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왜 일이 이렇게 됐지?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과거 그녀의 나라의 게으르고 나태한 왕은 이리스티리움의 군대가 성문에 다다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에 납작 엎드렸고, 나라의 유일한 자랑이라고 할 만한 굳게 닫힌 성문은 백성들이 손수 열어주었다. 나라가 통째로 넘어가고 있는데 그 어떤 화재도, 전투도, 비명도 없었다. 축제라도 일어난 것처럼 백성들은 통쾌해 했다.
꽁꽁 문을 걸어 잠그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혀를 찼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던 어린 공녀 이브롤테도 그를 따라 혀를 찼다. 어린 이브롤테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라가 넘어가는데 도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래서 행동했다. 모자란 것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귀족 아가씨였고, 모든 게 풍족했으나 그런 식으로 풍요를 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귀족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열의 어린 목소리로 설득하던 말이 전부 맞다고 생각했다.
유도계약을 이끌어내 성공했을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조금 힘들었지만, 잘 견뎠다고 생각했다.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이 계약주들을 모두 독점하는 건 옳지 못하고, 더 많은 나라들이 더 많은 계약으로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말에는 틀린 것이 없었다. 그러니 모두 정당한 일이었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이브롤테는 억울했다. 억울하고 두려웠다. 죽기 싫다. 그녀의 동료처럼 그 썩은 나무 같은 몰골이 되기는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때, 그녀의 눈앞으로 검은 신발 끝이 나타났다.
“악!!”
공포에 질린 이브롤테가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앞에 선 것은 늘씬하게 키가 아주 큰 여자였다. 짧은 까만색 머리칼 사이로 보랏빛 눈동자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도망쳐야 하는지도 모르고, 목적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네.”
암군 제3군단- 방첩대의 나사디아 튤리파가 이브롤테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흡사 건달 같은 몸짓이었다.
“괜히 더 힘 빼지 말고 얌전히 가자. 우리가 도와줄게.”
“야, 너처럼 말하면 그 말을 누가 믿겠냐. 나와 봐.”
저벅- 또 다른 발소리가 났다. 이브롤테의 뒤편에서 누군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화들짝 놀라 튀어 오르는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손길이 사뭇 다정했다. 벌벌 떨며 이브롤테가 돌아보았다. 그녀는 옅은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두건을 쓴 머리칼 아래 황금색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그치만 이 친구 말 정말이에요. 험하게 대하고 싶지 않은데. 많이 힘들어 보이고.”
나사디아는 바벨의 말에 코웃음을 쳤지만, 괜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사디아의 계약자, 궁의 특기가 바로 추적이었다. ‘떠도는 사냥개’.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이름이 궁의 특기를 나타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궁도 설명하기 싫어했다. 나사디아는 저쪽은 좀 독특하구나, 하고 말았다.
궁의 특기로 그들은 이미 죽은 계약주의 흔적을 추적해 낡은 여관에 도착했고, 기껏 동료를 죽여 놓고도 그 충격으로 꾸물거린 탓에 뒤늦게 여관을 빠져나가는 이브롤테의 흔적을 잡아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조용히 이브롤테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팔을 잡은 바벨이 이브롤테를 일으켰다. 묶거나, 입을 막지는 않았다. 필요하다면 그런 조치를 취하겠지만 이브롤테는 도망칠 여력도 없었고, 자살할 만큼 비장하지도 않은 여자였다. 이브롤테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바벨이 잘 생각했다는 것처럼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브롤테는 이들이 누군지도 몰랐다. 행동만 봐서는 꼭 그녀를 지켜주려는 사람 같았다.
순간 이를 악문 이브롤테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며 팔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살벌한 빛이 번뜩였다. 그러나 온 힘을 다해 휘두른 칼은 맥이 빠질 정도로 쉽게 막혔다. 탁- 간단하게 그녀의 손목을 틀어쥔 나사디아는 여전히 표정도 없었다. 칼날이 번뜩여 비춘 얼굴이 아름다웠으나, 손힘은 그렇지 않았다.
“아, 아악-”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이브롤테가 칼을 놓쳤다.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칼을 잡아챈 나사디아가 칼을 제 뒤춤에 대충 찔러 넣었다.
“귀찮은 짓 하지 마.”
[류드렌!]
이브롤테가 비명처럼 외쳤다. 깊은 동굴처럼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다. 나사디아의 눈에 낭패감이 스쳤다. 그녀가 튕기듯 재빨리 물러섰고, 바벨이 이브롤테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사디아가 있던 허공 위로 어둠을 가르고 푸른 소환진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푸른빛이 줄기줄기 솟구치며 얽혀 형체를 만들었다. 이브롤테가 희망에 찬 얼굴로 소환진을 바라보았다. 빛 속에서 온전한 형체를 이룬 인영은 빛이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팔을 들었다. 바벨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피가 솟구쳤다. 이브롤테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 뻥 뚫린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있어야 할 그녀의 가슴이, 심장이, 살과 피와 뼈가 바닥에 툭 떨어져 있었다.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네모나게 잘린, 그녀의 ‘가슴이었던’ 부분이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그와 함께 푸른빛을 뿜던 소환진도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
바벨이 손을 놓았다. 숨이 끊어진 몸뚱어리가 풀썩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나사디아도, 바벨도 할 말을 잃고 서서 이브롤테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계약자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다.
“…이렇게 멍청할 줄은.”
나사디아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 상황에서 유도 계약한 계약자를 소환할 줄이야. 동료들은 모두 죽었고 목적했던 것은 모두 어그러졌는데 계약자가 저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다니.
“큰일 났다.”
바벨이 아연하게 말했다.
“큰일은.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였어.”
“연구원 얼굴쯤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럼 얼른 첼스니티 불러. 방금 죽었으니 아직 저 머릿속에 남아 있겠지.”
나사디아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울상이 된 바벨이 앞섶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주머니였다. 입구를 열고 붓자 검은색 재가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바벨이 그 위로 후- 바람을 불었다. 한 번에 완전히 쓸려나간 재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골목 귀퉁이를 돌았을 때는 어렴풋이 새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궁]
나사디아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땅바닥 위에 소환진이 펼쳐졌다. 나타난 것은 팝콘 통을 든 남자였다. 옷은 잠옷 차림이었고, 금발은 산발이 되어 있었으며 눈에는 졸음기가 가득했다.
“와우.”
소환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궁이 대충 감탄사를 내뱉었다. 태연하게 마침 집어 들었던 팝콘을 마저 입에 넣으며 그가 나사디아를 바라보았다. 나사디아가 까딱 고갯짓했다.
“이런 특기, 알아?”
“우리 네시는 밤에도 낮에도 잠이 없고 일만 하지요….”
노랫말처럼 중얼거리며 그가 팝콘통을 나사디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들며 나사디아가 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상한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러거나 말거나 괴상한 노랫말을 중얼거리며 그가 사뭇 참혹한 현장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소꿉놀이를 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찔러보기까지 했다. 처음에 두부처럼 네모반듯하게 잘려 나온 가슴은 어느새 다 퍼져 구역질이 절로 나는 핏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사디아가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는 동안 궁은 손가락에 묻은 피와, 피가 엉긴 바닥에서 흙의 냄새를 맡아보더니 몸을 일으켜 허공의 냄새까지 맡아보았다. 눈동자에 새파란 섬광이 돋았다.
“깡패의 향이 짙게 나는걸.”
궁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유리… 격리… 공간 유리?”
“몰라?”
“독특한 특기이기는 한데, 다른 계약자에 대해서 물어보려면 시간을 좀 줘야지, 자기야. 저쪽은 지금 밤이야.”
“가, 그럼.”
“그래, 그래. 설명은 다음에 다시 또 해주고….”
나사디아가 말했고, 여전히 코를 킁킁거리고 있던 궁이 돌아섰다. 그가 우두커니 서서 나사디아를 바라보았다. 왜? 나사디아가 까딱 눈썹을 올렸다. 그녀에게 맡겨놨던 팝콘통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슬픈 한숨이었다.
“나한테 주면 사라지는 걸 매번 까먹는 네가 바보지.”
“응… 내 죄지, 내 죄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궁은 그대로 푸른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바벨이 다가왔다.
“금방 온대.”
“건진 건?”
“그웬달, 랜든, 모리온.”
바벨이 말했다. 죽은 자가 말이 없다는 것은 다 옛말이다. 나사디아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