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허참. 이도하가 시오한의 얼굴을 밀어냈다.
“진짜 어이가 없네….”
“하하.”
“말아라, 말아. 참 나.”
이제 정말 시오한도 궁으로 돌아가야 하기는 했다.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의 후드를 뒤집어씌웠다. 빛이 조금만 비쳐도 번쩍거리는 눈에 띄는 머리칼까지 완벽하게 가리고 그들은 다시 인파 속으로 흘러나왔다.
“…뜻이 있기는 한 거야?”
이도하가 하는 말을 들으려 약간 고개를 기울였던 시오한은 잠깐 대답이 없었다. 이도하는 후드 아래로 드러난 입매에 힘이 꽉 들어간 것을 분명히 보았다.
“말하지 마, 진짜 말하지 마라.”
“화이람.”
“씁. 내가 찾아본다.”
시오한이 어깨를 떨었다. 그때 만원 지하철처럼 꽉 찬 사람들 속에서 무언가 팍 튀어나와 시오한에게로 쏘아졌다. 깜짝 놀란 이도하가 반사적으로 특기를 터트리려는 찰나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시오한이 다른 손을 펼쳤다. 그 찰나에 그의 품속으로 돌진한 것은 조막만 한 새였다. 참새보다도 더 작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거무튀튀한 것이 꼭 구워지다 만 것 같았다. 이도하가 손끝으로 새를 툭 건드려보았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특기 아냐?”
“암군의 소통 방식이야. 내게 오는 건 보고.”
새가 시오한과 눈을 맞추었다.
“반군의 계약주는 도주 중에 계약자를 소환했다가 그에게 죽고… 연루된 현자의 탑 연구원은 확인된 바로 모두 셋. 하나는 이미 죽은 뒤였고, 하나는 붙잡았으며, 마지막 하나는 아직 추적 중이다….”
할 일을 마친 새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손바닥에 남은 것은 재였다. 그나마도 옅은 바람 한 줄기에 금세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시오한이 가볍게 손바닥을 털었다.
“고작 두어 시간밖에 없었을 텐데… 꼬리 자르기가 빠른걸.”
“…계약자가 계약주를 죽였다고?”
“말했듯이, 유도계약은 유대도 무엇도 생기지 않아. 목적이 어긋나면 계약주가 아니라 허튼소리를 흘릴지 모르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게 될 수도 있겠지. …화이람?”
“…아니야.”
이도하가 고개를 흔들었다. 소환부터 시작해서 별… 아찔한 느낌에 이마를 다 짚게 되었다. 아무리 이도하가 오즈나 계약자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고 해도 이 정도 일이면 알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는 오늘까지 유도계약이란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러면서 오즈는 무슨 소설처럼 환상과 모험만 가득한 양… 이도하는 절로 냉소가 나왔다. 알 만하다.
“계약주가 죽으면 다시는 계약을 맺을 수가 없잖아.”
이도하는 단 한 번도 오즈에 있는 소환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므로, 소원이니 기원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몰랐다. 그의 세계는 계약자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으니 특기자들은 모두 잠재적 계약자로서 평생 소환이 되든가, 되지 않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중에 평생 소환되지 않는 특기자들은 두 가지 경우로 나뉘었다. 소환주가 평생 계약주가 될 의사가 없든가, 아니면 아예 소환주가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기자와 소환주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파장- 조금 낭만을 보태 말하면 인연, 혹은 운명으로도 정의할 수 있는 어떠한 일치로 인해 이미 결정되어 있으며 오직 한 명뿐이다. 아이라에서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니 계약을 맺은 계약주가 죽으면 계약자는 다시는 계약을 맺을 수 없으며, 이는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자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여태까지는 그게 섭리였다.
“마력이 조금도 아깝지 않던가… 아니면 대체할 수단이 있던가.”
마력은 이도하의 세계에서 곧 막대한 부였다. 건물주, 조물주 위에 계약주 있다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세계에 불려가 포케몬 놀이는 하지 않겠다며 계약을 거부하는 특기자들도 있긴 하지만 사실 그보다 소환되게 해주세요, 하고 절이나 교회에서 기도하는 특기자들이 더 많다. 당장 공명심이라고는 없었던 이도하 저만해도 맛깔 나는 자본의 맛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말이다.
계약주와 계약자 사이의 유대니 애착이니 하는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마력이라는 엄청난 메리트를, 심지어 돈이 중요했을 러시아의 깡패가 그렇게 서슴없이 버릴 이유는 많지 않을 테였다. 가령, 다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쓸모없는’ 계약주 따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계약주가 있는 이도하를 소환해내 계약을 시도한 것처럼. 계약주가 있더라도 다른 계약주와 계약할 수 있다면. 혹은 계약주가 죽더라도 또다시 계약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거라면. 이도하는 부서진 퍼즐처럼 조각나 있던 그림이 대충 모양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저쪽에서 주도한 일 같은데.”
“글쎄…. 욕심이란 게 입맛에 맞는 이익이 있어 움직이는 것이니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시오한이 말했다. 부와 권력을 누리기는 계약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자의 탑이 암암리에 유도계약을 알선했다고 했으니 그 이득도 짭짤했을 것이다. 더 많은 계약주를 양산해 낼 수 있고,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 중심에 설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니고 현자의 탑뿐이었다. 군나르 아스터의 말처럼 발라리온의 반군은 정말 그 사이에 끼어 쓰고 버리는 패로 이용만 당한 것이다.
“쯧.”
이도하는 기분이 몹시 더러워져, 길고 덥수룩한 로브에 휘감긴 시오한의 손을 찾아내 꽉 잡았다. 시오한 테라피가 필요했다. 그러나 별로 성공적이지는 못 했다. 뜨끈하게 아까보다도 좀 더 열이 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았다. 이제 정말 돌아가야 했다.
“한 번 정도는 도약해도 괜찮겠지.”
“걸어가도 돼.”
“오늘은 당신이 이 사람 많은 데를 걸어가다가 갑자기 칼에 푹 찔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
“내가?”
시오한이 되물었다. 놀랍게도, 약간 부루퉁한 얼굴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 같았다. 물론 이도하는 제1기사라는 게 어떤 건지 충분할 정도로 확인했지만, 오늘만은 갑자기 하늘이 와르르 무너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도하가 대충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알잖아. 알면서도 걱정하는 게 사람 마음.”
알지? 알지. 자문자답하며 이도하가 시오한을 잡아끌었다. 도약을 한다고 주변에 거창한 효과가 일지는 않았지만, 도약한 자리에 주인을 잃은 팔이나 다리 한 짝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렇게 인구가 과밀한 곳에서는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시오한이 힘없이 터덜터덜 끌려왔다. 치과에 가는 어린아이처럼 성의도 의욕도 없는 걸음걸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이도하의 어깨를 탁 잡았다. 그리고 반갑게 외쳤다.
“형!”
이도하도 시오한도 우뚝 멈춰 섰다. 로브도 없이 훤히 드러난 얼굴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다. 아주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유세오?”
“우와, 형!”
유세오가 다시 한 번 반갑게 외쳤다.
***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유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르페노스 공.”
“음, 예. 저도.”
이도하가 짧게 화답했다. 이리나 소버스- 이리스티리움 궁성 기사단의 단장이자 소버스 백작, 그리고 유세오의 계약주. 엄청나게 깐깐하고 고지식하다고 했던 유세오의 말과는 전혀 다르게 그녀는 아주 다정다감한 사람 같았다.
칼을 녹여서 머리칼로 만든 것 같은 잿빛 머리칼이 화려하게 구불거려 차가워 보이기도 했지만 인상이 부드러운 미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사람이 고지식할 수 없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유세오의 말이 꽤 편파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정말 많이 했지요.”
그렇게 말하며 이리나 소버스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정말 쉬지 않고 끊임없이 떠들어 댄 게 분명했다.
“형, 나 진짜 한 번쯤은 오즈에서 형을 보겠지, 했지만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대박. 형 여기서 파는 오리도스라는 거 알아요? 먹어봤어요? 그거 진짜 핵존맛인… 억! 죄송해요, 폐하.”
지금도 이렇게 쉬지 않고 떠들고 있으니. 시오한의 손목을 잡은 채 이리나와 이도하에게 말을 하며 동시에 골목 바깥을 가리키려던 유세오는 시오한의 발을 밟을 뻔하자 황급히 사과했다. 시오한은 지그시 웃었고, 이리나 역시 자애롭게 웃으며 유세오를 황제에게서 조금 떨어트려 놓았다.
“유리, 내 말 기억하지?”
“알아요, 알아요.”
새파랗게 섬광이 돋은 눈으로 유세오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멋쩍은 기색이었다. 이도하는 유세오가 잡은 시오한의 손목을 보고 있었다.
“그건 꼭 그렇게 잡아야 되냐?”
“네?”
“그걸 꼭 그렇게 쥐어야 하냐고.”
“…아니면 회복을 어떻게 해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유세오가 쳐다봤고, 스스로도 참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다 싶은 이도하가 그냥 손을 내저었다. 시오한이 잠깐 하늘을 보았다가 다시 기품 있는 황제로 돌아왔다.
“형, 저쪽에서 지금 완전 난리도 아니에요.”
잠시를 못 참고 유세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름 눈치를 본다고 한껏 목소리를 죽이고 소곤거렸지만 그래 봐야 두 발자국도 더 못 딛는 좁은 골목이었다. 굳이 시오한의 옆으로 구겨진 이도하나, 유세오의 옆에 같이 구겨져야 했던 이리나 소버스에게도 확실하게 들렸다. 이도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도, 얘기하고 싶지도 않은 주제였다.
“알아.”
“아니, 진짜 난리예요. 형 바다 들어 올린 거 말고, 물론 그것도 개오지긴 하는데 중간에 형이 소환되는 바람에 지금 전 세계에서 키보드 배틀 존나 개쩔고 와, 그냥 막.”
“유리.”
이리나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유세오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 톤이 내려가 있었다. 유세오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기어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것만은 참을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전 당연히 형 편이에요!”
“…참 힘이 된다.”
유세오가 다 안다는 것처럼 씩 웃었다. 얼마 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 슬슬 끝날 때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제 고작 두어 마디 나누었을 뿐이란 사실에 이도하는 한숨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다 그는 슬쩍 시오한을 보았다. 시오한은 시선을 내리깐 채 유세오가 쥔 제 손목만 바라보고 있었다.
“…….”
“환계에 큰 재앙이 있었다고, 오르페노스 공께서 잘 막아내셔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리나가 굳이 첨언했다. 이도하가 이 일에 대해 시오한에게 언급하지 않을 것을 눈치챈 것이다. 황제인 시오한이 있는 곳에서, 그것도 그의 계약자에 대해서 그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명백히 무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해맑은 유세오는 이리나가 아예 더 떠들고 싶었던 일을 거론하는 것 같자 신나 했지만, 이도하가 그의 머리를 꾹 내리눌렀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누구든 막았을 겁니다.”
“형 아니면 누가-”
“집중, 집중, 짜식아.”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결국 공께서 하셨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굳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간절한 기적이었을 테니까요.”
“…….”
“하지만 그토록 무서운 재앙도 막을 수 있는 환령들이 많다는 건 부러운 말씀이네요.”
이리나 소버스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볼멘 얼굴을 하고 있는 유세오를 보고는 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내었다. 유세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이도하는 외동이라 누나의 존재가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단어가 주는 어감을 그대로 웃는 모습으로 만들면 지금 이리나 소버스일 것 같았다.
“천재지변이 없는 게 부러운 일이죠.”
오즈에는 지진이라던가, 대형 폭풍이라던가 하는 자연적인 천재지변이 없다고 들은 기억이 있다. 지각이나 기후가 다르다던가 어떻다던가. 그런데 이리나 소버스가 의아하게 이도하를 보았다.
“이곳에도 천재지변은 있어요.”
“…있다고요?”
“잦지는 않지만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죠. 이리스티리움에도 큰 재앙이 닥친 적이 있는 것처럼요.”
“언제요?”
“…18년 전이요. 모르시나요?”
이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18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