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시오한이 바짝 당겨 안았던 이도하를 놓아주었다. 이도하는 주춤 물러나는 것처럼 한 발자국 뒷걸음쳐 다시 벽에 풀썩, 등을 기대었다.
“맹세할게.”
“…어. 그래.”
이도하가 고장 난 인형처럼 끄덕였다. 그리고 곧 정신을 차렸다. 아씨. 쥐구멍으로 숨고 싶다. 그는 후드 자락을 턱 끝까지 잡아 내렸다.
“내가 궁금해서 그래. 이게 전부인지, 뭐가 더 있는지… 끝에 뭐가 있는지.”
“…….”
“영 수상하잖아.”
이도하도 그 대충 휘갈긴 것 같은 천 년 전의 글을 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내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그 전까지는 맹약이건 뭐건 안중에 없이 잊고 있기도 했으니. 그러나 그 글은 정말 누가 봐도 몹시 수상했고, 우르슬라까지 엮이게 되니 이도하는 이제 어떻게 해도 그냥 묻어놓을 수가 없었다.
“불안하다고.”
시오한의 뺨에 손등을 대어주며, 이도하가 말했다.
“그대 말이 맞아.”
차가운 손이 기분 좋은 듯 시오한은 아예 이도하의 손목을 잡고 제 얼굴 여기저기에 갖다 대었다. 사람이 무슨 냉 팩도 아니고 이 양반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도하는 까딱 눈썹을 들면서도 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러나 시오한이 그의 손을 제 목에 갖다 대었을 때는 손끝을 조금 오므리게 되었다. 두근두근- 맥박이 느껴졌다.
“내가 어리석어 그래. 그저 지금이 좋아서.”
“…….”
“이렇게 그대를 보고, 만지고, 이야기하는 그 시간들이 좋아서.”
“…내일 없이 사는 것도 좋지.”
이도하가 태세를 바꿨다. 시오한이 그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금실 같은 머리칼이 흘러내려 이도하는 귀 뒤로 넘겨주었다. 시오한이 다시 그 손을 잡아 제 목의 움푹 파인 곳에 가져다 얹었다.
“나는 내일을 봐야 하는 사람인데.”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인생 4회차쯤 돌면 인정.”
시오한이 반짝 웃었다.
“그렇지?”
골목 바깥으로 무수한 인파가 지나가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 물건과 사람을 피해 어깨를 부딪치고, 발을 밟고, 호객을 하고 물건을 흥정하며 움직이는 소리들이 소곤소곤 들려왔다.그 조용한 소란에서 한 걸음 빗겨 난 채 그들은 흐린 어둠 속에서 시선을 마주했다. 저쪽은 늦가을이 지나고 있는데 이리스티리움은 이제 여름에 접어들어 밤공기도 봄날의 낮처럼 따뜻하기만 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데도 골목에 들어와 있으니 열기만 남았다.
“그래도 나는 계속 찾아볼래.”
“응.”
“당신이 보여준 그 고서. 계속 찾아보고 있었거든.”
“응.”
시오한이 꼬박꼬박 대답했다. 이도하가 그의 눈앞으로 손가락을 흔들어보았다. 상태가 썩 좋지 않기는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할 정도는 아닐 텐데. 혹시 혼미한가 싶었다. 시오한은 이도하가 흔드는 대로 열심히 손가락을 바라봐 주었다. 뭘 또 맞추고 있냐. 타박하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이마를 꾹 눌렀다.
“아까 거기, 내가 소환되었던 곳. 수도원이라고 했잖아.”
“추측으로는.”
“추측?”
“이리스티리움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천 년 전의 이름 없는 왕국의 유적이야.”
천 년. 이도하가 물었다.
“이름이 없어?”
“이름도, 기록도 얼마 없지. 반란으로 멸망했으니.”
나라를 뒤집고 새 나라를 세운 세력은 그 이전의 기록을 모두 지우고 묻어 흔적을 지우려 했다. 지금 남은 기록은 그 이전의 왕국이 얼마나 무너지고 지워져야 마땅했는지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이도하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시오한이 설명을 더했다.
“오랜 풍요를 누리던 왕국들은 대체로 그렇듯 안에서부터 멸망했다고 하지. 생존을 벗어나 어떻게 하면 더 잘 살까, 하는 수준까지 지나게 되면 그 번영을 영원히 누릴 궁리를 하거나 전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기 마련이니까. 마녀사냥과 악마 숭배가 횡행하고, 왕은 불사를 꿈꾸다가 아들과 딸들을 죽이기에 이르렀고, 보다 못한 어느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엎었다고….”
마녀사냥에 악마 숭배. 이건 또 어디서 많이 듣던 옛날이야기 같다. 신빙성이 점점 떨어진다. 이도하의 시선을 받은 시오한이 마무리했다.
“기록은 그렇게 전해. 그 공작가가 지금 이리스티리움 황가의 시초야.”
“아, 승자의 기록.”
이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람, 그곳에 무엇이 있었어?”
시오한이 물었다.
“…소환진.”
이도하가 대답했다. 손톱 끝에 걸렸던 그 미세한 홈. 거친 돌의 표면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느낌으로는 옆으로 길게 이어진 선 같았다. 비슷한 것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면 이도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을 것이다.
“소환진?”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는 않고… 한 번 더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래, 그대가 원하는 대로.”
시오한은 더 묻지 않고 선선히 답했다. 이도하는 그런 시오한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제 앞에서만 이러는 건가, 아니면 원래 이렇게 태연한가. 대체로 사람들이 경악할 만한 일을 앞두고 이도하가 보이는 무심함이나 태연함이 그의 능력에서 기인했듯이, 이도하는 이게 다 시오한이 황제이기 때문인가 싶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도 저랬을까.
“시오한.”
“응.”
이도하는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그러나 시오한이 먼저 선수를 쳤다.
“듣기 좋다.”
시오한이 편안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이도하의 손에 제 목을 쥐여 준 것 같은 모양새로. 전에 없이 가볍고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에 이도하는 순간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까먹고 말았다.
“…시오한.”
“응.”
“시오한.”
이도하는 혀끝으로 획 하나하나를 낯설게 발음해 보았다. 알지도 못하는 낯선 언어를 듣고 말하고 있다는 게 갑자기 와 닿았다. 강의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제 언어로 발음하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따로 떨어져 있기보다 부드럽게 한 획으로 모두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시오한.”
그렇게 자각하고 부르는 이름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갑자기… 이도하는 미약하게 인상을 썼다. 뭉근하게 끓인 수프를 휘젓는 것 같다. 제가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을 때 시오한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도하의 감정을 느낀 시오한이 갸름하게 눈을 떴다.
“시오한.”
“응, 화이람.”
“내 이름 말이야.”
“응.”
“언제 지었어?”
“음?”
“뜻이 있나?”
생각지 못한 질문이었던 듯 시오한이 반문했다.
“그때 순간적으로 짓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때’라고 하면 이제 그들 사이에서 혼이 흩어지고 넋이 날아갈 뻔했던 계약의 순간을 가리켰다. 이도하는 그때 펼쳐졌던 피바다만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다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당신 나를 서른두 번이나 소환했잖아.”
“그랬지?”
“소환하기 전에 지었나.”
“전이라….”
“…아님 중간에….”
“중간에?”
이도하가 말을 흐렸다. 불러도 불러도 안 오니까 혹시 중간에 지어 놓은 이름을 바꿨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시오한이 그럴 성격 같지는 않았지만, 김윤혜가 말했던 대로 서른두 번이나 거절한 저나 서른두 번이나 소환한 시오한이나 똥고집은 거기서 거기였다. 치열한 줄다리기였다. 시오한이 반칙을 하지 않았으면 이도하는 저조차도 제가 언제까지 거절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반칙. 솔직히 그게 반칙은 반칙이었지. 결과적으로 그들은 지금의 모습이 되었지만, 시오한이 아니었더라면 이도하는 그 반칙이 어떻게 풀렸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뽀송하고 상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제 폐하. 툭 까놓고 말해 봐. 전쟁이라도 하려고?’
‘화이람. 그대를 앞세워서 전쟁을 했다가는 내가 먼저 죽어.’
‘그럼 대체 뭔데?’
‘밥 먹자.’
밥 먹자. 새삼 그 말이 기껏 세우고 있던 적개심과 경계심을 얼마나 허탈하게 만들었는지. 만약 시오한이 다른 말을 했더라면. 밥 먹자, 가 아니라 성 하나 세우자,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맹약은 파기할 수도 없는데 계약까지 서른두 번이나 끌어온 두 옹고집이 만났으니 계약주와 계약자 간에 눈 뜨고는 못 볼 불꽃 튀는 접전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정말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는데.
모든 순간에 분명 시오한은 제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고 있었는데, 이도하는 이제 보니 제가 살살 꾀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르렁거리면서도 눈앞에서 살살 흔드는 강아지풀에 홀려 정신을 빼앗겨 따라온 것 마냥… 아니, 시오한은 매번 밥 먹자며 입에 뭔가를 넣어주었으니, 사실 먹을 것에 넘어간 건가.
진짜? 먹을 거에 넘어갔나? 그러고 보면 방금 전에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쫓아가는 동안 가지각색으로 변하던 표정이 종래에는 혼란에 가득 찬다. 이도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즐겁게 관찰하던 시오한이 짧게 웃었다. 작은 웃음소리에 이도하가 정신을 차렸다.
“내가 궁금하구나, 화이람.”
그렇게 말하는 시오한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도하는 조금 떨떠름해졌다.
“어… 뭐. 그렇지.”
그게 뭐 새삼스러운가 싶었다. 사실 잠깐 동안에 생각이 휘몰아치느라고 제가 방금 뭘 물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아, 이름. 간신히 떠오른 순간에 시오한이 대답했다.
“비밀이야.”
“…엉?”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도하가 어벙하게 대꾸했다.
“알려주지 않을래.”
그러면서 씩 웃는다. 이도하는 어처구니가 없어 말했다.
“사기꾼이? 거짓말 안 한다며?”
“미친놈, 변태, 사기꾼, 안 좋은 별명이 점점 늘어나네. 어떻게 해야 하지?”
“뭐, 그걸 다 기억해?”
“전부, 나는 다 기억해.”
“잊자.”
“음.”
“말 돌리지 말고.”
“화이람, 이건 오래된 위정자들의 수법인걸.”
사실을 말하던가, 아예 말하지 않던가.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하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니, 옥새도 준다며? 다 준다며? 다 가지라며? 이게 뭐라고 억울한 마음까지 솟구쳤다.
“다 해줄 것처럼 굴더니.”
그렇게 항변하는데,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쪽- 입맞춤 소리가 크게 났다. 이도하의 눈이 커졌다. 코앞에 다가온 시오한의 눈이 깊게 휘어졌다.
“응. 다 가져, 화이람.”
쪽! 한 번 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