신, 그리고 그 앞에 선 시오한. 이도하는 이 구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싫었다. 망할- 입술을 깨문 그가 와락 시오한을 끌어안았다.

“시오한. 진정해.”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저 새끼 하나 이 자리에서 죽인다고 끝날 일도 아니잖아.”

느린 손이 이도하의 등을 쓸었다. 마치 제 자신을 진정시키듯 차분히 쓸다가 당겨 안은 시오한이 이도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는 내게 화를 냈었는데.”

“…어, 그랬지. 미안.”

좁은 석실에서 그의 멱살을 잡고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던 이도하가 반성했다. 그건 정말 그 사형수가 계약을 하려 했기 때문이었는데… 하는 반박도 잠깐 떠오르긴 했지만 조용히 하기로 했다. 어쨌든 남자가 절 소환해서 기분이 나쁘기는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시오한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상상을 초월하게 화가 나기는 했지만.

시오한은 아주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닿는 것마다 전부 베어버릴 것처럼 서 있던 기세가 천천히 가라앉듯 그가 이도하에게로 몸을 기대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지금 정말 이럴 때가 아니었다. 티 나지 않게 시오한을 부축해 돌아선 이도하는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돼 그들을 보고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야, 꼬맹이.”

아이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눈에 쌍심지를 켰다. 성질머리가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넌 한국인이지.”

“…그래.”

“그래?”

“…네.”

그럴 줄 알았다. 이런 전투적인 어린이가 동양에 또 달리 어디 있을까 했다. 이도하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 순간 아이의 뒤로 누군가 뚝 떨어져 내렸다. 오늘 벌써 여러 번 놀란 이도하는 더 놀랄 기력도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일색으로 차려입고 있으니 남자가 누구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그가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 일으켰다. 흠칫 놀란 아이가 발버둥 치려 했으나 옴짝달싹도 못 한다. 남자가 팔로 아이를 끌어안아 귀를 막고 가린 뒤에 시오한에게 인사했다.

“형군 군단장, 오팔이 폐하를 뵙습니다. 보고 드린 것과 같이 연루된 연구원은 현재 파악한 바로 모두 셋. 그중 연구원 조셉은 이미 암살된 뒤였으며, 방금 전 연구원 모리온을 추적 중에 그를 암살하려던 시도가 있어 추살하였습니다.”

“이 자가?”

“모리온입니다, 폐하.”

털썩! 오팔 샤테어의 옆으로 시체 둘이 포대 자루처럼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건물의 꼭대기에 길쭉한 인영이 서 있다. 시오한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올린 실루엣이 이도하에게는 반갑게 손을 흔들더니, 푸른 잔영을 남기고 사라졌다.

“암살자는 계약자였나.”

“아닙니다.”

“시오한.”

이도하는 마음이 조급하고 초조했다. 그가 숨을 쉬는 것만 해도 마력이 소모되고 있는데 암살자까지 돌아다닌다고 하니 마음이 불안해 더 늦기 전에 도약을 하고 싶었다. 마주 잡은 손도, 몸도 뜨거웠다. 얼핏 싸늘한 시선도 흐릿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군은 시오한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고, 엎드린 남자는 숨조차 쉬이 내뱉지 않았다. 잠시 후에, 시오한이 말했다.

“오팔.”

“하명하십시오.”

“데려가라.”

“예, 폐하.”

바짝 날이 서 있던 공기가 그제야 흘러가는 것 같다. 이도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에게 잠깐 시선을 주자, 오팔 샤테어가 아이를 내려놓았다.

“꼬맹이, 너 이름 뭐야.”

“…….”

눈치를 보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아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의 입술만 달싹거리는 수준이었다.

“루케.”

“말고.”

“…신은호.”

“신은호.”

이상하게 귀에 안 박히는 이름을 몇 번 되뇌어 보며, 이도하가 곧 도약했다. 기척도 전조도 없는 도약으로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에 그들은 이도하에게 가장 익숙한 시오한의 침실에 도달해 있었다. 품으로 파고들듯 안겨 오는 시오한을 침대에 앉힌 이도하가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잔뜩 쏟아진 머리칼을 넘겨주고 보니 안색은 창백한데 몸은 뜨겁다.

“…왜 그러고 있어, 화이람.”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시선이 흐릿했으나 그래도 생각했던 것만큼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이도하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쓰러지고, 허둥대고 매번 난리였는데 이것도 익숙해진다. 밤 동안 그만큼의 힘을 썼는데도 이 정도에 그친 거라면 가히 인간승리라고 할 만했다. 여러 일이 없었다면 족히 며칠은 머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진짜….”

비로소 힘이 쭉 빠진다. 비틀 균형을 잃었다가 쿵, 엉덩방아를 찧고 앉은 이도하가 웃음을 흘리며 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대었다.

“진짜 긴 밤이었다.”

시오한이 말없이 그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잠시 꾸물거리기에 뭘 하는가 싶었더니, 주르륵 미끄러진 시오한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어어- 코앞에 이도하가 앉아 있는 데도 그렇게 미끄러져 내리니 몸이 완전히 붙은 꼴이 되었다. 시오한이 부스스 웃었다.

“나 참….”

이도하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이의 이름은 왜 물어봤어?”

시오한이 물었다.

“저쪽이 같이 엮인 일이잖아. 계약자라면 애라도 뭔가 알고 있겠지. 애들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애들이 더 눈치가 빨라.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그럴 필요 없어.”

“…….”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그렇게 하는 말이다. 이도하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오한의 가슴에 머리끝을 대고서 긴 한숨을 내쉬는 그의 시선에 닿는 게 있었다. 두툼하게 깔린 카펫이었다. 그 아래 숨겨진 것. 망설이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을 보았다.

“물어볼 게 있어, 시오한.”

“응.”

“당신과 내가 혹시… 만난 적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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