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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73화 (73/250)

73화

“다 됐어요!”

그때 유세오가 상큼하게 외쳤다. 푸르게 돋았던 섬광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다. ‘피 통이 너무 커서 다 못 채운다’. 언젠가 유세오가 했던 말 그대로 시오한은 완벽해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안색이 나아져 있었다. 그는 말없이 소매를 내리고 있었다.

“너도 아는 얘기야?”

시오한을 보며, 이도하가 유세오에게 물었다. 시오한도 그를 보았다. 여상하고 담담했다. 이리나 소버스에게 지갑을 통째로 받던 유세오가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알죠. 형, 오리도스 먹을래요? 진짜 맛있는데. 여기서밖에 못 먹어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오리도스가 아닌-”

“난 몰랐는데.”

“형은 원래 관심 없잖아요. 먹을 거죠?”

“…아니.”

에잉. 유세오는 한껏 실망했지만 시오한이 있는 자리라 더 조르지는 않았다. 그는 뿌듯하고 신이 나서 골목 밖의 조용한 인파 속에 섞여 사라졌다.

이리나 소버스는 자정이 다 넘은 이 한밤중에 성도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대충 눈치챈 듯했지만 먼저 물어보지는 않았다. 유세오는 전혀 의심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그간 있었던 몇 번의 경험들로 유세오는 난데없이 마주친 이도하와 황제인 그의 계약주가 완전히 진이 빠져 있어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다. 이제는 당연한가 싶은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도하가 문득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까닥, 제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태어나 평생을 봐온 제 손가락이 뜻대로 움직이는 게 낯선 느낌이었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느낌.

“폐하, 환궁할 예정이시라면 신이 호위를 할까요?”

“그대의 계약자가 아주 실망할 텐데.”

“그렇겠지요?”

이리나 소버스가 선선히 웃었다. 이도하에게도 우아하게 목례를 한 그녀가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돌아서려다 움찔 멈추었다. 놀란 눈이 이도하를 바라본 순간, 푸른빛이 섬광처럼 터졌다. 골목 전체를 가득 채우고 눈을 찌르며 사위를 새하얗게 물들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높은 소리가 시야마저 뒤흔들었다. 바닥이 훅 꺼졌다. 이도하는 새하얗게 번진 빛 사이로 놀란 황금색 눈동자를 보았다. 늘 거북이처럼 느리고 태연한 그답지 않게 다급하고, 절박한 눈.

“화이람!”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아슬아슬 스쳤다.

[시오한!]

메아리처럼 울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제 목소린가. 지금 제가 소리를 질렀나. 이도하는 어느새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뇌를 쑤시며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찢어지던 소리가 마침내 새하얗게 흩어졌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해를 응시한 것처럼 얼얼하게 물들었던 시야가 돌아왔다. 바뀐 공간, 까만 밤하늘, 열기를 약간 담은 선선한 공기, 조용한 사위, 그리고 엎드린 남자.

하- 이도하가 헛웃음을 삼켰다. 발밑으로 빛을 뿜던 소환진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제 아주 개나 소나….”

“할 말-”

퍽! 이도하가 남자를 걷어찼다. 갈색 머리칼이 지푸라기처럼 초라한 남자가 힘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도하는 머리가 뜨겁고 눈앞이 아찔하게 핑 돌아 여러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머리를 흔들었다. 눈앞에 새빨간 점들이 점멸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귀에 누군가의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도하가 남자의 손을 짓밟았다. 남자의 찢어진 머리에서 흐른 피가 흙바닥을 적셨다. 머리채를 잡고 들자 남자가 바르작거리며 손을 붙잡는다.

“자, 잠깐. 나는-”

“네 이름 같은 거 안 궁금해.”

이도하가 피범벅이 된 흙바닥을 짚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린 것처럼 번져 있던 피가 그의 손아귀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손을 들었을 때는 새빨간 칼날이 들려 있었다. 송곳 같기도, 창날 같기도 했다. 살의를 형체화 한 것처럼 몹시 날카로웠다. 이도하가 남자의 목으로 칼날을 꽂아 넣는 순간이었다.

“야!”

새된 외침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퍽! 하고 정체 모를 것과 부딪쳤지만 아프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다만 팔을 붙잡으며 몸을 날리는 통에 빗나간 칼날이 남자의 목을 비껴 흙바닥에 쑤셔 박혔다. 이도하가 시선을 내렸다. 작은 주먹이 그를 마구 때렸다. 어떻게든 그를 밀어내려 거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도하가 짤똥한 손목을 붙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이였다.

“하,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저리 가!”

“안 돼, 하지 마!!”

남자가 아이를 밀쳐냈으나, 이도하의 팔을 붙잡은 아이가 이제는 절 붙든 그의 손을 깨물었다. 이도하가 아이를 놓았다. 어떻게 해도 이도하를 밀쳐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아이는 제 몸으로 남자의 몸을 덮었다. 마른 몸이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신파야.”

남자의 머리채를 놓은 이도하가 아이의 목덜미를 잡아 끌어냈다. 아이가 남자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팔다리가 마르고 덩치도 작았지만 그렇게 매달리니 잘 떨어지지 않는다. 이도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손아귀에 잡힌 아이의 목은 가느다랬다. 그대로 쥐면 부러질 것 같았다. 힘을 주며, 이도하가 다시 칼을 들었다. 끅- 목이 졸린 소리가 났다. 그러면서도 더욱더 남자의 몸을 붙든다.

“화이람!”

탁- 뜨거운 손이 이도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칼날을 채가며 끌어당긴다. 어느새 단단한 품에 안긴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붉은빛과 노란빛으로 점멸하던 시야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시오한?”

“미안해.”

“…….”

“미안해, 화이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도하는 영문을 몰라 가만히 있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로 밀려들어 와 온몸을 차갑게 식혔다. 두근두근- 요란하고 시끄럽게 울리던 맥박 소리가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도대체 이게… 이도하가 제 손을 바라보았다. 멀어졌던 줄도 몰랐던 현실감이 선명하게 몰려들었다. 눈 뜨고 꿈을 꾸다가 문득 깨어난 것 같았다. 아. 그는 깨달았다. 머리가 저릿할 정도로 그를 잠식했던 감정. 그건 제가 아닌, 시오한의 분노였던 것이다.

“…괜찮아.”

감정 동조화. 한 번도 무겁게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그 말의 무게가 새삼 살갗으로 느껴진다. 이도하는 처음으로, 조금도 억누르고 다듬어내지 않은 시오한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느낀 것 같았다.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본 것 같았다. 데인 것처럼 욱신거리고, 잔상이 남아 어지럽다. 그 잠깐의 실체는 아주 강렬해, 그 안으로 잠깐이나마 통째로 삼켜졌던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도하는 바늘에 찔린 것처럼 저릿한 손끝을 손바닥 안으로 말아 넣었다.

“괜찮아, 시오한.”

제 등에 닿은 손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이도하가 말했다.

“진정해.”

“…….”

잠깐 망설인 이도하가 말했다.

“…나 여기 있어.”

“…응.”

가만히 눈을 내리감고 그에게 기대려던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그가 홱 돌아보았다. 헉, 이도하가 숨을 들이켰다. 안도하고 있다가 이도하를 따라 시선을 든 남자와 아이가 동시에 경악했다.

검은 밤하늘에 무수히 많은 것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공기 중의 수분을 끌어모아 얼음으로 만든 그것은 투명해서 잘 보이지도 않았으나, 전부 거대한 바늘이었다! 그건 이도하가 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바늘 끝이 움찔, 하는 순간 남자가 몸을 틀어 아이를 덮었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꽉 잡았다.

“아악!”

“자- 잠깐잠깐!”

순식간에 쇄도하던 수천 개의 거대한 바늘이 우뚝 멈추어 섰다. 바늘 끝이 남자의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다. 이도하도 머리끝이 주뼛 섰다. 식은땀이 순간 등허리를 타고 쭉 흘렀다. 멈춘 것은 이도하였다. 애초에 제 힘이니 더 힘을 쓸 필요는 없었지만 제 특기를 제 특기로 막다니.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쓸 수 있는 힘이 서툴고 미약하기는? 응용력이 기가 막히기만 하다.

“왜, 화이람?”

시오한이 여상하게 물었다. 이도하가 몸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시오한이 태연하게 웃어 보였다. 여느 때와 완벽하게 같은 웃음이었으나 이도하는 발바닥까지 땀이 날 것 같았다. 완전히 돌아버렸구나. 이건 360도를 한 바퀴 돌아 다른 사람이 된 시오한이었다. 새하얗게 불탔다가 마침내 차분히 진정했지만 그 안에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것이다.

“애, 애잖아. 애.”

“…그래. 그렇지.”

그 말은 정말 눈곱만큼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도하는 불길함을 느꼈고, 그건 벌집이 되기 직전인 남자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손끝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남자를 붙들고 있던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에 잡힌 듯 주르륵 끌려나갔다.

“모리온! 모리온!”

아이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 순간 눈물로 범벅이 된 아이의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남자의 몸 한 치 위에서 번뜩이고 있던 바늘 몇 개가 방향을 바꿨다. 아이는 계약자였다!

이도하가 눈을 의심하는 사이 바늘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아니, 종이비행기처럼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수천 개 중에 고작 두어 개만 움직였을 뿐이며, 그나마도 하나는 중간에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오늘 더 기가 막힐 일도 없다고 생각했던 이도하는 이제 정말 해탈할 것 같았다.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보니 눈도 까맣고 머리도 까만 아이는 누가 봐도 동양인이었다. 어느 모로 봐도 고작해야 초등학생인데, 어떻게 초등학생이 계약자가 될 수 있나.

“야, 너-”

“이 씨발!!”

제 허리께에나 올 법한 조막만 한 꼬맹이한테서 터져 나온 거침없는 쌍욕에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꼼짝도 못하고 엎드려 있던 남자가 왈칵 피를 토했다. 모리온! 아이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려다 바늘을 보고 움칠 물러서더니 무려 그것을 손을 잡아 치워내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완전히 아연해지고 말았다.

시오한이 눈만 깜빡여도 온몸에 구멍이 술술 뚫릴 위기에 놓인, 장작처럼 마른 남자는 피를 토하고 있고, 그걸 보며 엉엉 울고 있는, 비슷하게 마른 아홉 살 남짓의 꼬맹이.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그들. 이건 뭐, 가엽고 힘없지만 패기 하나로 어떻게든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을 짓밟는 악역이 따로 없는 입장이 아닌가.

흘긋 시오한을 돌아보고는 아찔해지기까지 했다. 깔짝깔짝 발을 깨물며 캉캉 짖어대는 치와와를 바라보는 사자의 얼굴이 그와 비슷할 듯하다. 평소였더라면 적당히 봐주겠지만, 그 사자가 먹이를 빼앗겨 아주 화가 난 상태라면 문제가 된다. 이도하가 먹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시오한은 단순히 ‘화가 났다’고 귀엽게 표현할 수준을 아득하게 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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