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하지만….”
시리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만만하고 유쾌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이도하는 그녀가 정말 그렇게 순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볍게 말했지만 이건 정말 큰일이 맞았다. 사실로 드러난다면 ‘스캔들’ 따위의 귀여운 단어로는 감히 감당도 안 될 엄청난 사건이다.
소환되어 놀고먹은 것밖에 한 일이 없는 이도하보다도 오히려 암군의 사령관인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로서 어쩌면 목숨이 오고 가는 상황에서 활동했을지도 모르는 시리스에게야말로,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시리스는 구토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군나르 아스터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말했다.
“시리스, 돌아가.”
“…됐어. 지금은 아니야.”
“그대의 세상에서 이런 식으로 나의 나라에 개입한 게 맞다면… 생각을 달리 하도록 해주어야지.”
시오한이 말했다.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그는 그저 번거로워졌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으며 명령했다.
“군나르, 지체하지 말아라. 짐은 이 일을 오래 끌 생각이 없으니.”
“예, 폐하.”
발소리도 없이, 군나르는 그대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시리스 역시 잠시 말없이 서 있다 꾸벅, 시오한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역소환의 여파로 푸른빛 알갱이들이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맴돌다 허공으로 녹아 없어졌다. 텅 빈 동공에 남은 것은 이제 두 사람뿐이었다.
문득 손끝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이도하의 손을 잡은 시오한이 그를 당겼다. 허리를 안아 제 품에 깊숙이 넣고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숨을 쉬는 사람처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천천히 내뱉으며 그가 물었다.
“화이람.”
“…어.”
“잘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가 여상하게 동공을 울렸다. 분명히 아까도 한 번 인사라고 할 만한 것을 나누었는데 처음으로 마주 보는 것 같았다. 그래 뭐, 그건 없었던 일로 하자. 그의 마력이긴 해도 시오한에게 소환된 게 아니었으니까. 이도하는 태연한 척해보려 했지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잘 있었어? 그리 물으니 다시 이드로의 서약서를 앞에 둔 18살의 이도하가 된 것 같았다.
“…당신은.”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켜낸 이도하가 물었다.
“평안하지 못했지. 그대가 없어서.”
“미안해.”
“왜 사과를 해?”
“지난번에, 오지 못해서.”
시오한이 나직이 웃었다.
“그대는 아무것도 사과할 필요가 없어.”
“필요가 없기는. 기다리지 않았다고?”
이도하가 시오한의 턱을 잡고 고개를 들게 했다. 언제나 그렇듯 조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든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에 턱을 올려놓은 채 보란 듯이 아주 예쁘게 웃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이도하가 괜히 툴툴거렸다.
“내가 그대를 기다린 건 내 일이니 그대가 사과를 할 이유는 없지. 그대의 하루가 온전히 나로 채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사과할 필요도 없고.”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언뜻 배려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돌려 까는 느낌인데.”
“설마.”
웃으며, 그가 이도하를 놓아주었다. 이도하가 아쉬운 한숨을 삼켰다. 시오한은 시도 때도 없는 것처럼 굴다가도 이런 때에는 묘하게 담백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무척 기쁘기는 할 거야.”
귓가에 속삭인 시오한이 이도하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떨어지는 순간 쪽, 소리가 났다. 이도하가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위가 어둡고 고요하다. 이제야. 이주연, 윤윤형과 함께 강의실에 앉아있었던 것은 한 오천 년쯤 된 것 같았고, 시오한과 그의 침실에서 헤어졌던 일은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더 없이 평화로웠다.
“…가기 싫다.”
이도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넋이 반쯤 나간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가 않아.”
아무 생각 없이 말했지만… 말하고 나니 이도하는 정말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가만 제 등을 쓸어주는 손길에 이도하는 지친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기 있고 싶어.”
“돌아가지 마. 여기 있으면 돼.”
나지막한 목소리에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이도하가 픽 웃었다. 이것 봐, 이렇게 말해주니까.
“아무것도 안 할 건데.”
“하지 않아도 돼.”
“도와주고 싶어도 못 해. 나 아까 막… 당신 또 아플걸.”
“화이람, 그런 건 상관없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답했다. 뒷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곁에 그저 고양이처럼 있겠다고 했잖아. 배고프면 맛있는 걸 먹고, 졸리면 자고, 심심하면 놀아. 그대가 하고 싶은 걸 해.”
“…….”
“아무것도 하지 마, 화이람. 그냥 내 곁에만 있어.”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눈을 맞추며 웃었다.
“그럼 나는 그대를 예뻐할게.”
“…그건 돼지잖아.”
“…….”
산통을 와장창 깨는 소리에 시오한이 잠깐 황당한 얼굴을 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먹고, 자고, 놀고. 내 세계에서는 그러면 돼지 된다고 하거든…. 이도하가 괜히 투덜거리다 틈을 타 큼,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느닷없이 시오한을 아주 꽉 껴안았다. 웃음이 가시지 않아 들썩이면서도 그가 이도하를 마주 안았다. 이도하는 더 이상 끌어안을 수 없을 만큼 세차게 안았다가 그를 놓아주었다.
“돼지는 다음에 하자.”
조용하지만 실은 조용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쥐 떼가 이동하는 것 같은 밤이었다. 부산한 발자국과 다급한 숨이 불 꺼진 성도의 그림자 속에 가득할 것이다. 시오한이 이렇게 나와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당신도 궁에 돌아가야 하잖-”
이도하가 말을 씹었다. 그가 눈을 홉떴다. 시오한이 의아하게 그런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맞아- 당신!”
“응?”
시오한이 눈만 깜빡였다.
“아까 그거, 뭔데.”
“무엇이?”
“여기 감옥이다? 뒤로도 벽, 앞으로도 벽, 옆으로도 벽, 위로도 벽.”
“그렇지.”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한 얼굴이다. 이 능청에 기가 막힌 이도하가 덥석 그의 뺨을 붙잡았다.
“상식을 넘나들더니 언제부터 벽까지 넘나들 수 있게 되셨어요, 맹약자님.”
눈을 굴리던 시오한이 슬쩍 웃었다. 이도하도 살벌하게 웃었다. 시오한이 눈을 접으며 한층 더 요망하게 웃는다. 이제는 아주 대놓고? 울컥 울화가 치민 이도하가 그를 흔들었다.
“웃지 마, 웃지 마.”
“읏즈 므?”
“그렇게 웃지 마.”
시오한이 정말 웃음을 지웠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게 아기 개와 다름없었다. 이도하는 정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랫배 어디쯤이 민망하게 끓어 더 그랬다. 괜히 억울했다.
“그거 도약이잖아!”
“음.”
어디 도약뿐인가. 이도하는 시오한이 코앞에서 터진 폭발에도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는 걸 똑똑히 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제가 한 줄 알았더랬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오한의 눈에 돌았던 섬광은 착각이 아니었다. 폭발에, 시오한의 섬광에, 이도하가 충격으로 굳은 사이 모든 게 끝나 있었다. 시오한이 슬그머니 이도하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내 힘이지.”
이도하가 단정하듯 물었다. 시오한이 한 발자국 그를 향해 다가섰다. 뭐, 왜 이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앞까지 붙은 시오한이 몸을 숙였다. 구겨지듯이 품에 파고들며 그가 이도하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나 배고파, 화이람.”
“…….”
“배고파서 힘이 안 나.”
이중계약, 계약 파기, 불법 실험, 계약자 정보 유출, 아이라의 개입,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 앞으로 일이 도대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심각한 문제들이 아주 산적해 있는데 태연하게 이딴 말을 한다. 황망해하던 이도하가 말했다.
“…밥, 해줄까.”
살벌한 질문에 잠시 시오한이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야무지게 목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든다. 쪽-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동공에 울렸다.
“맛있는 거 사줄게, 화이람.”
왜 제 계약주는 매번 제게 뭘 못 먹여 안달인가. 계약자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지금이 맛있는 것 따윌 먹으러 갈 때가 맞는가.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다 부질없었다. 황제가 가자고 하는데, 다 생각이 있고 방법이 있겠지. 이도하가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가자.”
***
헉-헉- 턱 끝에 치달은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다급했다. 어느새 자정이 다 된 도시는 아주 조용했다. 사방에 그녀 자신의 숨소리와 발소리밖에 없다. 가로등도 전부 꺼져 달빛만 무심하게 어둠에 녹아내렸다. 심장이 아프고 폐가 찢어질 것 같다.
골목과 골목, 모퉁이를 돌아 달리던 이브롤테는 마침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허물어지듯이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그 정도 통증 따위는 이미 그녀의 안중에도 없었다. 이브롤테는 허겁지겁 기다가 멈추었다. 얼굴이 눈물로 가득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를 피해라.
하지만 사방이 어둠이고, 사방이 그림자였다. 밤하늘에 구름이 한 점 없어 흐르는 그림자조차 없었다. 어둠이 그녀를 숨겨주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디로 숨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디로 가야 하지? 동료 하나는 처참한 몰골로 죽어버렸고, 남은 하나는 살기 위해 제 손으로 죽여 버렸다.
그러나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이브롤테는 쳇바퀴 위를 뛰어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어딘가에서 시선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도망칠 힘도 없었다. 그녀는 결국 완전히 갈 길을 잃은 채 망연히 피와 흙이 엉겨 붙어 더러워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